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37)화 (38/113)

37화

나는 그의 뒤에 멀찍이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혹시 에쉬와 또 다른 형제일까 싶었는데 조금도 닮은 구석은 없었다. 밝은 달빛이 드리워져 살짝 드러난 얼굴이 꽤 남자답게 생겼다.

다부지게 각진 턱과 사나운 눈매 안에 담긴 검붉은 눈동자. 그냥 검은색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 붉은 기운을 띠고 있어 신비로웠다.

어두운 군청색 머리카락을 짧게 쳐서 그 남성상을 더욱 부각시켰다. 에쉬와 비슷한 나이 같기도 하고. 저 덩치와 저 굵은 팔에 한 대 맞으면 그대로 지옥을 맛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힘에서는 에쉬가 밀릴 수도 있겠는데?’

수많은 왕궁 기사들도 봤지만 저만큼 체격이 좋은 남자를 본 기억이 없다. 그것도 그거지만 딱딱한 표정이 무서워서 가까이 접근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런 남자가 분명 우리의 대화를 들었음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옅은 미소를 그리며 흥미롭게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 뿐.

“저 남자는 부정하지 않는데요?”

“사악한 뱀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놈이라 속으면 안 됩니다.”

“그럼 저 남자 말이, 다 거짓이라는 거예요?”

피보다 진한 관계.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어진 특별한 사이라는 남자의 말을 딱 꼬집어서 변명해보라는 식으로 흘겨보자 에쉬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일단 내가 생각하던 그런 육체적인 관계는 아님을 단호하게 부정하였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저 남자와 에쉬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에쉬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낯선 남자를 향해 말을 걸어보았다.

“그쪽은 에쉬를 찾아온 거죠? 우리를 해칠 생각인가요?”

“반대입니다. 나는 나의 주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적은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나요?”

“글쎄요. 만약 나의 주군을 위협한다면, 그 상대가 그쪽이라면 그대의 목숨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카시안.”

순간 에쉬의 서늘한 목소리에 체온이 확 떨어지면서 심장이 떨렸다. 목소리만큼이나 매섭게 변한 눈빛이 남자를 향해있었고, 나는 그때 살기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깨달았다. 몸이 절로 떨릴 정도로 차가운 감각에 소름이 일어났으니까.

그 무시무시한 눈빛에도 남자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부연 설명을 할 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주군을 지키는 것이 내가 살아있는 이유니까.”

……그저 충성스러운 기사일 뿐인지. 그냥 봐서는 모르겠다. 저 둘의 관계.

나는 조심스럽게 에쉬의 옷깃을 잡아당겼고, 두통이 인다는 듯 미간을 좁힌 에쉬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호위 기사로서 함께 자라온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그리고 저놈이 가진 검, 제 것과 같은 쌍둥이 검이거든요.”

그 말을 증명하듯 남자는 한쪽 망토를 펼치며 내게 허리춤에 찬 검을 보여주었다. 그건 에쉬가 가지고 있는 황금색의 화려한 검과 정말 똑같은 모양을 담고 있었다.

“에쉬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놈을 데리고 온 것도 아버지이십니다. 내게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저놈에게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이 검을 하사하셨지요.”

“저분 이름이 카시안?”

“……그렇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그 의미심장한 관계는, 어떤 의미인가요?”

아까 분노했던 일이 떠올랐는지 다시금 치미는 화를 애써 다스리는 에쉬가 호흡을 고르며 침착하게 대답해주었다.

“계약이 있었습니다.”

“계약?”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 검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걸 저놈과 나누기 위해 피의 맹세를 치렀을 뿐입니다.”

“서로의 피와 살을 나눠 가졌다는 뜻인가요?”

“비슷합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쨌든 카시안은 에쉬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 카시안은 가문을 등지고 떠난 에쉬를 기다렸다가, 돌아오지 않는 그를 직접 찾아와서라도 계약을 이행하겠다는 뜻을 가진 것일 터.

‘대단한 충성심이네. 에쉬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도 큰 도움이 되겠고.’

아군이 생긴다는 건 좋은 거다. 비록 카시안 저 남자가 에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상대인지는 겪어봐야겠지만.

“그렇다면 안심이에요. 에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상대라면 환영이에요.”

“저놈,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상대할 가치도 없는 녀석이니 뭐라고 지껄이든 무시하고 틈을 보이면 안 됩니다.”

“왜요?”

“파빌리엔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미친개로 유명한 놈이라. 훈련이 잘 된 개는 주인을 물지 않지만 저놈은 진짜 개가 아니라서 당신을 물 수도 있어요.”

저런 이야기를 당사자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그보다 본인 욕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할뿐더러 인정받아서 뿌듯하다는 미소를 보이는 카시안이 더 무서웠다.

“그랬던 적, 있어요?”

“워낙 많아서. 셀 수가 없군요.”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며 카시안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적이 아닌 걸 확인했으니까, 이제 어떡해요? 다시 돌아가자니 온 만큼 가야 할 것 같은데.”

“힘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을 타고 그 거리를 가는 건 무리일 것 같고…….”

“이 근처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주군.”

