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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25)화 (26/113)

25화

역시. 두 사람이 평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에서부터 깍듯한 식사예절도. 배우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특히 에쉬의 태도는 더욱더 그가 귀족이었음을 확신하게 해줄 만큼 완벽했다.

굳이 숨기려고 하진 않았던 것 같으니 비밀로 하려던 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건 어렴풋이 눈치채긴 했었지. 그럼 어느 가문인지도 들었어?”

“우리 왕국은 아니랬어. 자세하게 알려주진 않았는데, 그 목장이라는 것도 일반 목장은 아니라더라.”

우리 가문처럼 영지를 가지고 있는 가문일 터. 그럼 그가 말한 목장이라는 것 자체가 영지임이 분명하다.

어제 파빌리엔이 목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에쉬에게 정강이가 걷어차였다. 왜 에쉬는 내게 그 목장이라는 것을 숨기고 싶어 했을까?

‘혹시……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주 잠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에쉬가 회복을 마치고 나를 떠나갔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황실에 큰 이변이 일어났다. 그 끔찍한 소식이 전해진 건 그로부터 두 달 뒤이긴 하지만, 황실에서 쉬쉬했던 거라면 소문이 늦게 퍼졌을 수도 있고.

[에쉬……. 당신 가족들이 당신을 찾지 않을까요?]

[아쉽게도 모두 잃었습니다.]

선황이 승하하신 건 4년 전. 지금 황좌를 찬탈한 3황자의 어머니가 우리 비엔트 왕국의 몰락 귀족이라고 했지. 혹시 그 황자의 난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의 고향인 우리 왕국에 와있던 건 아니었을까?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후계 수업을 받았었습니다.]

후계 수업. 그건 귀족의 후계자나 할 법한 말이었다. 왜 그때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 검, 언제부터 차고 있던 거예요?]

[아버지 유품입니다.]

그가 항상 지니고 있는 그 검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값비싼 문양과 보석이 박혀있었다. 그 검 하나의 값을 치자면 웬만한 영지 하나를 사들이는 건 문제도 아닐 정도로.

‘진짜…… 그가 황족일까? 후계자였다면, 진짜 3황자?’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의 관을 쓴 3황자는 변태에 잔인한 또라이라고 했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침실로 끌어들이는 양성애자에 피를 좋아하는 괴물이다. 그건 에쉬와 조금도 맞는 성향이 아니다.

하마터면 에쉬에게 실례되는 누명을 뒤집어씌울 뻔했다. 그 제국의 황실과 연관되었다 하더라도 제국 고위 귀족가의 후계자 정도겠지. 지금 그 엉망인 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기 싫어서 파빌리엔에게 가주 자리를 넘기고 온 걸지도.

무엇보다 3황자의 나이가 올해로 스물일곱. 에쉬는 스물넷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일 거다. 게다가 황제씩이나 되면서 미치지 않고서야 그 최고의 권력을 여자 하나 때문에 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만약 에쉬가 황족이라면 파빌리엔도 황족일 텐데, 파빌리엔은 암만 봐도 황족 특유의 분위기가 전혀 없으니까.

“브링. 그거 말고 또 들은 이야기 없어?”

“음? 어…… 그냥 취한 비엔이 주절주절 한탄을 늘어놓던 게 대부분이라.”

“대체 와인을 얼마나 마셨으면 취해?”

“걔 진짜 약하더라. 원래 술을 못 마시는 것 같은데 어제 좀 홧김에 들이부은 거라서 금방 눈이 풀려버리더라고.”

에브린의 뺨이 발갛게 물드는 걸 봐서는 어제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큰 사달은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 이상 묻지는 말아야겠다.

“알려줘서 고마워. 에쉬가 귀족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 평민이었다면 에쉬를 겨냥한 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을 거니까. 괜히 상처를 받을 일은 없겠어.”

식사도 끝났고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가 그대로 엉덩이가 의자와 다시 맞닿았다. 근육통이 아니라, 근육이 전부 사라진 것처럼 내 의지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후, 정말 민망해 죽겠네.’

입술을 잘근 씹으며 에브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자, 알만하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나를 부축해주었다. 다행히 부들부들 떨리긴 했어도 걸을 수는 있었다. 아까는 진짜 발을 바닥에 딛고 서지도 못할 정도여서.

“갓 태어난 새끼 사슴도 너보단 잘 걷겠다.”

“걘 네 발로 일어서잖아.”

“대체 얼마나 과한 사랑을 받으면 이렇게까지 만신창이가 되는 건지 궁금해지네.”

핀잔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에브린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우리는 응접실로 건너와 티타임을 가졌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었다가 정색하다가 얼굴을 붉히던 시간을 보내고 거의 차를 다 마셔갈 무렵.

“슈아. 다녀왔습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에쉬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내게 바로 다가와서는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그걸 정면에서 반강제로 마주하게 된 에브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닌 척해도 부러운 걸 숨길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 상황은 어떻게 해결되었어요?”

