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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29)화 (30/113)

29화

아마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이만큼이나 쉽게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할 거다. 새삼 그의 존재감이 광활한 대지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꽃밭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좋아. 저 닿지 않은 높은 하늘만큼 그를 사랑해. 그런 말로 식어버릴 그런 감정은 확실히 아니라고.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어두운 후원을 밝히는 촛대를 손에 쥐고 내게 다가오는 그가 나를 발견하고서는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는다.

그러다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단도를 내려다보고는 움찔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검은 왜……. 무슨 일 있었습니까?”

“혹시 몰라서 가지고 있었어요. 누굴 좀 만나느라고요.”

“……누굴 만났습니까, 이 늦은 시간에?”

그는 내가 그저 가벼운 산책을 하려고 나온 줄 알았나 보다. 굳이 그에게 숨길 이유는 없다. 거짓말을 한번 하면 계속 쌓이게 되고, 언젠가는 들키기 마련이니.

“파빌리엔이 나를 불러서 잠깐 만났어요. 혹시 몰라서 기사에게 시간이 오래 지체되면 당신을 불러 달라고 했고요.”

그러자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며 경계하는 그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서는 내 안색을 꼼꼼히 살폈다.

“녀석이 실례되는 소리나 행동을 하진 않았는지요?”

“그럴까 봐 이거 들고 나온 거예요. 이건 방어용이거든요.”

검을 살짝 흔들자 칼날에 달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신다. 새삼 그가 이런 날붙이에 의해서 그런 엄청난 상처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파빌리엔이 왜 형님은 되고 자기는 안 되냐고 묻더라고요. 마음먹은 대로 되지도 않는 게 사람 마음인데, 내게 그걸 따진다고 해서 마음이 옮겨가는 것도 아니고.”

“그 녀석이 쉽게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품은 마음이 꽤 크더군요.”

“나도 커요. 내 마음에 빈틈없이 자리한 사랑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에게 줄 여지는 없어요.”

내가 에쉬를 빤히 올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자, 내 말의 의도를 깨달았다는 듯 그가 조금 쑥스러워한다. 매번 내가 부끄러워 몸을 배배 꼬기만 했지, 그가 이런 얼굴을 보이는 건 아주 희귀해서 너무 설렌다.

“그리고 또 되게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요.”

“이상한 말?”

“당신이 크게 다쳐서 내가 타고 있던 마차에 오르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고요.”

말랑하게 풀어졌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리고 만다. 아주 서늘하게 얼어붙은 그 표정이 몹시도 살벌하여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에쉬?”

“정확히 뭐라고 지껄인 겁니까?”

“나는 그 말, 믿지 않아요. 그냥 홧김에 당신과 나를 음해하려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니까. 누굴 탓할 것도 없어요.”

“말해주십시오. 알아야겠습니다. 그 녀석이 당신에게 했던 그 말을.”

화가 나겠지. 이해한다. 레이니드에 이어 파빌리엔까지 우리 사이를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하니 그 의도가 궁금할 것이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고. 파빌리엔을 감싸줄 의도도 없고, 숨길 거였으면 애초에 파빌리엔을 만났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않았을 거다.

“그럼 화내지 말고 들어요. 나 그 표정, 좀 무서워요. 더운 여름에 혼자 눈보라가 섞인 칼바람을 정통으로 맞는 기분이라고요.”

내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바르르 떨자, 그가 재빨리 굳은 표정을 풀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아까보다 살기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무섭다.

나는 빨리 그가 다정하게 웃는 표정을 그리길 바라며 이어서 대답을 해주었다.

“내가 당신과 나의 만남이 신이 점지해준 운명이기 때문에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했거든요. 그 말에 에쉬가 반쯤 주검이 된 채로 내가 타고 있던 마차에 오른 건 우연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어요.”

“……계속하세요.”

“그게 다예요. 그게 과연 운명이었겠냐고. 궁금하면 당신에게 직접 물어보라고도 했고요.”

“하아…….”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는 그가 고뇌에 가득 찬 얼굴을 잔뜩 구긴다. 구겨져도 그저 예쁘기만 하니 정말 에브린의 말대로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저 설레기만 하다니.

그보다 이 야심한 시각에 그와 단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이런 귀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

“에쉬. 우리 걸을까요?”

나는 정원 방향으로 길을 잡았고 에쉬는 말없이 나와 나란히 걸었다. 그런 그의 손을 꼭 잡아주자, 생각의 파도 속에서 열심히 발버둥 치던 연갈색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그건 참회의 눈빛이었다. 내게 무엇을 용서받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런 표정으로 봐요? 설마, 파빌리엔의 말이 사실인 거예요? 나를 유혹하려고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고?”

“아픈 건 딱 질색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내 몸에 내가 상처를 내겠습니까? 그런 취미는 없습니다.”

“그럼 이제 설명해 봐요. 왜 그날 그 자리에 그런 피범벅을 하고 있었는지.”

