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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32)화 (33/113)

32화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눈빛을 발사한다. 그와 나 사이에 비밀을 만들고 싶진 않은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고. 다시 한번 에브린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그게…….”

“얼핏 보니 무슨 도구 같은데. 슈아, 당신 얼굴이 빨갛습니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합니까?”

커다랗고 거친 손바닥이 내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서 들어 올려 시선을 다시 맞춘다. 눈치 빠른 그가 이미 테이블의 물건을 보았나 보다. 이미 숨기기엔 늦은 것 같아, 나는 체념하듯 한숨을 푹 내쉬며 주절주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에브린이 그동안 당신과 나를 떨어트려 놓아서 미안하다고 줬어요. 당신한테 보여주기가 민망해서 숨기려고 했었던 거고요.”

“그런 게 있습니까?”

“그죠? 당신도 처음 듣죠? 저도 처음 봐요. 이 해괴한 걸 대체 어떻게 쓰라는 건…… 에쉬?”

그가 내 옆을 지나쳐 테이블에 놓인 그 물건을 살핀다. 눈으로만 신기하게 살피다가 검은 책자를 펼쳐 보길래 도저히 그 장면을 못 보겠어서 고개를 돌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가도 반응이 궁금해서 살짝 실눈을 뜨고 살피긴 했지만.

“재미있는 물건이군요. 한 결혼 생활 십 년쯤 지나면 써먹을 만하겠습니다.”

책자를 비웃듯 코웃음을 치는 그가 대충 덮어 테이블 위에 던져둔다. 나는 괜히 지난밤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가 나를 슥 쳐다보더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표정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더니 선물을 다시 꽁꽁 싸매서 그것을 들고 나가버렸다.

“에쉬? 그건 내 선물인데요?”

“먼저 제가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정말 그걸 들고 나가버리는 에쉬의 뒷모습이 왠지 조금 신나 보였다. 뭔가 느낌이……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그런 느낌인데. 괜찮, 겠지?

그 다음 날 꼬박 하루 동안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그동안 찔끔찔끔 내렸던 비로는 가뭄이 해소가 되질 않았었는데, 이번 폭우는 다행히 말라붙은 강이 다시금 가득 차오를 때까지 쏟아지다가 그쳤다.

‘어머니께서 도와주셨구나.’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시원한 폭우를 바라보며 마음이 조금 뭉클해졌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내린 비로 인해 걱정했던 일들이 한순간 쓸려 내려갔으니까.

덕분에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어머니의 첫 번째 기일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신부님. 어머니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거예요.”

원래 이번 기일을 주관해주시기로 한 사제는 왕국 수도에 세워진 신전의 주교이자 어머니와 오랜 시간 친분을 다졌던 분이셨다. 굉장히 인자하신 노인인데 어머니가 부모처럼 따르곤 하셨다. 하지만 최근에 쓰러져 병상에 누워계시는 바람에 다른 사제분이 오셨는데, 그분도 신전에서 자주 뵙던 신부님이라 낯설진 않았다.

오래된 친척을 만난 기분이기도 했고.

“마옐 주교께서 이번 백작 부인의 기일에 참석하지 못해 참으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아직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신데…….”

“많이 편찮으신가요?”

“의원의 말로는 곧 신의 부름을 받아 먼 길을 떠나실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당부하시더군요.”

“……수도에 가면 가장 먼저 뵈어야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마르엘 백작께서 거의 매일 다녀가십니다. 덕분에 주교께서 그나마 기력을 회복하셨다지요.”

아버지도 꽤나 심란하시겠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 신전이었고, 두 분 다 마옐 주교와 아는 사이였다고 들었다. 국왕 전하께서도 반대하는 혼인을 마옐 주교가 설득해주셨고, 신전에서 치른 두 분의 결혼식에 입회하여 증인이 되어 주셨다던데.

사실 나도 에쉬와 결혼식은 치르지 않더라도 마옐 주교의 앞에서 약식으로나마 혼인맹세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게 가장 의미가 클 테니.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먼 길을 온 사제를 다시 배웅하고 나니 하늘에 서서히 붉은 노을이 드리워졌다. 벌써 일 년이 이렇게 지나가 버리다니. 그간 참 많은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절로 웃음이 났다. 대부분 에쉬와 관련된 장면이어서.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군요. 지난번에 왔던 비가 제법 도움이 많이 되어 영지가 아주 평화로워졌습니다.”

그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그가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서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심적인 여유인지. 몰랐는데 이번 일을 치르느라 꽤 신경을 썼는지 조금 나른해지기도 했다.

이 넓은 품속이 아늑하고 따뜻해서 일지도.

“나 아까 깜짝 놀랐잖아요. 영지민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호의적일 줄은 몰랐어요.”

“당신께 피해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을 하는 만큼의 보답이겠지요. 다들 나를 당신의 약혼자로 알고 있더군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약혼식도 치르지 않은 상태라 듣기 민망했습니다.”

“왜요? 내가 당신 버릴까 봐 겁나요?”