“영지민이 붙잡은 이는 도둑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제 발 저려 나타난 진짜 좀도둑을 잡아들이긴 해서 증거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엄한 사람이 도둑으로 몰렸다는 건가요?”

“그것이…….”

뭔가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 있었나 보다. 그가 말을 고르는 듯 생각에 잠기며 내가 앉아 있는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워.’

두피에서 전해지는 찌릿찌릿한 느낌이 목과 어깨에 퍼져서 움찔거렸다. 그게 또 은근히 기분 좋은 자극이라서 나른하기도 하다. 머리카락을 만져주면 이런 기분이구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때의 기분과도 같았다.

“그런데 파빌리엔은 왜 같이 안 들어왔어요?”

뒤늦게 에쉬 혼자만 응접실로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물었다. 그러자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살살 긁는 에쉬가 답지 않게 머뭇거린다.

“그…… 좀도둑으로 오인 받은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지금 그 아이와 같이 있어서.”

“여기까지 데려왔다고요?”

“송구하지만 그 아이, 그러니까…… 그게…….”

뭔가 입에 담기 어려운 이야기라도 있는지 말을 잇지 못하는 그가 수상해진다. 설마 아는 사이인 걸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추궁했다.

“그 아이, 당신의 숨겨진 아이라도 돼요?”

“아닙니다.”

딱 잘라 부정하는 걸 보니 다행히 우려했던 상황은 아닌가 보다. 에쉬는 방금 물음을 곱씹었는지 뒤늦게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간혹 그런 오해를 받긴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에게 듣게 되니 아버지가 더욱더 미워지는군요.”

“……아버지? 그럼 설마 형제인 거예요?”

“정확히는 배다른 제 여동생입니다.”

여동생이라니. 에쉬에게 여동생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분명 남동생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남동생이 하나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을까?

배다른 여동생이면,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내통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뜻일 터. 같은 가족 취급을 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를 알아갈수록 양파껍질 벗기는 기분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줘요.”

“파빌리엔이 저를 찾아가겠다고 했던 그날 몰래 뒤를 따라 나왔다고 하더군요. 한눈판 사이에 파빌리엔을 놓쳐버려서 일단 여기 마르엘 영지로 방향을 잡아, 파빌리엔보다 이틀 일찍 도착했답니다.”

“어떻게 파빌리엔보다 이틀이나 먼저 도착할 수 있는 거죠?”

“그 녀석, 웃기게도 길치거든요. 지난번 가문의 사유지로 들어온 것도 방향을 한참 잘못 잡아 빙빙 돌았던 거랍니다.”

길치라니. 내 어머니도 길치였는데. 첫째 언니는 지금도 가끔 왕궁에서 길을 잃을 정도라 혼자는 절대 못 다닌다고 했건만. 여기 또 길치가 있었을 줄이야.

“아무튼 그 아이가 하필 도착하던 날에 이곳에서 금화주머니를 도둑맞았고, 그 도둑을 잡기 위해 좀도둑인 척 연기를 했다고 하던데. 하여간 그 아이 덕분에 진짜 도둑을 잡게 되었긴 했지요.”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 굴로 뛰어든 거군요. 쉽지 않은 생각인데.”

“좀 영악한 면이 있기도 하지요. 워낙 저를 잘 따르던 아이긴 했는데…… 설마 그런 무모한 짓을 시도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여동생에 대해서 말하는 에쉬의 목소리에는 파빌리엔을 대하는 것처럼 서늘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동생이어서일까? 그래도 나 같으면 배다른 여동생보다는 같은 피가 섞인 남동생이 더 애틋할 것 같은데.

역시 남자 형제끼리는 절대 가까워질 수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건가.

“그 아이, 어디 있어요? 보고 싶은데.”

“파빌리엔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중입니다. 그 아이가 조금 무례하게 굴어도 이해해주십시오. 하늘 아래 자기보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는 없을 거라고 착각하는 건방진 꼬맹이라서요.”

“몇 살인데요?”

“열다섯 살입니다.”

나이 차이가 꽤 난다. 그의 어머니가 십사 년 전에 돌아가셨다더니, 그럼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얻은 딸이라는 건데. 만약 내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통해 동생을 얻었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끔찍해.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응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파빌리엔의 등에 달라붙은 작은 여자아이가 고개만 빼꼼 내밀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어머?’

진짜 에쉬와 약간 닮긴 했다. 외형은 하나도 똑같지 않은데 이목구비가. 역시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앳된 소녀의 아름답게 찰랑거리는 백금발은 폭포수처럼 구불구불 흘러내렸다. 파빌리엔과 똑같은 푸른 눈동자는 폭포수를 가득 담은 호수처럼 깨끗하고 맑아 보였다. 귀엽다기보다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소녀였다.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소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였다.

“반가워요. 우리 백작저에 방문한 것을 환영합니다.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그러나 소녀는 내 물음에 입하나 뻥끗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있는 쪽으로 우다다 뛰어와서는 에쉬의 품에 폭 안겨서 다시 나를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건 불쾌감을 가득 담은 경계의 눈초리였다.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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