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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38)화 (39/113)

38화

“얼마든지.”

“카시안은 귀족이 아닌가요?”

적어도 고위 귀족의 호위 기사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가문을 물려받을 후계의 기사라면 더더욱. 그런데 아까 그의 아버지가 카시안을 가문에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형제는 아닌 것 같고, 먼 친척이라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둘 사이가 너무 친밀해서 궁금해졌다.

“아, 다른 이유로 물어보는 건 아니에요. 다만 내가 그 남자에게 하대해도 좋은 건지 서열을 좀 따져보고자 하는 것뿐이에요.”

내가 카시안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봐서 그런지 에쉬의 미소가 조금 묘하게 서늘해진 것 같았다. 재빨리 의도를 해명하자 원래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귀족은 아닙니다. 없는 사람 취급해도 되고 그냥 하대해도 괜찮습니다. 아마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까요.”

“몇 살 때 만났어요, 두 사람?”

“음……. 꽤 어릴 때이긴 했습니다. 철들기 전부터 한 몸처럼 붙어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대체로 저놈이 나를 졸졸 쫓아다니긴 했지요.”

“나이는 같아요?”

“저놈 본인도 제 나이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또래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모른다니. 보통 그럼 가족에게 버려졌다는 뜻 아닌가? 그래서 저렇게까지 충성을 맹세하는 걸지도 모르겠고.

더 물어보면 에쉬가 불쾌해할 것 같아서 관뒀다. 잠이 완전히 깨버려서 정신이 좀 말똥하긴 한데,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약간 나른하긴 했다. 그래서 눈을 감고 그의 체온을 느꼈다. 그러다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허억, 헉! 윽!]

스윽, 슥, 사악-

무언가가 내 팔다리를 바닥에 고정해놓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닥을 타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주변과 땅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그것’이 서서히 내 발을 잠식하듯 스멀스멀 타고 올라온다.

‘이상해. 기분 나빠! 싫어!’

마치 집어삼켜지는 것 같았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그 까만 그림자의 느낌도 끈적하고 살아 움직이는 듯 어루만지는 그 감촉까지 살벌하고 불쾌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살려줘! 제발! 아무도 없어?! 도와줘!’

두려움에 눈물까지 왈칵 쏟아져 시야가 흐릿하게 변해버렸을 때.

[내 손 잡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눈앞에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빛줄기를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손을 꽉 맞잡아 당겼고,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셔서 질끈 감았다.

“슈아. 괜찮습니까?”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에쉬의 목소리에 순간 안도감이 밀려와 긴장으로 굳어진 몸이 축 늘어졌다. 등 뒤에 딱딱한 바닥이 느껴진다.

‘악몽이었나 보네.’

이런 기분 나쁜 꿈, 그것도 이렇게까지 생생한 악몽은 처음 꿔본다. 너무 무리해서 그런가? 이렇게까지 정신력이 나약한 편은 아니었는데.

“주군 말대로 악몽 맞습니다. 검은 그림자에 서서히 먹혀들어 가는 그것, 주군과 똑같은 꿈 아닙니까?”

아직 꿈의 여파가 가시질 않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옆에서 카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 방금 꿈속에서 들려왔던 그 남자 목소리였다.

‘내가 꾼 꿈을 알아? 어떻게?’

촉촉하게 젖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시야를 밝히자, 바로 코앞에 검붉은 눈동자를 가진 카시안의 무표정한 얼굴이 드리워져서 깜짝 놀랐다. 사람 모양을 한 인형처럼 너무 표정이 없어서 재차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그 뒤에 한껏 걱정을 담은 얼굴로 초조함을 담아 나를 보던 에쉬가 카시안을 옆으로 확 밀치고 내 손을 꼭 잡는다.

“미안해요, 슈아. 미안합니다. 원래 내가 꾸던 꿈인데 그게 당신에게 옮겨가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꿈이, 옮겨가요?”

“검은 그림자에게 먹히는 꿈은 제가 자주 꾸던 꿈인데, 주변에 위험인물이 나타나면 그런 식으로 내게 알려주거든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설명이지만 믿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위험인물이 나타날 때 악몽을 꾼다면, 설마 카시안이 위험인물이라는 걸까?

내가 떨리는 눈으로 카시안을 힐끔 쳐다보자, 에쉬는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저놈은 아닙니다.”

“……확실해요?”

“재수 없는 미친개인 건 확실하지만 계약 때문이라도 우리에게 쉽게 손대지 못합니다. 우릴 해치느니 제 손목을 자를 놈이라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에쉬도 무섭지만. 이 모든 게 그동안 그의 삶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보다 그 악몽, 카시안의 목소리도 그렇고 어떻게 타인의 꿈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명확하게 아는 걸까?

나는 에쉬에게 떠밀려 발치에 앉아 나와 에쉬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카시안에게 조심히 물었다.

“꿈 내용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 목소리, 손도 당신이에요?”

“몇 가지 쓸데없는 재주 중 하나라서. 그 악몽에 시달리는 건 주군의 오래된 버릇이랄까, 무튼 그렇습니다.”

