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둘이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더 파빌리엔이 의심스러워진다.
하지만 명분이 없잖아? 만약 죽일 생각이었다면 에쉬가 파빌리엔에게 작위를 넘겨주었다는데 못하겠다고 찾아오진 않았을 거고. 바라던 작위였으나 막상 받으니 막막했나?
“에쉬도 답답하겠다. 자기를 해치려던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니 등 뒤에 적을 둔 느낌일 거고.”
내가 이렇게 답답한데 그는 오죽할까 싶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톡. 톡.
그때 고요한 침실에 요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단단한 무엇인가가 창문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건가? 싶다가도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일정한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일부러 작은 돌을 창문에 맞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에쉬는 레이니드에게 붙잡혀있을 텐데.’
나는 베갯속에 숨겨둔 단도를 손에 꼭 쥐고 침대를 빠져나와 살금살금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옆 벽에 몸을 붙이고 창밖을 훑어봤는데, 발코니 아래로 언뜻 회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에쉬?”
반가운 마음에 창문을 열고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멈칫했다. 에쉬보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고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파빌리엔이었다.
“……파빌리엔? 이 시간에 안 자고 거기서 뭐 해요?”
“그쪽하고 이야기를 할 시간이 지금밖에 없을 것 같아서. 잠깐 내려오시죠? 나하고 할 이야기, 있지 않습니까?”
파빌리엔과 언제고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밤은 아니었는데. 게다가 귀족 여자 침실에 돌을 던져 불러내는 건 옛날 수법 아닌가? 세레나데를 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려나.
“자는 사람 깨우는 거, 너무 경우 없는 행동 아닌가요? 할 이야기 있으면 낮에 해요.”
“낮에는 형님이 당신과 따로 만나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닐 테고. 내 이야기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겁니까?”
심통을 부리는 목소리가 사뭇 까칠하다. 솔직히 방금 그가 살인미수범이 아닐까 생각하던 차여서 그런지 조금 겁이 나긴 했다. 혹시라도 내게 해코지를 할까 봐.
그래도 에쉬가 내게 파빌리엔을 따로 만나지 말라고 하진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기다려요. 내려갈 테니까.”
나는 잠옷 위에 얇은 숄을 걸치고 두 손에 단도를 꼭 쥔 채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순찰을 돌던 기사가 하품을 하다가 나와 마주치고는 흠칫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검지를 세워 입술 위에 대고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잠시 후원에 다녀올 건데, 만약 내가 너무 늦는다 싶으면 에쉬를 불러다 줘.”
“얼마나 오래 계실 예정이십니까?”
“음. 반 시간 정도?”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든든한 부적 하나 가졌다 생각하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후원으로 향했다.
바로 내 방 발코니 아래 그대로 서 있는 파빌리엔이 시야에 들어왔다. 심장이 쫄깃하게 조여들고 쿵쾅쿵쾅 날뛰었으나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그가 다가오는 나를 힐끔 보더니 내 두 손에 꼭 쥔 단도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린다.
“설마 그 칼로 날 죽이려고?”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에요. 내가 휘두른다고 쉽게 목을 내어줄 건 아니잖아요?”
“글쎄. 당신이 죽으라고 하면 진지하게 고민하긴 할지도.”
씨익 웃으면서 하는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저 남자도 에쉬 만큼 저돌적인 성향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낀다.
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와 마주 보고 섰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왜 웃어요?”
“왕국 수도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봤던 게 생각나서. 이 남자가 왜 수작일까? 이런 느낌이거든요.”
“……잘 아시네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어서 해요. 반 시간이 지나면 에쉬가 올지도 몰라요.”
“형님이요?”
“내가 그때까지 방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에쉬에게 알리라고 했거든요.”
방금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웃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린다. 살벌하게 변하는 표정은 에쉬와 형제임을 알게 해줄 만큼 분위기가 똑 닮았다.
그런다고 겁먹을 내가 아니지만.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뭐예요?”
“레이니드가 당신을 만나고 왔다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그건 왜요?”
“그 녀석이 대체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지 궁금해서요.”
레이니드와 파빌리엔이 서로 계략을 꾸밀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표정 연기가 수준급이 아닌 이상.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는 불안함이 조금 엿보였다. 혹시라도 나를 해코지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목소리를 앗아간 이가 에쉬였다고 했고, 에쉬는 그에 대한 해명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거든요.”
“독이 든 와인, 그거 말입니까?”
“맞아요. 그리고 레이니드는 에쉬가 맹수이니 조심하라고 하더라고요. 언제 나를 물어 죽일지 모른다는 뜻으로.”