“왠지 사기를 치는 느낌이기도 하고.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은근히 빨리 약혼해달라고 조르는 느낌이라 귀여워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빨리 수도에 가서 확실히 결혼 승낙을 받고 약혼식부터 빠르게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폭 안겼다.

“이미 우리는 마음으로 결혼한 부부나 마찬가지예요. 같이 밤을 보내는 사이인 거 모르는 사람도 없을걸요?”

“그럼 오늘 밤에 당신 방으로 가도 됩니까?”

에브린이 손님방으로 내려간 이후부터 에쉬는 나와 함께 방을 쓰기는 했지만, 내가 잠들면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거의 막바지이긴 했어도 달거리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고, 어머니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아서 자중하겠다는 의미로.

[그냥 같이 자면 안 돼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당신이 옆에 없으면 외로울 것 같은데.]

[음……. 그럼 당신이 깨어나기 전에 방문하겠습니다. 왠지 같이 잠들면, 당신을 가만히 두지 못할 것 같아서요.]

자기가 사지 멀쩡하고 때때로 포악한 짐승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몇 번이나 상기시켜주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를 시험에 빠지게 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이제 서로 내외할 이유는 없다. 나도 그를 너무 기다렸으니까.

“굳이 밤까지 기다려야 해요? 오늘 일정은 끝나서 나 이제 한가한데.”

일부러 그를 올려다보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레이니드가 그에게 애교를 부리던 그 표정을 떠올리면서.

사실 나는 그것이 그의 안에 잠들어 있던 맹수를 가장 빠르게 깨울 수 있는 방법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밀착하고 있는 그의 하체가 크게 요동치는 게 느껴져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가 버린다.

‘저 깜찍한 머릿속은 몰라도 몸은 참 솔직한 남자야.’

다정하기만 하던 연갈색 눈동자에도 서서히 짙은 정염이 덧입혀진다. 굶주린 야생 사자처럼 매섭게 변하는 눈빛은 이제 무섭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숨겨진 본능을 일깨워주는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우리 어서 방으로 가…….”

“잠깐 외출 어떻습니까?”

“……외출이요?”

지금 이 분위기에 외출이라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정말 놀라서 어리둥절해 하자, 그가 내 어깨를 다독이듯 가볍게 툭툭 치고는 빙그레 웃었다.

“여기 잠깐 있어요. 말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러더니 나를 그대로 세워두고는 마구간 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나는 멍청하게 그가 사라진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한가하다는 의미가 외출을 하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 표정은 분명 내 말뜻을 이해하는 것 같았었다.

‘나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었던가? 그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벌건 대낮에 유혹을 해서 밤까지 시간을 보내려고 그러나 싶기도 하고. 그러기엔 굉장히 기뻐 보였는데. 정사에 밤낮이 존재하진 않다고도 했고.

답을 낼 수 없는 고민에 깊이 심취하여 서 있는 자리를 맴돌고 있자, 그가 진짜 내 말 한 필을 끌고 왔다.

“왜 한 필이에요? 당신은요?”

“먼 거리를 가는 것이 아니니 한 필이면 충분하지요. 특히 당신 말은 당장 기마병으로 뛰어도 문제없을 만큼 훈련이 아주 잘 되어있으니 우리 둘을 태우고도 거뜬할 겁니다.”

사실 그 말은 내 스무 번째 생일이자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첫째 언니인 왕비 전하께서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왕궁에서 태어나 자라서 제대로 훈련을 받은 말이니 당연한 거지만, 그에게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단번에 내 말 상태를 꿰뚫어 보아서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려는 건데요?”

“일단 타세요.”

승마복이 아닌 검은 드레스 차림이라 어떻게 말 위에 오를까 싶었는데, 그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헉?!”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붕 떠서 얼마나 놀랐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장도 없는 말 등 위에 옆으로 앉게 되었다. 그리고 에쉬도 날렵하게 뛰어 내 뒤로 올라타고 고삐를 잡아 자세를 고쳐 앉는다.

어떻게 디딤대도 없이 저렇게 쉽게 말을 잘 올라탈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해.

“그런데 안장은 왜 없어요?”

“둘이 앉으려면 불편할 것 같아서 뺐습니다. 왜요? 무섭습니까?”

“안장 없이는 말을 타본 적이 없어서…….”

똑바로 앉지 못해서 더 불안해하는 나를 그가 조금 더 당겨 안아 완전히 기대게 만들었다.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잡고 한 손으로만 고삐를 제어한다.

“똑똑하고 순한 말은 주인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움직입니다. 그리고 내가 있잖습니까? 그래도 무서우면 내게 안기세요.”

승마를 그렇게 즐기지 않는 내게 말 위쪽은 낯선 곳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겁이 났었지만, 천천히 걷기 시작하면서 그 움직임에 익숙해져 다시 안정감이 찾아오게 되었다.

나 혼자도 아니고, 그가 나를 절대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지도.

“그래서 우리 어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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