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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31)화 (32/113)

31화

또 찾아오겠다는 건지. 뜻 모를 말을 남기고 마차에 오른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곳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치고 간 느낌이네. 우리 식사부터 하자. 에쉬는 아침 식사 했어요?”

“네. 미리 먹었습니다. 두 분 어서 들어가 식사부터 하시지요. 저는 집사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럴게요. 이따 봐요.”

다행히 에쉬는 귀찮은 동생들이 제 발로 떠나주어 굉장히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굳게 닫힌 백작저의 정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에브린의 팔뚝을 툭 쳤다.

“왜 그래? 가버려서 아쉬운 거야?”

“……나 당분간 계속 너랑 같이 있어도 돼? 아, 난 손님방 쓸 테니까 둘 사이 방해하진 않을게. 응? 그래도 돼?”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부탁하는 에브린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저 집에 가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닌 것 같고.

나는 일단 식당으로 방향을 잡으며 퉁명스럽게 캐물었다.

“이유가 뭔데?”

“우리 집보다 여기 머무는 게 더 흥미로워서. 진짜 방해 안 해. 뭐 시킬 일 있으면 다 시켜. 다 할게. 응? 응?”

어차피 어머니의 기일을 함께 보낸 뒤에 수도로 가려고 했다. 왠지 에브린은 수도에서도 우리 백작저에 머물 생각인 것 같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브린이라면 상관없지.

“알았어. 그렇게 해. 대신 브레이튼 백작과 백작 부인께 꼭 허락받아.”

“내가 애야? 허락받게. 어차피 정략혼 상대 정해질 때까지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지내라고 했어.”

브레이튼 백작 부인께서 우리 백작가 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며 호언장담을 하셨다. 아마 에브린이 여기 더 오래 머문다고 해서 반대하실 분은 아니다. 오히려 에브린이 우리 가문에 피해를 끼칠까 봐 불안해하시는 것뿐.

어차피 언니들도 어머니도 없는 이곳에 에브린이 함께 있어 준다면 내게 든든한 힘이 되긴 할 거다. 그러다가 식사를 하면서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정략혼이라면 파빌리엔하고 하는 게 어때?”

“어……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두 뺨을 수줍게 물들이다가 또 한순간 어깨를 축 가라앉히며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더니 두 눈을 치뜨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 갑자기 왜 나랑 그 사람 엮어? 나더러 타국 가지 말라며.”

“너 그 사람 좋아하잖아. 파빌리엔이 어떤 사람인지는 확실하게 몰라도 에쉬의 형제니까 악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어.”

물론 나하고는 좀 불편한 관계라서 그다지 좋은 상대로 느껴지진 않지만. 의외로 에브린하고는 잘 맞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사람이 제국 사람이라면 우리 왕국하고도 가깝고. 에쉬의 형제니까 가족 핑계로 우리가 더 자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가……?”

“아예 생판 모르는 남보다야 아는 사람이 덜 부담스럽지 않아?”

내 말을 곱씹는 듯 포크로 음식을 휘적거리는 에브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영 모르겠다.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

“무튼 고민해봐. 제법 권력을 가진 가문인 것 같으니까 지금껏 널 무시했던 영애들에게 귀여운 복수쯤도 가능할 거야.”

“절대 귀엽지 않은 복수도 가능할걸? 그것들 가문을 통째로 그냥 확, 부숴버리는 것쯤 냅킨 접는 것만큼 쉬울지도.”

“……너 에쉬 가문에 대해서 잘 알아?”

“말했잖아. 고위 귀족이라고.”

아무래도 에브린은 파빌리엔이 고위 귀족이라서 부담스럽다는 눈치다. 하긴, 고위 귀족이면 지금처럼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도 없을 테니까.

선택은 본인의 몫이니 알아서 결정할 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음식을 섭취하고 대충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옮겨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어머니 첫 번째 기일을 보내면 수도로 갈 거야. 초대장이 꽤 들어왔더라고.”

“어디 참석할 건데?”

“티파티는 제외하고 일단 살롱부터 참석해보려고. 아무래도 직접 후계수업을 받는 영식들을 대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너 정말 백작위를 받을 생각인 거야?”

후계교육과는 거리가 먼 에브린이 호기심을 담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아직도 그 말을 믿기 어렵다는 듯 어색해하는 것도 눈에 보인다.

그럴 만도 하겠지. 아직 여성이 후계의 자리에 앉아 백작 부인이 아닌 백작이 되는 경우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

“응. 어머니의 흔적이 남은 이 백작저를 내 손으로 지켜내고 싶어. 아버지와 끝까지 함께 살고 싶기도 하고.”

“흐음, 부러우면서도 딱히 부럽진 않네. 오라버니가 후계 교육받는 걸 옆에서 몇 번 본 이후로 나는 절대 하지 못할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거든.”

