40화
“왕국에서 발발하기 전, 역병이 최종적으로 휩쓸고 간 영지가 이곳에서부터 수천 마일 떨어져있는 곳이라서. 아무리 전염성이 강한 병이긴 하지만 중간의 왕국들과 영지를 거치지 않고 갑자기 이곳에 퍼진 것도 의심스러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 그러다가 머릿속에 소름 끼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설마, 누가 그 역병을 일부러 퍼트린 건 아니겠지요?”
“예상만 하고 있다. 아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니 섣불리 장담할 순 없지만.”
한숨을 푹 내쉬는 아버지가 손등에 푸른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원인을 어떻게든 찾아내 벌을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을 증명하듯.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너무 잔인한 짓이다. 자연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제발 아니길 바란다. 아니어야 한다.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건 너무 큰 고통이므로.
나는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아버지를 향해서 더 활짝 웃어 보였다.
“에쉬가 저를 정말 많이 도와주었어요. 만약에 저 혼자였으면 아마 이렇게 빨리 수도로 오진 못했을 거고, 어머니 기일을 제대로 챙기기 어려웠을 거예요.”
“……제국의 고위 귀족이었던 것 같다고 했지? 그럴 것 같다고 예상은 했었다. 고위 귀족이라는 건 좀 놀랍지만.”
“본인 입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요. 그리고 오는 도중에 에쉬의 호위 기사였던 사람을 만나서 같이 왔어요.”
“호위 기사?”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호위 기사였다는데, 좀 특별한 인연이었던 것 같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에쉬와 함께 자라왔대요. 나중에 아버지께도 소개해 드릴게요.”
다행히 에쉬를 받아들일 때처럼 낯선 이의 방문을 불쾌해하진 않으셨다. 그저 내가 옆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게 기분 좋다는 듯 귀 기울여 듣기만 하셨다.
서재로 들어와서도 상석에 앉은 아버지의 대각선 바로 옆 가까이에 앉았다.
“그래서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예요?”
다시 생각을 고르는 듯 상체를 숙여 손깍지를 낀 아버지가 어렵게 운을 떼었다.
“보아하니 너는 그 녀석과 결혼에 대해서 굉장히 낙관적인 것 같은데.”
“……에쉬가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내쫓았겠지. 특히나 네가 그 녀석과 함께 있을 때면 꽤 행복해 보이기도 했고.”
그게 그렇게 티가 났나 싶어 민망해졌다. 수줍게 볼을 붉히며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때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게 구혼서가 왔더구나. 상대는 마젠티스 제국의 황제 폐하. 새 황제께서 너를 황후로 맞이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다.”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잠시 생각의 회로가 엉켰는지 머릿속이 새하얀 도화지로 물들다가 문득 정신이 들면서 얼굴이 확 구겨졌다.
“뭐, 뭐라고요?!”
“제국에서 사신단이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황제의 대리로 온 이가 직접 공문을 들고 찾아왔다.”
실감 나지 않는 이야기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런 나를 쳐다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아버지가 품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얼마 전 즉위한 새 황제께서 직접 작성하셨다는구나. 확인해 보거라.”
나와 똑같은 청록색 눈동자를 내리까는 아버지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나는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고스란히 느끼며 건네받은 서류를 펼쳐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교지의 내용은 새로 즉위한 황제가 황후를 맞이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비엔트 왕국에서 황후감을 찾았고, 그 여성은 마르엘 백작가의 삼녀 ‘르슈아 베키 마르엘’이라고.
낯선 필체로 쓴 교지에 내 이름이 정확하게 적혀있어서 피부가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뒷골이 당겼다. 어제 꾸었던 악몽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현실감이 떨어졌다.
“슈아, 괜찮으냐?”
“황제…… 새로 즉위한 그 사람의 어머니가 우리 비엔트 왕국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 여자와 우리 가문이 무슨 인연이라도 있던 건가요?”
“그때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당시 그 공작가와 우리 가문은 깊은 관계를 맺진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럼 왜, 대체 왜…….”
그저 이 상황이 어이없을 뿐이다. 우리 왕국에서 황후를 얻고 싶다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상대는 얼마든지 있었다. 아직 혼인 전인 왕녀부터 시작해 결혼적령기에 있는 귀족들까지.
그런데 왜 나일까? 왜 나를 지목했을까?
“황제 폐하의 뜻은 확고하다더구나. 네가 아니면 다른 누구도 황후로 들이지 않겠다고 하셔서. 그건 내 선에서 해결할 일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저 이 구혼, 못 받아들여요. 그럴 수 없어요. 마음을 떠나서…… 아, 아무튼 안 돼요.”
하마터면 아버지께 에쉬와 그렇고 그런 짓을 벌였다고 털어놓을 뻔했다. 어렴풋이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음을 토로할 수는 없는 일.