자연스럽게 우리 대화에 끼어든 카시안이 휘파람을 불었고, 숲 안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그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여행 손님들을 위한 숙소는 없지만 적어도 바람을 피할 빈집은 있을 겁니다.”

곧 숲길 사이를 가르고 나타난 백마를 자연스럽게 올라탄 카시안이 고삐를 이용해 방향을 잡았다. 나는 에쉬를 향해 어떻게 할 거냐는 눈빛을 보냈고, 에쉬는 별수 없다는 듯 나를 말에 다시 태웠다.

“귀한 나의 부인을 밖에서 재울 수는 없으니. 일단 그 마을로 가봐야겠습니다.”

“언제는 뭐 미친개라면서, 에쉬는 저 남자 말을 믿나 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 만큼은 징그러울 정도로 충성스러운 놈이라서요.”

에쉬가 일방적으로 불편해하는 사이인가 보다. 설마 카시안 혼자만의 짝사랑 중인 걸까?

그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생각을 에쉬가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거다. 그를 짝사랑하는 사람이 주변에 너무 많아서 문제다. 왠지 제국에 내가 모르는 과거의 연인들도 있을 것 같고.

그래 봐야 결국 내 남자가 되긴 했지만.

카시안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한참 걷다가 저 멀리에서 불빛이 모여든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에쉬. 정말 마을인가 봐요. 작기는 하네요.”

“낯선 사람들이 보이면 저들이 불안해할 수 있으니 근처 빈집을 물색해봐야겠습니다.”

그렇게 마을의 가장자리에 비어있는 허름한 건물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쌓여있는 먼지와 수두룩한 거미줄이 증명하고 있었다.

“누추한 곳이지만 그래도 밖보다 여기가 안전할 겁니다. 야생짐승의 위협도 없고.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되고.”

에쉬는 여전히 내가 이런 곳에서 하루를 묵어야 한다는 사실에 안절부절못했다.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는 행동이 어색하기 그지없어서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어디서 자든 상관없어요. 안전한 곳이라면.”

당신이 옆에만 있어 주면 내겐 그곳이 천국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주변을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온 카시안이 코웃음을 치며 내 말에 반박한다.

“세상에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특히나 암살에 특화된 실력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서 나의 주군께서는 더욱 안전한 곳을 찾기는 어렵겠지요.”

가까이 다가온 카시안을 똑바로 마주하니 정말 거대하다. 숲에서 곰을 만나면 이런 느낌일지.

“……에쉬를 노리는 암살자가 아직도 있나요?”

“주군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존재할 겁니다. 워낙 거물이신지라 확실히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미래는 없거든요.”

“카시안, 너는 그만 나가서 바깥 동태나 살펴.”

“파빌리엔 님은 쫓겨났다던데. 저는 받아주시는 겁니까?”

두 눈을 선명하게 반짝거리는 카시안이 잔뜩 기대를 담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에쉬의 대답은 그와 대조될 정도로 싸늘했다.

“꺼져.”

“예. 그럼 꺼지겠습니다.”

그럼에도 카시안은 기분이 좋다는 듯 웃으며 정중히 묵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걸 보고 나니 정말 저 남자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긴 하다. 저걸 애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더 소름이 끼쳤다.

‘진짜 충성스러운 개 같기도 하고. 아니, 야생 곰 정도 되려나?’

사람을 동물 취급하는 건 좀 미안하지만, 세상에 여러 종류의 성격이 있다고 하니.

그 뒤에도 에쉬는 카시안에게 조금의 미안함도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하고 뻑뻑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리고 가지고 왔던 저녁 식사를 함께 간단하게 섭취했다.

“우리끼리 먹어도 괜찮을까요?”

“저놈은 알아서 먹을 겁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키우는 개도 주인이 식사를 챙겨주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데. 사람이라 괜찮은 건가? 둘 사이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식사를 마친 뒤, 잠시 창밖을 내다보며 주변을 살폈다. 새까매서 하나도 보이는 건 없었다. 정말 아까 그 숲속에서 야영을 했다면 좀 많이 무서웠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 사이에 에쉬는 구석에 놓인 오래된 나무침대를 짚으로 가볍게 쓸어 먼지를 제거해서는 그 위에 자신의 로브를 펼쳤다.

“이쪽으로 와서 누우세요, 슈아.”

굉장히 평온하게 웃는 그가 집사처럼 침대 옆에 서서 정중하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인데 오늘 유독 낯설어 보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에게 조심히 다가가서는 로브를 벗고 나무침대 가장자리에 조심히 앉아보았다. 생각보다 튼튼해서 두 사람이 누워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뭔가, 일들이 많긴 했는데 막상 지금 생각하니 따로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이에요. 평소하고 달라서일까?”

“함께 백작령을 떠난 건 처음이라서 그럴지도요. 항상 머물던 마을이 아니기도 하고. 잠자리가 불편할까 봐 걱정이군요.”

자연스럽게 나를 침대에 눕혀주는 그가 벗어놓은 내 로브를 이불처럼 덮어주어 정리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가장자리에 앉아 내 손을 꼭 쥐어주었다.

“아침에 일찍 출발해야 하니 어서 자요.”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