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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36)화 (37/113)

36화

“……왜 그런 이야기를 미리 하지 않았어요?!”

아는 사람 중에 에쉬와 같은 말을 했던 영애가 있었다. 어렸을 때 마차를 타고 가다가 전복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 뒤로 마차만 타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포가 밀려오곤 한다고.

간접적으로나마 그런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제법 가까이에서 겪어봐서 그게 얼마나 심적으로 힘든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의미로 화가 났다. 그걸 알았으면 마차보다는 마부석을 타거나 말을 따로 몰아서 오게끔 했을 텐데.

“지금도 그래요? 어지럽거나 구역질이 난다거나…… 어, 또…… 식은땀이 난다거나?”

“말했듯 당신이 옆에 있어서 괜찮습니다. 아까는, 좋지 못한 생각을 하는 바람에 평정을 잠시 잃었던 것뿐입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제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 있습니까? 정 좋지 않다 싶으면 꼭 미리 말하겠습니다.”

그게 의지만으로 좋아질 수 있는 거였나. 불안하긴 하지만 괜찮다는 사람을 더 몰아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좋아요. 정말 못 견디겠으면 꼭 말해야 해요? 진짜, 약속.”

그와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몇 번이나 당부를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마차가 출발하고 몇 시간을 더 달린 뒤에,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점심 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다시 달렸다. 중간에 거쳐 가는 마을에 당도할 때까지 그를 유심히 살폈는데 다행히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여서 안심했다.

물론 하룻밤 묵을 숙소 입구에서 그가 안도했는지 잠깐 휘청거리긴 했지만.

“에쉬, 저녁…….”

우리를 뒤따라온 유모에게서 저녁 식사 거리를 받아 방으로 돌아왔을 때, 잠깐 쉬겠다던 에쉬가 소파에 앉은 자세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버렸다. 괜찮은 척해도 굉장히 고단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하여간, 정신력 하나는 대단하다니까.’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는 건들지 말기로 타협했다. 자세가 불편하니 오래 잠들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소파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고 살금살금 걸어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와 똑같이 소파에 몸을 기대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부디 그가 좋은 꿈을 꾸고 있기를 바라면서.

“슈아……?”

에쉬의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내 한쪽 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어서 잠시 잠들어 있던 정신이 깨어났다. 마차여행이 고단하긴 했는지 깜빡 잠이 들어버렸었나 보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꺼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겨우 눈을 반쯤 뜨고 나서야 나를 쳐다보는 에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일어났어요? 나도 그냥 잠들어버렸나 봐요. 당신 일어날 때까지만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장소를 옮겨야겠습니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왜요?”

영문도 모르고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나 비몽사몽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지금 내 방에 에쉬 말고도 에브린이 들어와 있다는 것도 뒤늦게 발견했다.

“브링? 너는 왜 여기……?”

“쉿.”

입가에 검지를 세우는 에브린의 행동에 나는 다시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는 건 알겠다. 곧 에브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에쉬에게 묻는다.

“결정했나요?”

“……괜히 여러 사람이 휘말려 드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요. 슈아와 함께 말을 타고 여길 조용히 빠져나가겠습니다.”

“그럼 유모에게 말 한 필을 구해오라고 할게요. 저들은 아마 마차에 따라붙을 테니 이쪽은 내가 맡겠어요.”

“혼자 괜찮겠습니까?”

“이래 봬도 내 몸 하나는 지킬 실력은 가지고 있답니다. 세상이 워낙 험하니 그 정도는 기본이니까요.”

누군가 우리를 미행하고 있다는 건가. 그래서 에쉬가 장소를 옮긴다는 말을 했던 거고?

“알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수도까지 도달하시기 바랍니다.”

“슈아를 잘 부탁할게요. 슈아도 어느 정도 호신술은 사용할 줄 아니까 단도 꼭 챙겨주시고요. 그럼 잠깐 기다리세요. 말을 준비하고 다시 올게요.”

에브린이 방을 나간 뒤에 에쉬는 테이블에 있는 식어버린 저녁 식사를 확인하고 꽁꽁 포장을 했다. 나는 그저 두 눈만 끔뻑거리며 에쉬가 상황을 설명해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아까 처음 휴식을 취했던 곳에서 계곡을 둘러보던 브레이튼 영애가 숲에 숨어있던 누군가를 보았다고 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아까 이 마을에서 그 사람이 이 숙소 근처를 배회하는 걸 발견했다더군요.”

“위협적인 상대인가요?”

“살기는 없지만 만일을 위해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는 겁니다. 누구를 미행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간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어야겠네요.”

우리를 위협하려는 사람이라면 에쉬가 바로 알아차렸을 거다. 그저 감시일 뿐이라면, 과연 누가 보낸 이일까? 언제부터? 이럴 줄 알았으면 본가 기사들을 대동했을 텐데.

