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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30)화 (31/113)

30화

“썩 기분 좋은 대화는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주겠어요. 당신을 이해하니까 넘어가는 거예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아니까요.”

“고맙습니다, 슈아.”

“고마우면 앞으로 나한테 잘해요. 그래야 오늘의 서운함을 잊어줄 거니까요.”

“물론. 당연히. 무조건.”

환한 미소를 보이는 그의 얼굴에 홀가분함이 엿보인다. 그간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었을지 짐작이 가는 바라 방금 또 서운했던 감정이 금세 사라져버리고 만다.

쉬운 여자로 보일까 봐 걱정이지만. 그에게라면 상관없지, 뭐.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해줘요. 우리 왕국에서 머물고 있었을 때가 역병이 번지던 그 시기 아니었던가요?”

“맞습니다. 역병이 돌아 어쩔 수 없이 왕도를 떠나야 했을 때 당신을 보았습니다. 왕도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초조해하던 당신을.”

나는 그 당시 계속 영지의 본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언을 받고 수도로 향했던 거고, 그는 그 역병을 피하려다가 우연히 나를 본 거다.

내가 타고 있던 마차에 오른 그가, 그 전에 나를 이미 보았다면 그게 우연인 거라고 생각한다. 그걸 운명이라고 하지 않으면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요? 나를 따라온 거예요?”

“부끄럽지만…… 맞습니다. 따라갔다가 우리 뒤를 쫓았던 이들과 싸움이 벌어졌고, 죽을힘을 다해서 당신이 타고 있던 마차를 따라잡았던 겁니다. 살기 위해서요.”

그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 엉망진창의 몸으로 마차를 따라잡다니. 그래서 더 출혈이 심했던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냐고 따지고 싶지만, 만약 그때 그렇게 무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와 이런 관계로 남게 되지 못했을 거다. 또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고.

나는 손에 든 단도를 대충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그가 혹시라도 내가 다칠까 봐 손에 든 촛대를 위로 올리며 한 팔로만 나를 끌어안아 준다.

“슈아,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이제 누가 그 어떤 말을 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아니, 앞으로는 누구도 당신과 나 사이를 음해하려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여지를 주지 않겠어요.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에쉬.”

그를 의심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오로지 혼자 견디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에 대한 사과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물어볼걸. 나름 배려한다고 했던 일이 그를 더 힘들게 만들지 않았었나 싶어 마음이 번다해졌다.

“불안하지 않았으니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궁금해하기 전에 다 말해두었다면 이런 사달이 나진 않았을 테니까요.”

서로 먼저 말하지 않아서 사과하는 이 상황이 웃기기만 하다.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상대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안하면 뽀뽀해줘요. 진하게.”

그를 향해 활짝 웃으며 입술을 모아 쭉 내밀자,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는 그가 다정한 입맞춤을 건네준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의 온기를 느끼며 함께 마주 보고 있기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바라는 건 단 한 가지. 영원한 사랑의 맹세와 더불어 평생 이 달콤한 행복을 만끽하는 것.

우리는 늦은 새벽이 찾아와 솔솔 졸음이 몰려올 때까지, 한참 동안 산책을 즐기며 서로의 온기를 맛보았다. 달거리 중이라 깊은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저 짧은 입맞춤으로 애써 달래면서.

다음 날, 늦잠을 자서 평소보다 조금 늦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에브린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난 거야? 어제 나랑 같이 잤잖아.”

“잠이 안 와서 산책 좀 했어.”

“누구하고? 너의 그이하고?”

“에쉬 말고 또 누구하고 산책을 하겠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으니까.”

또 음흉하게 키득키득 웃는 에브린의 상상을 단번에 깨트리고 코웃음을 치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가 저택 현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집사를 보고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밖에 무슨 일 있어?”

하인에게 무언가를 지령하는 집사에게 다가가 묻자,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는 집사가 내게 묵례했다.

“이제 내려오십니까, 아가씨? 다름이 아니라 손님 두 분께서 지금 돌아가신다고 해서 준비를 도와드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돌아가? 파빌리엔이?”

“예.”

어제 그런 해괴한 말을 던져놓고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포기한 걸까? 그래 주면 감사하지만, 어제의 행동으로 보면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을 태세였다.

혹시 몰라 에브린에게 눈빛으로 물었으나 자기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한다.

“어디 있어, 지금?”

“조금 전 상업마차를 불렀고, 지금은 밖에서 마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바로 현관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에쉬와 파빌리엔, 그리고 잔뜩 심통이 난 채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레이니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 돌아가겠다고요?”

