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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26)화 (27/113)

26화

왜인지 미움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처음 보는 여자, 그것도 내 남자의 혈육에게. 마치 자기 남자를 빼앗은 여자를 보는 것처럼, 그 소녀의 눈빛이 그러하였다.

저 아이가 에쉬를 잘 따랐다고 했지. 에쉬도 저 아이에게 나름의 애정을 주었다면, 갑자기 자신을 떠나버리게 만든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에쉬.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미안합니다. 대신 사과할게요. 워낙 응석받이로 자란 아이라서……. 그리고 이 아이, 말을 못합니다.”

“말을 못하다니요?”

“불의의 사고로 목소리를 잃었거든요.”

소녀가 입술에 힘을 주어 쪼글쪼글하게 꾹 다물고는 에쉬를 찌릿 노려보았다. 에쉬는 그저 그런 동생이 안쓰럽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 한다.

그 손길에 바짝 굳어있던 소녀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듯 풀린다. 그러더니 작고 귀여운 동물처럼 에쉬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척이나 그를 의지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굉장히 아련한 눈을 하고 눈썹을 축 내린 채로 맹목적인 시선을 보내는데, 그 모습이 꼭 주인에게 충성하는 작은 강아지와도 흡사하다.

‘말을 못한다니. 그래서 에쉬가 더 애지중지하는 걸까? 원래 아픈 손가락이 더 신경 쓰이는 법이니.’

오랜 시간 제대로 씻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남장을 한 옷차림과 얼굴이 조금 꾀죄죄했다. 사람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았을 텐데. 파빌리엔을 놓쳤다면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법한데, 떠나간 오라버니를 만나러 그 위험한 여정을 결심하기까지는 대단히 큰 각오가 필요했을 거다.

친해지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슈아. 정말 미안하지만 욕실을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레니가 좀 씻어야 할 것 같아서요.”

“이름이 레니예요?”

“‘레이니드’ 입니다. 파빌리엔과 함께 오늘 중으로 돌려보낼 테니 더는 심려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파빌리엔은 이름으로 부르면서 여동생은 애칭으로 부르는 걸 보니, 누가 보면 레이니드가 그의 친여동생인 줄 알겠다.

그 모습을 문가에서 지켜보던 파빌리엔의 표정이 굉장히 볼만하다. 세 남매 중간에 낀 둘째는 이래저래 손해 볼 일이 많다던데. 왠지 파빌리엔이 레이니드를 괴롭히고, 에쉬가 그걸 중재해주면서 레이니드와 에쉬의 사이가 가까워진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에요, 에쉬. 부디 레이니드가 상처받지 않도록 잘 다독여주고 충분히 마음이 풀릴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도 괜찮아요. 가족과 억지로 떨어지는 거, 본인에게는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니 고맙습니다, 슈아.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단단히 교육을 시켜두겠습니다.”

에쉬는 자신의 형제들이 예고도 없이 방문한 것을 그렇게 달가워하진 않았다. 레이니드가 그의 옷깃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쥐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뱉어내는 느낌이 그러하였다.

그래도 어쨌든 혈육은 혈육. 억지로 떨어트리면 서로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나 레이니드가 열다섯 살이면 상당히 감정적으로 예민할 나이라서. 괜히 등 떠밀어 보냈다가 마음의 상처가 더 클 것 같았다. 그럼 날 더 미워할 테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혈육에게 미움받고 싶진 않았다. 또 가능하면 레이니드와 친해지고 싶고.

며칠 뒤, 어머니의 기일에 맞춰 일정을 다시 한번 조율하고 있을 때에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동안 오래 방치되었던 일들을 해결해야 해서 당분간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서찰을 보내길 당부하셨다.

어머니의 첫 기일을 함께 보내지 못하게 되어서, 어머니께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도 적혀있었다.

“왕국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 기일만큼은 꼭 챙기려고 하셨는데.”

내게서 편지를 넘겨받은 에쉬가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곱게 접어서 내게 내밀었다.

“그럼 백작 부인의 기일을 치른 뒤에 함께 수도로 가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수도……. 그즈음에 미뤄둔 모임도 열릴 거고, 아버지께 당신과의 결혼도 허락받아야 하니 가기는 해야겠네요.”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미리 채비를 할 테니 끝나면 바로 출발하지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게 애정을 공세 하는 그가 입술이 닳도록 뽀뽀를 퍼붓는다. 최근에 레이니드가 온 이후부터 단둘만 있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특히나 에쉬의 방에서 머무는 레이니드가 에쉬를 밤새 놔주지 않아서 어쩌다 보니 독수공방 신세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에브린과 돈독한 우정을 나눌 시간이 길어지긴 했지만.

“다른 것보다 레이니드가 계속 운다고 하니 마음이 쓰이네요. 아무래도 에쉬 당신을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저와 결혼하겠다고 하던 아이긴 했습니다. 제가 아버지 대신 딸처럼 키워서 더 그런 감이 있었는데, 설마 지금까지 그렇게 떼를 쓸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참 나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잘했는지 몰라도, 밖에서 얻은 사생아를 집으로 데려온 것도 모자라 아들인 에쉬에게 육아까지 도맡게 했던 걸까? 

