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에브린도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다시 정면을 쳐다보더니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네 그이 주위에는 재미있는 사람이 많네. 나 저렇게 큰 사람은 처음 봐. 거인이라고 해도 믿겠어.”
역시 나와 생각이 다르진 않다. 나는 다시 카시안의 대단한 체격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알기로는 체격과 검술은 타고나는 것 이상으로 키우기가 무척이나 힘들다고 했다. 저렇게 큰 체구는 타고나지 않는 이상 자의로 만들기가 상당히 어려울 터. 가까이에서 본 카시안은 진짜 거인처럼 보이긴 한다. 검술 실력은 보지 못했지만 에쉬가 믿고 뒤를 맡길 정도면 제법 대단하다는 건데.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게 있어서 바로 에브린에게 물었다.
“어제 그랬잖아. 우리에게 따라붙었던 수상한 사람을 목격했다고. 그 사람이 카시안 저 남자 아닌 거야?”
“아닌데? 내가 본 사람은 작고 왜소했어. 저렇게 짧은 머리도 아니었고.”
나는 당연히 그 남자가 카시안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카시안이 염탐하듯 주변을 맴돌 소심한 사람도 아니긴 하지. 그럼 마차 바퀴를 망가트린 범인이 그 남자인 걸까? 대체 누굴 노리려고?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관자놀이에 미약한 통증인 느껴졌다. 그러자 에쉬가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편안한 미소를 그렸다.
“깊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소중한 이들이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도록 하세요.”
그래. 미리 걱정해봐야 마음만 괴롭지.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다행히 에쉬 덕분에 평온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아까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을 거니까.
그 다음 날 아침, 다시 재정비를 마치고 함께 마차에 올랐다.
“카시안은 안 타요?”
“저는 말이 편합니다. 주군께서도 말이 편할 텐데? 마차 타면 기껏 아침 식사하신 것 다 도로 토해내지 않겠습니까?”
“시끄럽다. 잘 따라오기나 해.”
“옙.”
씩씩하게 대답하는 카시안이 자신의 백마 위에 올라타서 선두에 선다. 이제 한나절만 더 가면 수도에 도달한다. 중간 정도에 큰 마을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크게 다쳤던 에쉬를 치료해준 의사가 있다.
한참을 달린 마차가 그 마을에 도달한 뒤, 나는 잠시 마차를 세웠다.
“여기서 쉬어가요. 어제부터 다들 너무 무리했으니까 계속 달리면 몸이 남아나질 않을 거예요.”
“좋은 생각입니다. 당신 친구분께서도 꽤 고단하신 모양이니까요.”
에브린은 마차 등받이에 기대 깊은 잠에 빠진 채였다. 깨울까 고민하는데 마차가 멈춘 것을 느꼈는지 바로 깨버렸다.
“으응…… 뭐야, 수도야?”
“중간 마을이야. 잠깐 쉬려고.”
“으윽! 아, 내 허리. 정말 이번 여행이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서 가장 힘든 것 같아. 수도 가자마자 며칠을 앓아눕겠어.”
어제 그 먼 길을 쉬지도 않고 달렸으니 당연하겠지. 가자마자 마사지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어디가, 슈아?”
“의사를 좀 만나보려고.”
“의사? 어디 아파?”
“에쉬를 치료해준 사람이거든. 그때 이 마을에 머물렀었어.”
아마 에쉬도 기억하지 못할 거다. 기억하더라도 계속 진통제가 섞인 수면제를 먹어서 가물가물할 거고.
그래도 의사에게 당신이 치료해준 이가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의 감사 인사도 할 겸.
그런데 우리가 방문하려던 의료원의 문이 잠겨있는 것이 의아하던 차, 주변 상인에 의해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거처를 옮겼다고요?”
“예. 한 일 년쯤 되었나? 지금은 아마 비어있을 겁니다. 의사분께서 갑자기 떠나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직원들도 죄다 갈 곳을 잃어버렸었지요.”
일 년 전이면 에쉬가 이곳에서 치료를 받던 그때다. 그럼 우리가 떠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떠났다는 뜻인데.
나는 반사적으로 에쉬를 쳐다봤다. 에쉬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마주 보고는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상인에게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전혀 모릅니까?”
“전혀요. 여기 와서 의료원을 차린 지 이십 년쯤 되신 분이었는데 갑자기 떠나셔서는 지금까지도 소식이 없습니다.”
“가족들은 없었습니까?”
“부인과 딸 둘이 있었는데 그 집도 비어있었으니 같이 떠난 게 아닌가 추측만 하고 있습지요.”
그 의료원에서 일하던 직원이 옮긴 일터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가 봤지만, 그 직원도 아는 것이 없다는 말뿐이었다. 갑자기 일자리가 사라져서 곤란했다고.
결국 우리는 아무 소득도 없이 간단한 간식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다시 마차로 돌아와야만 했다.
“왜 갑자기 떠났을까요? 오래 일한 곳이면 이미 정착했을 거고. 의료 실수를 했다면 사람들이 모르진 않았을 텐데.”
“개인적인 사연이 있겠지요. 아니면 당신이 지불한 사례금이 너무 거금이라 부담을 느끼고 아예 다른 마을로 떠나버린 걸지도 모르고요.”