그 세 사람을 향해 다가가며 묻자, 그들의 시선이 다 내게 꽂힌다. 에쉬는 조금 피로해 보이는 얼굴로 더는 상대하기도 싫다며 고개를 저었고, 파빌리엔이 피식 웃으며 내 물음에 대답을 꺼낸다.

“빨리 꺼져주길 바랐던 거 아닙니까? 왜요, 설마 떠난다고 하니 이제 좀 아쉬운 마음이 들기라도?”

또 그 표정이다. 웃고는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짜증이 살짝 엿보이는 느낌의 얼굴. 그 불쾌감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서 나도 지지 않겠다며 빙긋 미소로 화답했다.

“그럴 리가요. 에쉬의 유일한 가족인데, 마지막 배웅을 하지 못하면 찝찝함이 남아서 괜히 신경 쓰였을 거예요. 앞으로 다시 볼 일도 없을 테니까요.”

파빌리엔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한쪽 눈가를 파르르 떤다. 먼저 나를 들쑤셔놓은 대가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글쎄요. 다시 볼 일이 과연 없을지, 그건 두고 봅시다.”

“두고 보자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볼 것 없는 사람이라던데. 그리고 그거 귀족 협박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거, 모르나요?”

시치미 뚝 떼고 새침하게 대꾸하는 나를 굉장히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그러더니 헛웃음을 뱉어내며 슬슬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면서 거친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을 확 쓸어 넘겼다.

확실히 에쉬와 다르게 다혈질이다.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성질을 내는 꼴이 그저 한심하기만 하다.

“그만합시다. 재미없군요. 그저 더는 머물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귀찮은 혹도 떼어줄 겸.”

그가 턱짓으로 레이니드를 가리켰고, 레이니드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그런 파빌리엔의 옆구리에 힘껏 주먹을 휘둘렀으나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고양이의 솜방망이 정도로만 여기면서 코웃음을 치던 파빌리엔이 너도 당해보라는 듯 레이니드의 손을 잡아 손목을 이로 콱 물었다.

물론 레이니드는 아프다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버둥거려 빠져나와서는 잇자국이 난 손목을 살살 어루만지며 눈물이 맺힌 눈으로 파빌리엔을 찌릿 노려보았지만.

‘저런 걸 보면 둘이 정말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정말 모를 남매지간이다. 저들을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을 만끽하며 살았는지 재차 확인되곤 했다.

“돌아가면 맡은 일을 충실히 이행하는 건가요?”

“그건 왜 묻습니까? 내가 형님을 또 괴롭히러 올까 봐 걱정돼서요?”

“백성의 세금은 그들의 피와 땀이에요. 그 고혈로 먹고사는 우리들이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지켜주나요?”

파빌리엔에게만이 아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간접적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에쉬가 자신의 임무를 동생에게 떠넘기고 온 것도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행동이었으니까. 공적으로 따지자면 잘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 영지에 큰 도움을 주니까 내 입장에서는 그저 좋지만.

“부디 당신의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써주길 바라요. 당신 형님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만큼.”

내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나머지는 스스로의 몫일 테고. 에쉬도 아무리 냉정한 마음을 품고 가문을 등졌다 해도 아예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다 그러하니.

때마침 집사가 불러왔다는 상업마차가 백작저 안으로 진입했다. 검은색 마차를 발견한 레이니드가 떠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는지 울상을 지으며 에쉬에게 달려가 매미처럼 들러붙었다.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에쉬가 거의 아버지와 다름없을 테니까. 애틋하겠지.’

하지만 에쉬는 레이니드 만큼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어깨를 토닥거려주기만 했다.

“가서 파빌리엔 말 잘 듣고 얌전하게 지내.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을 거다. 영원히 떨어지자는 건 아니니까.”

그런 에쉬를 올려다보는 레이니드의 눈빛은 비를 쫄딱 맞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새끼고양이처럼 처량해 보였다. 가기 싫으면 그냥 여기 더 머물러도 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 쑥 내려가 버렸다.

자기 오라버니가 악독한 맹수라고 나더러 조심하라면서 정작 본인은 맹수에게 애교부리는 고양이 연기라니. 괜히 좀 얄미워지기도 한다.

“그만 가자, 레이니드.”

결국 파빌리엔이 레이니드를 에쉬에게서 떨어트리려고 잡아당겼으나, 레이니드는 끝까지 에쉬의 옷깃에 매달렸다. 그러자 파빌리엔은 레이니드를 번쩍 들어 짐짝처럼 왼쪽 어깨에 둘러멘다.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여자애를 저렇게 험하게 다루다니.’

둘째 오라버니가 되어서는 여동생에게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할 때,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파빌리엔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윙크를 날렸다.

“조만간 싫어도 또 만나게 될 일이 있겠지요. 그때까지 평안히, 또 무탈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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