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나는 생긋 웃으며 잡고 있는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물론이에요. 나는 항상 당신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재능이 넘치는 대단한 인재라고 생각하고 있는걸요?”
고위 귀족의 후계자였던 그가 남들과 다른 평범치 못한 배움을 받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황실과 인연이 깊은 가문이라고 했으니 그가 정식으로 후계 자리에 앉았다면 솔직히 내가 우러러도 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생각을 하면 괜히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다. 분명 내 남잔데,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 사람인데 멀게만 느껴져서 불안한 마음이 생기니까.
‘결혼하고 서약서를 쓰면 이 불안함이 누그러지겠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빨리 약혼부터 해야겠어.’
애써 좋지 않은 생각들을 날려버리고 그와 오붓하게 단둘만의 목욕을 즐겼다.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함께 들어가 그의 넓고 따뜻한 품에 안겨 나른하게 퍼져버렸다.
“잠들면 안 됩니다, 슈아. 저녁 식사는 해야지요.”
“안 자요. 안 자는데…… 당신 품이 너무 포근해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다리 괜찮아요? 아까 꽤 아파 보였는데.”
“지난번에 당신이 근육통에 시달렸을 때의 기분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익숙해서. 검술 수련에 비하면 아픈 것도 아니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로 노닥거리며 목욕을 마쳤다. 그리고 간단한 식사를 한 뒤에 여유로운 티타임을 함께 즐겼다.
그러다가 급격히 몰아치는 피로를 느끼면서 잠깐 졸았는데, 눈을 떴을 때에는 침대 위였고 나를 껴안고 잠든 에쉬의 잔잔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또 처음이네.’
매번 내가 잠들 때까지 깨어있었고,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 기상하여 단장까지 마친 상태로 나를 깨우러 왔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보지 못한 귀한 장면이지만, 그가 처음 다쳐서 우리 저택에 왔을 때에는 수없이 보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평온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딘지 불안하고 자다가도 고통스러운 듯 끙끙 앓던 적이 더 많았으니까.
“에쉬.”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냥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
그런데 마치 듣기라도 한 듯 파르르 떨린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간다. 그 사이로 드러난 연갈색 눈동자가 잃었던 초점을 맞추면서 나와 시선을 딱 마주쳤다.
“……나 불렀습니까?”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란히 누워있어서 조금 놀랐는지 동공이 파르르 떨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가 차츰 가라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그래요, 에쉬?”
“아, 아닙니다. 좀 놀라서…….”
“꿈꿨어요?”
“……악몽이 잠깐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흠,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깼습니까?”
다시 내 옆에 털썩 누워 나를 꽉 끌어안는 그의 체온이 순식간에 차가워져 있었다. 분명 잠들어 있을 때는 갓 구워낸 빵처럼 따끈따끈했는데.
“그냥 눈이 떠졌어요. 그런데 정말 작게 이름 부른 건데, 그게 들렸나요?”
“원래 예민한 편입니다. 요즘 좀 편해졌다고 당신이 깬 것도 몰랐다는 건 좀 충격이군요. 밤손님이 찾아와 자는 사이에 칼을 꽂으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가 꽤 오래 도망자 신세로 지냈다는 것을 안다.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서 여태까지 살아남았던 건, 잠조차 깊이 들지 못하고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다는 거겠지.
“우리 백작저는 안전해요. 이제 당신을 찾아올 밤손님은 없을 거예요. 정 불안하면 앞으로 기사들을 더 배치시킬까요?”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도 하나는 깨달아서 기분이 좋군요.”
“뭘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다시 이불을 정리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를 보는 당신에게서 살기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아주 기쁩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라 굉장히 감격스럽기도 하고.”
지금껏 그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오늘 조금이나마 느낀 것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누군가의 위협으로부터 피해 웅크리고 숨은 어린 시절의 그가 얼마나 외로움에 몸을 떨었을지.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서 품에 꼭 안아주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내가 꼭 지켜낼 거예요. 당신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만들어줄 거니까, 날 믿어요.”
그가 조금이라도 나를 통해 안정을 취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권력이 필요하다면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는 대단한 권력을 손에 넣어 그를 보호할 것이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정말 많이 피곤했는지, 아니면 정말 나를 믿고 안심해서인지 금방 잠이 들어버린 그를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잘 자요, 내 사랑. 부디 기분 좋은 꿈만 꾸길.’
잠든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 나도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이 되어 유모가 우리를 깨웠고, 수도로 출발하기 위한 단장을 서둘러 마친 뒤에 에브린과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을 벗어났다.
