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내게서 등을 보이고 동상처럼 서 있던 레이니드가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본다. 행동이 왜 이렇게 유령처럼 으스스한지. 파빌리엔과 똑같은 푸른 눈동자인데도 느낌이 몹시도 달랐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을 강렬하게 쏘아붙이더니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내게 다가와 거리를 두고 섰다. 그리고는 한 손을 내민다.
에쉬와 대화할 때마다 에쉬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서 소통하는 것을 보았었다. 그래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내 손바닥을 내밀었고, 레이니드는 그 위에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내려갔다.
그 내용을 이해하자마자 평온함을 유지했던 얼굴의 핏기가 서서히 가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에쉬에 대해서.
왜인지 모르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좋은 뜻으로 물어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간질을 하려는 건 아닐지 의심도 들고.
나는 최대한 티 내지 않고 떨리는 숨을 골랐다. 일단 레이니드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먼저 말해주지 않을래?”
여전히 눈을 치뜨며 나를 노려보던 레이니드가 다시 손바닥에 글자를 적어나갔다.
저 남자가 당신을 속이고 있어. 정말 몰라?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는 중이야?
에쉬가 나를 속이고 있다니.
내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장담했던 사람이다.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평생 내가 모르게끔 꼭꼭 숨겨 무덤까지 가져갈 남자라는 것을 안다.
에쉬가 남을 속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보다 가족으로서 평생 지내온 레이니드가 더 잘 알 것이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간다. 나를 흔들어놓아 에쉬를 의심하게 만들 생각이 분명하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캐내려고 하면 서로의 신뢰만 무너질 거다. 나는 에쉬가 내게 다 털어놓아 줄 때까지 기다려 줄 자신이 있다.
그가 평생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나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실은 언젠가 다 말해줄 거라고 믿어. 너도 분명,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을 거야. 그걸 타인인 내가 집요하게 캐물어 보면, 기분 좋겠어?”
말갛고 예쁜 푸른 눈동자에 가느다란 파동이 인다. 누가 봐도 숨기고 싶은 아주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더니 자기가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질 않아 살짝 짜증이 난 듯 미간을 확 구겼다.
그건 또 에쉬와 똑같은 표정이라 왠지 밉지가 않았다. 나중에 결혼해서 에쉬를 닮은 딸을 낳으면 이런 느낌일지.
그 상상에 참지 못하고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진짜 딸이었으면 저 요망한 아이의 코끝을 꽉 꼬집어주었을 텐데.
“차라리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에쉬의 숨겨진 비밀을 말해주었다면 좋았을 거야. 방금 그건 못들은 걸로 할 테니까 네 오라버니 상처받지 않게 예쁜 얼굴처럼 마음도 예쁘게 먹자. 알았지?”
이 작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에쉬의 손에서 자랐다고 했다. 부모의 손을 타야 할 아이가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 생각하면 굉장히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타인을 동정하는 편은 아닌데 에쉬의 동생이라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최대한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레이니드의 손을 꼭 잡아 쥐어 다독이듯 설득했다. 언니들이 내게 했던 것처럼.
나를 향한 따가운 시선을 보내던 레이니드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듯 눈꺼풀을 슬쩍 내리깐다. 백금색의 기다랗고 쭉 뻗은 속눈썹이 오색의 깃털처럼 나풀거리는 그 장면조차 너무 예쁘다.
어머니와 둘째 언니를 제외하고 정말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아니지, 에쉬도 파빌리엔도 그렇고 다 예쁘긴 하지. 저렇게 예쁜 세 남매가 귀족이라면 다른 귀족들이 결혼 상대자로 꽤 탐냈을 거라고 확신한다.
‘지금은 내 남자니까. 절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 보내지도 않을 거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또 한 번 다짐하고 있을 때, 조금 기가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레이니드가 다시 내 손을 잡아서 손가락으로 열심히 새긴다.
한 가지만 알려줄게. 내 목소리를 가져간 사람은 에쉬야. 에쉬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건 사고였다며.”
레이니드는 그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다시 진지하게 하고 싶은 말을 손바닥에 써 내려갔다.
당신도 조심해. 언제 당신을 해칠지 모르니까. 맹수를 곁에 둘 때는 먹잇감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걸 명심하고.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레이니드는 나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서재를 빠져나갔다. 나는 닫힌 문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다가 방금 레이니드의 손길이 담긴 손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에쉬는 분명 불의의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거라고 했다. 그 불의의 사고가 에쉬 때문이라니? 그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에쉬가 다시 서재로 들어와 내게 한달음에 다가왔다.
“왜 그래요? 레니가 무슨 험한 말이라도 했습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간 사람이 에쉬라고 했어요. 그거, 무슨 뜻이에요?”