왜 에쉬가 카시안과 투닥거리고 귀찮아하면서도 믿고 의지하는지 대충은 알겠다. 이런 악몽에서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기만 해도 얼마나 든든한지 이번에 깨달았기 때문에.

벌써 날이 밝긴 했는지 창문 너머의 하늘에서 새초롬한 푸른빛이 돈다. 해가 밝아온다는 건 도사리는 위험이 다시 음지 속으로 숨어버리는 시간이라는 거다.

“그럼 그 꿈, 누군가 우리를 해치러 나타난다는 암시일까요?”

“글쎄요. 내가 꾸던 꿈이긴 한데 당신이 꿨으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불길한 징조이긴 합니다.”

“혹시 좋은 꿈도 있어요? 악몽 말고 좋은 꿈을 꾸면 좋은 일이 생긴다던지?”

“아쉽게도 그런 적은 없습니다.”

꿈이라지만 정말 너무한다. 적어도 희망은 가지게끔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괜히 속으로만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는데, 또 지난번의 고되던 근육통이 떠오를 만큼 전신이 욱신거려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제 무리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겨우 이 정도에 몸이 이렇게나 아프다니.

“정 힘들면 오늘 여기에서 하루 더 쉬다 갈까요?”

“아니에요. 브링도 걱정되고. 다음 마을로 일단 가요. 가서 쉬면 될 거예요.”

악몽을 꾸지 않았더라면 하루 더 쉬면서 마을이나 조용히 둘러봤을 거다. 하지만 무언가 위협적인 것이 내 주위에 나타났다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꾹 참고 출발 준비를 서둘러 원래 목적지인 두 번째 마을을 향해 달렸다. 일찍 출발한 덕분에 이른 시간에 마을에 도착했고, 우리가 머물 숙소에 먼저 올라가 그대로 침대에 엎어지고 말았다.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에쉬와 사랑을 나누는 것보다 더 보람도 없고 고되다. 승마도 이렇게까지 오래 달려본 적은 처음이라, 정말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뼈마디가 다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몸이 들썩거리는 것 같고 엉덩이와 허벅지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다르게 에쉬나 카시안은 아주 멀쩡해서 더 민망했다.

“일단 쉬고 있어요, 슈아. 피곤할 테니 잠깐 눈을 붙이고 있어도 됩니다. 도착하면 깨워드리겠습니다.”

“그럴게요. 나만 쉬어서 미안해요, 에쉬.”

“내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일단 당신 몸을 추스르는 것부터 신경 쓰세요.”

널브러진 내 뺨에 입을 맞춘 에쉬가 부드러운 미소를 흘린다. 정말 몸이 너무 고되어서 아주 빠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에쉬가 나를 깨워서 눈을 떴을 때에는 벌써 새까만 밤이 찾아온 이후였다.

“브링은요?”

“마차가 이제 마을 출입구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아마 곧 도착할 거예요.”

확실히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무슨 일이 생겼던 건 아닌지.

초조한 마음으로 숙소를 내려와 입구에서 오매불망 기다렸다. 곧 저 멀리 대로를 따라 접근하는 익숙한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브링!”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에브린이 나를 향해 팔을 휘저었고, 에브린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바로 내 앞에서 멈춘 마차 문이 열리고 에브린이 내리자마자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내가 너무 늦었지? 걱정할 것 같아서 쉬지 않고 달려온 거야.”

“왜 이렇게 늦었어? 원래 해지기 전에는 도착할 텐데.”

“출발하기 전에 마차 바퀴 한쪽이 망가져서, 수리하고 오느라 늦었어.”

“……마차, 바퀴가?”

“누가 일부러 망가트린 것 같다고 하더라고. 지지대도 반쯤 썰어놓고 바퀴 고정 틀도 조금 금이 가 있더라. 아마 그거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타고 왔으면 중간에 큰일 날 뻔했지 뭐야?”

왠지 소름이 돋는다. 마치 그 악몽이 정말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누군가 우리 중 하나를 노리고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니까.

“그렇구나. 고생했어, 브링. 식사는 아직이지?”

“응. 진짜 엄청 배고파. 다들 힘들 거야. 점심 식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거든.”

“그래, 그럼 일단 식사부터 하자. 짐은 나중에 풀고.”

나도 점심을 건너뛰어서 허기진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의 옆에 레스토랑이 있어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저 근사한 분은 누구?”

내 뒤를 따르는 에쉬 뒤로 아주 자연스럽게 카시안이 따라붙었고, 낯선 사람의 등장에 에브린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서 나는 목을 가다듬고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에쉬의 호위기사래. 에쉬가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서 자기가 직접 찾아왔다더라.”

“호위기사? 제국의 기사가 그렇게 막 타국으로 건너와도 문제없는 거야?”

그 말을 들었는지 카시안이 직접 해명한다.

“제국에 소속되어있지 않아서 상관없습니다만. 저는 지극히 한 개인의 호위를 맡고 있어서.”

“……그래도 제국 사람이잖아요.”

“글쎄요. 내가 제국 사람이던가. 딱히 어느 나라에도 몸담고 있진 않아서. 자란 곳은 제국이 맞긴 하지만. 나의 주군이 계신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만 압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그럼 비밀 호위라도 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기엔 지금 너무 대놓고 당당하게 다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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