아침 식사를 할 때부터 시작해 나와 나란히 앉은 에쉬를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에브린이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낀다. 그러더니 무언가 장난칠 거리가 하나 생겼다는 듯 삐딱하게 웃었다.
“혹시 슈아한테 들었어요?”
“……어떤 것을?”
“슈아가 저더러 그쪽 남동생이랑 정략혼을 맺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봤는데, 그쪽 생각은 어때요?”
나도 에쉬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나한테 정말 저런 소리를 했냐고 눈빛으로 묻길래 긍정의 의미를 담아 어깨를 으쓱거려주었다.
“브링이 파빌리엔에게 무척이나 큰 관심을 보이길래요. 기왕이면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봤던 것뿐이에요.”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군요. 그 녀석은 형제인 내가 봤을 때도 그다지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될 만한 그릇이 아닌지라.”
둘이 워낙 사이가 좋지 않아서 에쉬 입장에선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에브린도 알 테니 에쉬 입에서 좋은 소리를 듣고자 물어본 건 아닐 테고.
잠깐 생각에 잠긴 에브린이 다시금 진지한 눈빛으로 에쉬에게 물었다.
“제가 그쪽 남동생의 옆자리에 나란히 설 만한 여자가 되질 못해서는 아니고요?”
우스갯소리로 에쉬의 반응을 살피려고 묻는 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그건 절대 장난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에쉬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서늘한 눈빛으로 에브린을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 잘 안다. 파빌리엔에게 보이던 그 눈빛과도 닮아있었으니까.
에브린도 그 눈빛이 무섭긴 한 모양인지 조금 긴장한 듯 눈꺼풀을 파닥거리면서 손에 든 부채를 펼쳐 대충 휘젓는다.
“별 의미 없어요. 그냥 왠지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요.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거든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음, 그쪽이 아는 만큼?”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는 에브린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리고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저 입은 무거워요. 아주 많이. 누구처럼 와인에 취해서 나불나불 떠들어대는 그런 사람 아니니까 안심하시고요. 제 물음에나 대답해보시죠?”
지난번 파빌리엔과 와인을 마시면서 들었던 그 이야기들, 내게 말한 것 말고도 더 많은 비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에쉬의 가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겠지. 만약 나쁜 쪽이었다면 어떻게든 나와 에쉬를 갈라놓으려 털어놨겠지만, 그게 아니기 때문에 비밀을 지켜주고 있는 걸지도.
입을 꾹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에쉬의 목구멍에 굉장히 심한 말들이 모여 있는 느낌이다. 내 앞이라 차마 욕은 못하겠고 꾹꾹 눌러 담는 것 같은데, 대체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살짝 궁금해지기도.
꽤 한참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달리는 마차가 고르지 않은 길을 지나 덜컹거리는 소리뿐인 그 고요함을 깨트린 건, 에쉬의 깊은 한숨 소리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불편한 의미만을 담은 건 아니었습니다.”
“완강한 부정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포함은 되어있고요?”
“……나는 슈아의 소중한 친구가 그런 위험한 자리에서 목숨을 위협받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권력과 명예를 얻고 싶다면 말리지 않습니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니까요.”
다행히 서로에게 불쾌한 감정이 쌓이지 않고 잘 마무리된 것 같다. 에브린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에쉬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달리던 마차를 계곡 근처에 세웠다. 마부가 말들에게 물을 먹이는 사이, 에브린은 계곡 근처에서 구경을 좀 하겠다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에쉬?”
“네, 슈아.”
“브링이 또 당신을 심란하게 한 것,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나쁜 뜻은 아니었을 거예요. 나도 그 자리가 그렇게 위험한 자리라는 것을 잘 몰랐거든요.”
마치 자신의 약점을 공격당한 사람처럼 의기소침해 있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내가 다 속상해졌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의 감정을 건드려서 아주 조금, 에브린이 얄밉기도 하고.
나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브링이 한 말, 그렇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장난기가 다분하긴 해도 뒤끝은 없어요. 나쁘게 말하면 남의 기분을 고려해서 말하는 친구는 아니지만, 일부러 곤란하게 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마음에 둘 만큼 심적인 여유는 없어서요.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좀 끔찍한 상상을 하다 보니…….”
오롯이 나를 담은 연갈색 눈동자에 파동이 일어 잔상처럼 흐트러진다. 그러더니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밝게 웃었다.
“사실 저, 마차를 오래 타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방이 막힌 이런 좁은 공간에 오래 있으면 상당히 불안해져서요. 그나마 당신이 곁에 있어서 버티고는 있는데. 마차에 대한 좋지 못한 추억이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