끔찍하다는 듯 어깨를 모아 바르르 떠는 에브린이 다시 우아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투명한 와인 잔에 담긴 포도주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딱 지금이 좋아.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를 헐뜯는 영애들보다 더 작위가 높은 남편을 맞이해 내 발아래 두고 싶을 뿐이야. 그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도 팔 수 있어.”

복수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 라.

참 에브린다운 생각이다. 저게 가능하다면 정말 할 위인인지라.

“그럼 더더욱 파빌리엔이 좋은 배우자가 될 수도 있겠네. 고위 귀족이라고 했으니까.”

내 말에 에브린은 대답 없이 그저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긍정인지 부정이지 모를 애매한 태도라서 나 역시 입을 다물고 식사에 집중하였다.

식사를 마친 이후, 에브린은 다시 손님방으로 짐을 옮겼고 아주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잘 포장한 선물꾸러미를 건네준다.

“이게 뭐야?”

“애틋한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놔서 미안했다는 작은 선물이지. 풀어볼래?”

에브린이 이런 식으로 내게 선물을 건넨 적이 꽤 있어서 나는 아무 의심도 없이 하얀 포장지를 조심히 벗겨냈다.

“…….”

“어때? 마음에 들어?”

그 포장지 속에 감춰져 있던 물건을 보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다시 토마토보다 더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건 지금까지 생전 보지도 못했던 종류의 요상한 물건들이었다.

“이, 이게 선물이라니?”

“만날 똑같은 밤을 보내다 보면 지루해진대. 좀 더 색다른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굉장히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해주는데 나는 조금도 여유롭지 못했다. 대체 이게 다 무엇인지.

그 꾸러미 안에는 말하지 못할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그것들의 용도를 친절하게 적어놓은 손바닥만 한 작은 책자에 더 혼란이 가중되었다. 아무 글도 쓰여 있지 않은 까만색 표지부터 수상하다 여겼는데, 식은땀이 절로 흐른다. 

당연히 나는 그걸 절반도 보지 못하고 재빨리 덮고는, 에브린을 향해 얼굴을 잔뜩 구기며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이번 장난은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 안 해?”

“장난이라니? 그거 엄연히 시중에 파는 물건들이야. 아주 안전한 거라고.”

“뭐, 뭐라고?”

“그게 초급자 중에서도 가장 초심자용이라고 했어. 그 책자 안에 사용 방법이 다 쓰여 있고. 설마 내가 장난을 쳐도 그런 걸 가지고 장난치겠어? 하여간 순진해서는.”

그것도 모르냐며 픽 웃는 에브린이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아주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거 너의 그이 보여주고 같이 연구해봐. 아마 꽤 좋아할걸? 남녀공용이라고 했으니까 잘 배워서 같이 써먹으면 적어도 몇 년은 더 재미 볼 수 있을 거야.”

눈앞이 아득해졌다. 상상하니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었다.

“하, 부럽다. 나도 같이 연구해줄 배우자를 빨리 물색해봐야겠네. 일단 이거 다 써보고 나한테도 어땠는지 후일담도 살짝 해주기다? 알았지?”

황당해하는 나와 다르게 에브린은 그저 흐뭇해했다. 덕분에 그 선물에 관한 모든 부담은 오로지 나의 몫이 되어버렸다.

‘……버릴까?’

혼자 신난 에브린이 휴식을 좀 취하겠다고 나간 뒤, 그 선물꾸러미에 차마 손도 대지 못하겠어서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에브린이 써봤냐며 물어볼 텐데. 그렇다고 에브린한테 지금까지 에쉬와도 딱 두 번밖에 잠자리를 가지지 못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어!

“일단 숨겨놔야…….”

“뭔데 숨깁니까?”

“으헉?!”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심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에쉬의 목소리가 들려와 정말 너무 깜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앞이 한번 빙글 돌면서 심장이 크게 벌렁거리고 숨이 찰 정도.

잽싸게 고개를 돌리니 나만큼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에쉬가 얼음이 되어 서 있었다. 아마 내가 이상한 비명을 질러서 놀란 것 같았다.

“아…… 와, 왔어요? 언제 왔어요?”

“방금. 당신이 방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건데, 저 때문에 놀란 겁니까?”

“아니에요. 집사하고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백작 부인의 기일에 맞춰 방문하기로 한 사제가 갑자기 병환을 얻어 쓰러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사제로 조율하겠다고 하여 일단 당신에게 물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뭘 숨긴다는 겁니까?”

그가 내 뒤의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을 흘끔 쳐다 보길래 나는 뜨끔해서 나도 모르게 반걸음 옆으로 가 그의 시선을 가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브린이 이상한 걸 선물로 줘서 치우려던 참이었어요.”

“이상한 선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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