“나 역시 내 딸이 그런 험난한 곳으로 보내는 건 달갑지 않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거라. 왕비 전하께서는 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황후의 자리는 여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황후가 되면 왕국과 더 끈끈하게 맺어져 서로에게 득이 될 수 있을 테니, 왕비인 첫째 언니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기회겠지.
하지만 나는 싫다. 에쉬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에쉬와 떨어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그 황제의 대리로 온 사신단, 언제 돌아가나요?”
“네게 확답을 받을 때까지 머물겠다고 했다.”
“제가 직접 만나봐야겠어요.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요. 아버지가 자리 좀 만들어주세요.”
조짐이 좋지 않았다. 분명 내가 알기로는 에쉬의 가문이 황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새 황제가 황좌를 거머쥐기 위해 에쉬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니까.
파빌리엔이 다녀간 이후, 에쉬가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내보였으니 분명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카시안도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을 테고.
왠지 이번 일은 에쉬를 제국으로 다시 복귀시키기 위해서 벌인 일 같았다. 굳이 나를 지목한 이유, 그게 아니고서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나를 이용해 에쉬에게 덫을 놓으려는 그 행태가 너무도 얄미웠다. 무엇보다 나와 에쉬를 갈라놓으려고 하다니.
“그래. 알겠다. 오늘은 이만 가서 쉬어라.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아버지께서 위로해주시듯 내 손을 꼭 잡아주고 어깨를 다독여주었지만, 분노는 가시질 않았다. 이 상태로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닐 테니까.
서재를 나와서도 답지 않게 발을 쿵쿵 굴리면서 씩씩거리자, 집사가 나를 보고 놀란 눈으로 하고 눈치를 슬쩍 본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차를 올릴까요?”
“아니야. 괜찮아. 산책을 좀 할까 해.”
“밤이 늦었으니 너무 멀리 가진 마십시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잘근 씹으며 현관을 나섰다. 내장이 전부 타들어갈 것 같은 뜨거운 열기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냅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을 꾹 누르며 호흡을 고르는 일에 집중하였다.
“슈아!”
그때 밝고 명랑한 에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쪽 구석진 곳에서 카시안과 함께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 내게 한달음에 달려온다.
그 환한 표정의 그를 두 눈에 담으니 감정이 더 복잡하게 일궈졌다. 불쾌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가슴이 설레었으나 한편으로는 미안함에 심장이 묵직해지기도.
“……설마 여태 밖에 있었던 거예요?”
“여름에는 더운 실내보다는 바깥이 더 시원하니까요. 두 분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설명은 간단한데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슈아……?”
“산책, 산책을 좀 하고 싶어요.”
“그럼 내가 당신을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표정에서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는지 그가 평소보다 더 과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여서 순간 눈이 멀어버릴 뻔했다. 정말 치명적인 무기가 아닐 수 없다. 방금 미안했던 감정까지 사라지는 줄.
그 미소 하나가 내 마음을 이만큼 움직이다니.
에스코트를 하겠다는 듯 그가 내게 손등을 내밀었고,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작게 터트리며 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정원은 저쪽인데, 후원으로 가요.”
“후원 쪽은 대충 봐도 더 어둡고 음침해서 위험…… 아, 후원. 그럽시다. 후원으로.”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바로 방향을 트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아마도 후원에서의 은밀한 밀착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또한 당장 그에게 매달려 진한 키스를 퍼붓고 싶으니까.
이렇게 서로의 생각도 잘 통하는데, 이렇게나 완벽한 상대를 놔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이라니.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권력자라고 해도 싫었다.
그 목적이 에쉬의 복직이라면 차라리 그 일을 도와 에쉬를 제국으로 돌려보내고 정식으로 결혼을 하겠다. 제국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지만.
“슈아. 혹시…… 백작께서 결혼을 반대하신 겁니까?”
후원 입구에 도달하기 전까지 말없이 걷기만 했는데, 에쉬가 먼저 운을 뗀다. 그것도 아주 걱정을 많이 담아서 조심스럽게.
“왜 아버지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해요? 뭐 밉보인 거 있어요?”
“아니. 당신 얼굴이 꼭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처연해 보이길래. 그런 표정을 지을만한 일은 나와의 결혼 문제밖에 없지 않을까 해서요.”
틀린 말은 아닌데. 차라리 그 정도였으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더 좋았을지도.
“그건 아니에요. 그거보다 더한 문제가 생겨버렸거든요.”
“더한 문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시선을 맞췄다.
“마젠티스 제국 황제가 황후감을 지목했어요. 그게 나래요.”
“……예?”
나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서 커다란 손바닥을 내 뺨에 가져가 대고 두 눈을 사르르 감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 결혼을 흔들어놓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제국의 황제라는 거예요. 그 잔혹하고 변태에 정신이 이상하다던 그 남자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