에쉬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고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썼다. 늘 가지고 다니는 단도를 허리춤에 차고 비상자금과 먹지 못한 저녁거리, 그리고 귀족임을 증명하는 패까지 잘 꾸려 담았다.

곧 에브린이 다시 방문했고, 에브린의 지시 하에 나와 에쉬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건물의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일단 이쪽 길로 가면 숲으로 진입할 수 있대요. 이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그 숲을 이용하고 이후부터는 빠르게 수도까지 달리도록 해요.”

에브린이 구해온 말 위에 먼저 오르고, 뒤이어 에쉬가 내 뒤에 올라탄다. 나는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에브린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조심해, 브링. 수도에서 만나.”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

에쉬도 에브린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한 뒤, 로브를 뒤집어쓰고 천천히 말을 몰아 에브린이 가르쳐준 길로 향했다. 혹시 누가 우리를 또 따라오지 않을까 주변을 경계하면서.

다행히 안전하게 숲을 빙 둘러 마을을 벗어난 이후부터는 에쉬가 말을 빠르게 몰았다. 나도 상체를 낮추고 말갈기를 꽉 쥔 채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꽤 멀어진 것 같은데. 다음 마을은 보이지도 않는군요. 이러다가 날이 샐지도 모르겠는데.”

“다음 마을에는 아마 저녁에 도착할 거예요. 계속 산이고 숲길이라서.”

“……그렇습니까? 그럼 근처에서 잠시 쉬어갈 곳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사실 나도 지금 다리하고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어제 그와 숲속에서의 정사로 인한 통증이 남아있기도 했고, 오늘 종일 마차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연달아 말을 타는 건 솔직히 무리였다. 차마 에쉬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숲 안쪽의 조금 넓은 공터를 찾아 말에서 내리자마자 욱신거리는 허리와 다리 때문에 신음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생리적인 현상이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많이 힘듭니까?”

“뭐, 나만 힘든 것도 아니고. 당신도 고단할 텐데요.”

“나야 여기 이렇게 기운을 충전시켜주는 상대가 있으니 고단하지 않…….”

어두운 숲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그의 얼굴에서 예쁜 미소가 지어지다가, 갑자기 움찔거리며 굳어버렸다.

“에쉬?”

“에쉬포드 님.”

그리고 그의 뒤쪽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 누군가의 목소리에 에쉬의 얼굴이 잔뜩 구겨지더니 굉장히 짜증 난다는 듯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에쉬포드 님이라면, 에쉬를 말하는 것?’

에쉬의 이름이 따로 있었던 건가. 왜 나한테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그럼 에쉬라는 이름은 애칭?

지난번 레이니드도 내 손바닥을 통해 말을 전할 때, 그를 에쉬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의 이름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약간 서운해졌다. 이름조차 내게 숨기다니.

하지만 지금은 서운해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닥친 현실에 집중했다.

에쉬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사람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거구의 남자였다. 덩치 때문인지는 몰라도 키도 에쉬보다 큰 것 같았다. 저 근육질의 체구는 그야말로 대단한 수련으로 다져진 기사나 용병의 몸이 확실하다. 저런 덩치를 가지고도 저렇게 소리 없이 나타날 수 있다니.

혹시 에쉬를 해치려고 온 사람인가 싶다가도 두 사람의 분위기를 봤을 때에는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기척을 느끼자마자 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에쉬는 검을 빼 들지 않았고, 그 상태로 고개만 돌려 뒤를 노려본다.

“너였나? 출발할 때부터 따라붙었다던 수상한 자가?”

“나의 주군께서 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으시다길래 직접 모시러왔습니다.”

“결정은 번복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돌아가.”

“뭔가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저희가 그렇게 쉽게 끊어질 인연이던가요? 적어도 저는 우리 사이가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꽤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만.”

남자의 목소리에서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가 흘러나온다. 워낙 저음에다가 살짝 웃음기를 담고 있어서 둘 사이를 의심하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헤어진 연인의 대화로 착각할 정도니까.

아무리 봐도 저쪽은 남잔데. 대체 둘만의 특별한 인연이 뭘까? 설마 아니겠지. 제국의 황제도 이성애자라던데, 그 황제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니 그에 영향을 받은 건……?

혼자만의 상상 속을 배회하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는 남자의 이어진 말이 불쏘시개가 되어 거대한 오해의 화염이 되고 만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까? 나의 주군께서는 그 피보다 진한 관계를 쉽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나는 바로 고개를 휙 돌려 에쉬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에쉬, 저거 무슨 뜻이에요? 혹시 둘이 연인 사이였다거나……?”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이는 절대 아닙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이념을 가진 이성애자라는 거, 슈아 당신이 제일 잘 알잖습니까?”

그가 이만큼 당황하면서 강력하게 부정을 피력하는 건 처음 본다. 항상 문제해결을 위해 생각을 정리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침착하게 설명을 하곤 했는데.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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