그 말에 파빌리엔이 헛웃음을 뱉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맹수……. 여전히 형님을 무서워하면서도 저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건, 대체 무슨 베짱인지.”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왜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에쉬를 찾아온 거예요?”
“그건 말했던 것 같은데. 빼앗긴 내 여자를 다시 쟁취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은 걸까? 이참에 확실하게 해둬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빼앗겼다는 표현은 잘못되었네요. 나는 당신에게 일말의 마음도 준 적이 없으니까요.”
“……냉정한 여자라고는 생각했는데. 잔인하기 그지없군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겁니까?”
“내 마음은 하나라서요. 한 사람에게 주는 것도 모자라요. 미안하지만 괜한 감정노동으로 다치지 말고 정리해주길 바라요.”
괜한 미련이 남기게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가능한 좋게 마무리를 짓고 싶기는 하지만 이 남자 성격을 보아하니 매정하게 끊어내지 않으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에브린이 아직도 파빌리엔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나는 에쉬와 결혼하기로 약속했어요. 아버지께 허락도 받았고, 흔쾌히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셨어요. 그것을 번복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왜 나는 안 됩니까? 형님은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나는 호흡을 고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냥 싫다고 하자니 에쉬의 혈육이라 미안해지고. 구구절절 설명하자니 뭐부터 늘어놔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거절이 이렇게 힘든 거였다니.
내가 생각을 고르는 동안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한다. 표정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꽈악 쥐고 있는 그의 손등에는 푸른 핏줄과 힘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으면서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하늘이 맺어준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했어요. 나는 그 상대가 에쉬라고 확신해요. 또한 나와 에쉬가 만나게 된 건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운명의 상대…….”
“네. 운명의 상대요. 그걸 느꼈어요. 처음 에쉬를 만났을 때부터.”
주먹을 꽉 쥐던 그의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힘없이 내리깐 눈꺼풀을 꾹 감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는 그가 피로함을 가득 담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말이 잘 먹혔나 보다. 이 이상 더 할 말도 없다. 마음이 가서 한 일을 어떻게 말로 나열할 수 있을까?
“제가 할 말은 이게 다예요. 당신도 부디 좋은 분을 만나길 진심으로 바라…….”
“형님을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생각하신다면 글쎄요. 그게 과연, 운명이었을까?”
순간 왜인지 팔뚝에 소름이 일었다. 분명 늦은 오후에 쏟아진 비로 인해서 따뜻한 습기를 머금어 살짝 더운 느낌인데, 갑자기 서늘한 공기가 나를 뒤덮어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형님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그날 반쯤 주검이 된 채 당신의 마차에 오른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지.”
자기 할 말만 뱉어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리는 파빌리엔이 시야에서 금세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가 사라진 방향만 빤히 쳐다보다가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사랑받는 게 이렇게 고역인 건 처음이네. 이젠 하다 하다 별 이야기를 다 듣는구나.”
그저 우스울 뿐이다. 그럼 에쉬가 우리 가문의 마차를 노리고 자기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서 올라탔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 마차에 누가 탔는지 어떻게 알고?
아직도 그의 몸에 남아있는 자상의 흔적들은 결코 가벼운 생채기가 아니었다. 그 상처를 본 이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했다. 꽤 많은 숫자의 사람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흔적이라고.
치료해주던 의사가 조금만 늦었어도 과다출혈로 인해 숨이 멎었을 거라고 했었다. 만약 내가 그를 마차에 태우지 않았으면 그는 그대로 죽었을 거다.
어머니의 죽음에 굳건하던 정신이 크게 흔들려 그를 받아준 거였지, 평소의 나라면 그 마을에 치료를 맡긴 채 혼자 본가로 돌아왔을 거다. 그건 절대 그의 의지가 아닌 나의 의지였다. 내 마음이 동하여서, 그냥 그러고 싶어서 했던 선의였을 뿐.
‘에쉬가 왜 자신의 가문을 등지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내게 왔는지, 이해가 되네. 나 같아도 그러겠다.’
아무리 내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해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던지고 음해하려는 파빌리엔이 너무 미웠다.
만약 에쉬가 정말 독한 마음을 먹고 그랬다 하더라도, 그런 수작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그에게 반한 것도 내 의지, 그를 배우자로 삼겠다고 결심한 것도 오로지 나의 선택이었으니까.
“슈아?”
어쩐지 내 진심을 농락하는 것 같아서 불쾌지수가 상승하고 있던 찰나.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에쉬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동시에 바짝 굳어있던 어깨 힘이 사르르 풀려버린다. 차갑게 가라앉아있던 심장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크게 뜀박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