“대부분의 딸이 어릴 때는 커서 아버지와 결혼한다고 해요. 저는 그런 적 없는데 두 언니는 그랬다고 어머니가 놀렸었거든요.”

“당신은 왜 백작께 그러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언니들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철이 일찍 들었던 것도 원인이겠고. 결혼이나 연애 같은 건 처음부터 관심이 없는 편이기도 했고요.”

“어째서?”

“내게 접근하는 이유가 눈에 훤히 보였거든요. 호기심 또는 권력. 나는 서로에 대해서 천천히 알아가는 게 좋아요.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만나기 전만 해도 이만큼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었다. 누구에게나 운명의 상대가 있다는 말도 솔직히 믿지 않았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내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가 너무 어려운 숙제 아니냐는 반문만 떠올렸을 뿐.

하지만 이제 그 운명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영원한 동반자를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까.

“나는 레이니드에게도 분명 좋은 상대가 나타날 거라 믿어요. 정 걱정되면 성인이 될 때까지 데리고 있는 건 어때요? 아무래도 파빌리엔이 당신만큼 케어를 잘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서.”

“그럴 순 없습니다. 두 녀석 다 빨리 정리해서 보내버릴 겁니다. 예상치 못한 방해꾼들이라서.”

뜨거운 불가마 속과 다름없던 밤을 보낸 이후로 그 역시 애가 닳은 모양이다. 지금 내가 달거리 중이어서 간만의 기회를 잡지 못해 매우 아쉬운 상황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배는 좀 괜찮습니까? 아프진 않고요?”

“괜찮아요. 그냥 조금, 배가 뭉친 느낌만 있고 통증은 없어요.”

“원래 통증이 없습니까?”

“다행히요. 예전에 첫째 언니가 달거리를 시작하면 며칠을 앓아누웠거든요. 그거 보고 굉장히 겁을 먹었는데, 둘째 언니랑 저는 그냥 몸이 조금 무거워진 것 빼고는 괜찮더라고요.”

“아프면 배를 쓰다듬어주려고 했는데 그건 조금 아쉽군요.”

음흉하게 웃으면서 은근슬쩍 손바닥을 내 배 위에 가져다 대는 그를 흘겨보다가도 웃음이 났다. 이런 농담 같은 거 할 줄 모르게 생겨서 그 행동이 더 귀엽기도 하다.

마음 같아서는 확 그냥 침대에 밀어 넣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 유감이다. 그래서 그냥 가벼운 입맞춤과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포옹만으로 달랬다. 그저 이렇게 그의 품에 안겨만 있어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불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존재를 감췄다.

그 기분 좋은 둘만의 시간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가 알콩달콩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서재의 방문 앞에 소리 없이 나타난 레이니드와 눈이 마주쳐버렸기 때문이었다.

“레, 레이니드?”

하필 내가 먼저 발견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유령처럼 나타나서는 무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아직도 경계가 가득하다.

뒤늦게 레이니드의 방문을 확인한 에쉬는 내게서 조심히 떨어진 뒤에 미간을 바짝 좁혔다. 얼마 안 되는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아 굉장히 불만스럽다는 듯 짜증이 담겨 있었다.

“파빌리엔은 어쩌고 너 혼자 여기 와 있어? 그리고 내가 백작저의 개인 구역에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경고했지.”

파빌리엔도 조금 무서워하는 에쉬의 가라앉은 살벌한 목소리에도 레이니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저렇게 화내도 자기를 어쩌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 아주 강해 보였다.

‘그나저나 내 어렸을 적 드레스가 꽤 잘 어울리네.’

좀도둑에게 빼앗긴 금화주머니를 되찾긴 했지만 그 이외에 몸에 지니고 있던 건 없었다. 입고 있던 허름한 옷이 전부였다. 그래서 급하게 내 드레스를 준비해주었는데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에쉬가 원래 고위 귀족이라더니. 레이니드를 보니까 그 말이 확 와닿는다.

여전히 생각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을 유지한 레이니드가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혹시 내게 무슨 해코지를 할까 봐 걱정했는데, 내가 아닌 에쉬의 팔뚝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아 끌어냈다.

“말로 해. 왜? 뭐가 불만이야, 또?”

항상 정중하던 에쉬가 동생들을 대할 때는 또 굉장히 엄하다. 언제 한번 이른 아침에 에쉬가 연무장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보니까 에쉬와 파빌리엔이 대련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살벌하던지, 차마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그냥 멀찍이에서 구경만 하다가 왔다.

파빌리엔이 조금 밀리긴 했어도 쉽게 질 만한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불안해서 그 자리를 뜨지 못했을 거다.

아무튼 레이니드에게 차마 힘을 주진 못하고 질질 끌려가던 에쉬는, 레이니드에 의해서 서재 밖으로 쫓겨나 버렸다. 그러더니 레이니드 본인은 다시 안으로 들어와 문을 쾅! 닫는다.

당연히 둘이 같이 나가버릴 줄 알았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레이니드와 단둘이 서재에 남게 되어 괜히 긴장이 되었다.

“나한테…… 할 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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