아까 레이니드가 이런 식으로 이간질을 시도했을 때처럼, 그는 어쩔 수 없이 파빌리엔이 던진 말을 주워 담아 해명해야 할 거다. 

그건 다들 궁금해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의 뛰어난 검술 실력을 본 이들은 더 의아해했었다. 대체 어떤 대단한 상대와 싸웠기에 저만큼 상처를 입었느냐고.

이제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되어서 약간 기대감이 차올랐다.

“최근에는 보지 못했으나 예전에는 내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날, 파빌리엔과 동행 중 그들에게 기습공격을 당했고 그때 크게 다친 겁니다.”

“누가, 당신을 노려요?”

“정체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때 다 죽였으니까.”

살기 위해 살인을 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으니 왠지 오싹하다. 누군가 그의 목숨을 노렸다는 것도 달갑지 않았고.

“그럼 파빌리엔도 같이 있었던 거예요?”

“그 녀석은 그때 절 뒤로하고 혼자 도망친 개새……. 후우, 만약 그 녀석이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까지 상처를 입진 않았을 겁니다.”

이를 부득부득 가는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는 건 또 처음 듣는다. 끝까지 뱉어내진 않고 꾹 참긴 했지만 그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 가는 바다.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그를 위협하는데 혼자 도망을 치다니. 진짜 에쉬가 죽길 바랐던 거 아니야? 점점 더 파빌리엔을 못 믿겠다. 의심도 들고.

“그래서 그 다친 몸을 이끌고 살기 위해 우리 마차를 세운 거군요.”

“그대로 피를 흘린 채 있으면 정말 죽을 것 같더군요. 죽자니 너무 억울해서 그랬습니다.”

들어보면 별일 아닌데, 왜 파빌리엔은 우리의 만남이 우연은 아니라고 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파빌리엔이 왜 그걸 우연이 아니라고 한 거예요?”

그는 다시 말을 고르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를 바삐 움직였다. 말을 하기 싫어서는 아니고,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고르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 나는 왕도 내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라 하면 역병이 번지던 시기다. 내가 그를 만났던 것도 그 끔찍한 역병에 의해서 왕국 수도를 봉쇄했던 그날이니까.

“전부터 궁금했는데, 에쉬 당신 우리 왕국 사람이에요?”

“……아닙니다.”

“그럼 당신이 아버지께 넘겨받았다던 그 목장은 어디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에브린도 그랬었다. 그가 과거의 삶을 청산했다 해도 간단한 인적사항은 기본으로 알고 있어야 뒤탈이 없을 거라고. 듣기로는 제국의 귀족이었다고만 얼핏 알고 있을 뿐, 정확한 출신을 모르고 있긴 했다.

이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알게 되는 건가 싶어 조금 기대를 했는데,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솔직한 사람이 입술만 겨우 달싹거리다가 포기하듯 꾹 다물어 잘근 씹기만 한다.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혹시 음지에서 활동하는 그런 건가요? 용병이라든지 암살 뭐 이런 것?”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쪽입니다. 맹세컨대 절대 아닙니다. 그런 질 나쁜 것들과 엮이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럼 반역이라는 거에 휩쓸렸다가 명예를 회복한 뭐 그런 위태로운 가문?”

“…….”

“어, 혹시 제가 정곡을 찌른 건?”

최근에 나는 그가 제국 황실의 새 황제와 손잡았던 가문의 장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황제가 이런 인재를 그냥 순순히 보내진 않았을 거고, 황좌 찬탈에 성공하도록 협조하는 대신 자신에게 자유를 달라고 조건을 내걸었던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소설을 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슈아. 혹시 당신이 말한 대로 가문이 반역의 누명을 써서 내가 도망자 신세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가 걱정을 한가득 담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그게 맞나 보다. 그래서 지금까지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숨기기 급급했던 거겠지.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지금도 반역 누명을 쓰고 있나요? 그게 당신이 한 일이에요?”

“둘 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상관없잖아요? 지금 당신이 현상수배범이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최근에 그 일을 다 깔끔하게 정리하고 온 거라면 전혀, 조금도 문제 될 건 없다고 봐요.”

아마 그가 누명을 벗지 못한 도망자라도, 나는 그를 포기하지 못했을 거다. 그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왠지 복잡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괜히 벅차올랐다. 바보처럼 왜 그런 고민을 혼자만 안고 있던 건지.

“정말 나쁘네요, 에쉬. 내 마음을 의심했던 거예요? 당신에게 씻지 못할 오점이 있다고 해서 내가 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냐고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나의 문제가 당신에게 해를 끼친다면, 아마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그 문제를 정리하지 못했다면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고요?”

“……예.”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좋게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지금 현재 그는 내 옆에 있고, 그를 해칠 사람들도 없으며, 누구도 그와 나를 갈라놓을 명분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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