그럴듯한 추측이라 수긍하며 다시 마차를 출발시켜 수도로 향했다. 왠지 에쉬가 머문 곳이어서 그를 추적한 이들과 마주치게 되어 곤란을 겪진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간직한 채.
어느덧 수도로 진입하는 성문에 도달하여 그곳을 지키는 왕궁 기사에게 귀족 패를 내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마르엘 백작 영애. 브레이튼 백작 영애. 수도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수도에는 별일 없나요?”
“현재 왕궁에 제국의 사신이 방문해계셔서 현재 왕도 출입을 더 강화하고 있습니다.”
제국에서 사신이 왔다고? 아버지께 그런 이야기는 전해 듣지 못했는데.
“언제 방문하셨지요?”
“어제 사신단 내방협조문서가 도착했고 오늘 새벽에 방문하셨습니다.”
그럼 지금쯤 긴급회의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마차를 출발시키고 저택으로 향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지.
“브링. 너는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부모님을 뵙기는 해야 하지 않아?”
“지금 가도 못 뵐 것 같아서 오늘은 쉬고 내일 가지 뭐. 아, 나 진짜 지금 당장 못 쉬면 병날 것 같아.”
“그래. 알았어. 그럼 일단 우리 백작저로 가자.”
예상대로 백작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마중 나온 사용인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가씨. 오랜만에 아가씨를 뵙게 되니 감개무량하군요. 그사이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었어? 몇 달 전에도 봤는데 뭘.”
“피곤하시지요? 안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목욕물 준비도 되었고 손님방도 전부 정리해두었습니다.”
일단 에쉬도 아직은 손님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라 방 하나를 내어주었다. 카시안에게도 손님방을 내어주려고 했으나 에쉬가 저지했다.
“저놈은 방을 내어주지 않아도 됩니다. 침대에서 자는 걸 가장 싫어하기도 하고 어차피 방에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닌지라.”
“그럼 어디서 지내요?”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알아서 지낼 테니 내버려 두십시오.”
카시안도 방에 미련은 없어 보였고 오히려 저택 주변을 탐색하기 바빴다. 안전한 곳인지 확인하는 동물 같기도 해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목욕부터 했다. 삼 일 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면서도 은근 아쉬운 건 남아있었다.
‘에쉬하고 같이 목욕하고 싶은데.’
본가에서야 에쉬하고 무엇을 해도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겠지만 여기는 수도라서 조심해야 한다. 결혼하기 전부터 남자와 함께 욕실을 사용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서로의 이미지에 타격이 갈 테니.
이미 낯선 남자 두 사람이 저택 안으로 들어와 사용인들이 동요한 것 같았지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피로를 풀고 마사지로 뭉친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려버렸다. 욕실을 나오고 머리를 말린 뒤에 방을 나오자 그새 하늘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손님방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가는 사이, 현관에 서 있던 집사가 나를 발견하고 바로 달려온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돌아오신답니다.”
“아, 그럼 내가 맞이하도록 할게.”
오랜만에 아버지를 뵙게 되어 조금 긴장이 되었다. 급하게 수도로 오게 된 목적도 빨리 달성하고 싶어서 마음도 조급해졌고.
“슈아. 이제 내려온 겁니까?”
때마침 홀로 나온 에쉬가 나를 반겼고, 나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아 그를 맞이했다.
“조금 쉬었어요? 본가보단 불편하죠?”
“괜찮습니다. 마음 놓고 쉴만한 공간이 생겨 편안합니다. 수도의 백작저 근처가 워낙 한적하고 조용하여 누군가 숨어드는 것도 단번에 알 수 있겠다고 좋아하더군요.”
“……카시안이 그래요?”
“네.”
호위 기사에게는 좋은 편인가보다. 그런 걸 신경 써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곧 저택 철문이 열리면서 마차가 안으로 들어온다. 현관 앞에 멈춰선 마차에서 아버지가 나오자마자 나는 계단을 단숨에 내려가 반겼다.
“저 왔어요, 아버지.”
“……그래. 오늘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너와 할 이야기가 있다. 서재로 따라오너라.”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는 아버지가 에쉬의 인사를 받고도 조금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올라가 버렸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 같은데.
“아버지하고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쉬고 있어요, 에쉬.”
“기다리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품에 안기고 싶지만 꾹 참고 그냥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꽤 힘들어 보인다. 어깨도 축 늘어지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이, 어머니의 부재가 그렇게 영향이 큰 건가 싶어서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 같이 가요.”
나는 평소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빠르게 뛰어올라가 팔짱을 꼈다. 평소에 전혀 하지 않던 행동이라서 어색하긴 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버지도 조금 당황한 듯 팔이 뻣뻣하게 굳긴 했다.
“그래, 본가에서는…… 별다른 일 없었고?”
“편지로 보낸 내용이 전부예요. 어머니 기일도 잘 치렀고요. 그새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아요, 아버지. 일이 많이 바쁘신 거예요? 아무리 바빠도 잘 챙겨 드셔야 하는데. 물론 집사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작년 역병이 너무 많은 인재를 사망에 이르게 해서 업무에 차질이 많이 생기더구나. 그것도 그거지만 역병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있는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상한 점이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