그가 레이니드를 해쳤을 거라고는 생각 못한다. 만약 그랬다면 레이니드가 그에게 그렇게까지 들러붙고 매달리진 않았을 거다. 또 여기까지 그 먼 여행을 하면서까지 오진 않았을 거고.
하지만 없는 말을 지어서까지 하진 않았을 거다. 다른 건 몰라도 두 사람이 엮인 그 사건이 거론되어 상당히 궁금해졌다.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나를 창가 쪽으로 데리고 가서 발코니 창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누가 엿들을까 봐서. 밀실보다는 창문을 열어둔 채로 대화를 나누면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방문 너머에서 명확하게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평소보다 조금 습기를 머금은 후텁한 바람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오늘 안으로 시원한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다.
“정말 레니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내가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갔다고요?”
“네.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리고 내게도 조심하라고 했어요. 당신이 나를 해칠 수도 있다고요.”
“……하아, 그럴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조금 기분이 묘하군요. 아직도 그 일을 내 탓이라고 한다면 굉장히 섭섭해지는데.”
자조 섞인 씁쓸한 그의 표정이 너무 안타깝다. 레이니드가 그를 오해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게, 레이니드가 에쉬를 너무나 애정하고 있는 느낌이 눈에 잘 보였다.
만약 나를 다치게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보는 것도 괴로울 거다. 그 상대가 가족이라도 말이다.
역시 나와 에쉬를 이간질하려고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닐까?
“슈아. 기왕 나온 말이니 해명은 해야겠습니다. 별로 좋지 않은 가족사라서 입 밖으로 흘리는 건 달갑지 않지만, 당신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달갑지 않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당신을 믿으니까.”
그에게 어두운 과거가 있다는 것만큼은 잘 안다. 아무리 정략혼이라 해도 결국 본부인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를 품은 아버지를, 그는 처음부터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런 아픔이 있는 그의 상처를 괜히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건 원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지하게 해명했다.
“누군가 나를 죽이기 위해 레니를 이용하여 내 와인잔에 독을 넣었습니다. 그에 죄책감을 느낀 레니가 나 대신 그 와인을 마신 겁니다.”
“……그럼 독에 의해, 목소리를 잃게 되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대신 성대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레니가 범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라 알아내진 못했지만요.”
“언제 그런 거예요?”
“오 년 전입니다.”
범인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일 것일 터. 그가 그런 위기에 처했었다는 생각을 하니 손이 바르르 떨린다.
레이니드가 에쉬 때문이라고 했던 건 역시 그 사건을 전부 에쉬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걸 테지. 에쉬만 아니었으면 독을 넣을 일도, 마실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에쉬가 레이니드를 그렇게 보듬어주고 아끼는 건 그 또한 미안함이 있기 때문일 거다. 겨우 열 살이었을 그 아이가 살의를 가지고 스스로 그런 일을 작당하진 않았겠지.
범인에 대한 것을 밝히지 않는 건, 에쉬의 주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협박당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에쉬도 그걸 아니까 더 레이니드를 곁에 두는 걸지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쩌면 레이니드는 그 범인에게서 당신을 지키려고 어떻게든 곁에 남으려 발버둥 치는 걸 수도 있겠어요.”
“딱히 그 아이를 믿고 있진 않습니다. 제 주위에 있는 이들은 누구 하나 믿을 수 없어요. 당신 이외에는 누구도.”
그가 참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건 알겠다. 나는 먹먹해지는 기분에 입술을 잘근 씹으며 그를 조용히 품에 안았다. 덩치가 워낙 큰 사람이라 내가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지만.
“말해줘서 고마워요, 에쉬. 그리고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이 나를 만나기 전 과거를 밝히지 않는다 해도 나는 원망하지 않아요. 다 이해하니까.”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질 않아서 본의 아니게 숨긴 꼴이 되었지만요.”
“그럼 그 마음의 준비가 되면 언제든 말해줘요. 얼마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어요, 난.”
세상에 비밀이라는 건 없다고, 그도 불안한 모양이다. 예상치 못하게 동생들이 찾아와서 평화롭던 나와 자신의 사이를 후벼대어 혹시라도 내가 실망하여 마음이 식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느껴졌다.
빨리 어머니의 기일이 지났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가 수도로 떠나야 한다는 핑계로 형제들을 다시 돌려보내면, 그도 조금은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그날 늦은 밤.
뒤통수에 베개만 닿으면 잠드는 에브린과 다르게 나는 쉽게 잠드는 편이 아니어서 조금 뒤척거리고 있었다. 낮에 에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곱씹어서 그런지 다른 날보다 잠이 오질 않았다.
그를 위협한 이가 누굴까? 열 살의 어린 여자아이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가까운 가족일 가능성이 큰데. 레이니드의 친어머니? 설마 그의 아버지는 아니겠지. 자기 자식인데 그런 끔찍한 짓을 꾸미진 않았을 거라 믿어.
‘……설마 파빌리엔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