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23)화 (24/113)

23화

“나, 크흠, 어떻게…… 된 거예요?”

목이 조금 쉬어 갈라진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만큼 그의 아래 깔려 앙앙 울었다 생각하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민망함에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는 내가 그저 귀엽다는 듯 뺨에 쪽 입을 맞춘 그가 나를 꼭 끌어안아서는 그대로 나란히 눕는다. 서로의 몸이 맞닿는 이 느낌이 참 좋기는 하다.

“당신이 죽은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내가 너무 심하게 몰아세웠나 싶어 미안한데, 나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나도 내가 죽은 줄 알았어요. 나, 오래 잠들어 있었나요?”

“얼마 안 되었습니다. 방문 밖에 놓인 찻주전자가 식어서 집사가 뜨거운 물을 새로 담아 가져다주었는데 다시 미지근하게 식었을 정도?”

“밖에…… 밖에 뭐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다가 기억 한 자락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식사를 끝내고 그의 방으로 오기 전, 하녀에게 차를 가져다 달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차마 방해하진 못하겠어서 그냥 문 앞에 두고 가버렸을 하녀의 입이 제발 무겁길 바랄 뿐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쉬는 몇 번이나 꽉 끌어안다가 놓아주기를 반복하면서 이마와 머리카락에 쪽, 쪽, 뽀뽀를 연신 하고 가만두질 않았다. 예쁜 인형을 선물 받았을 때 내가 했던 행동과 아주 흡사했다.

“정말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하군요. 아, 정정. 이대로 죽으면 억울해서 눈조차 감지 못하겠고. 음…… 어머니의 유언조차 뒤로하고 미련 없이 내 행복을 찾으러 온 것이 조금도 후회되질 않을 정도?”

“어머니의 유언이요?”

“좀 모자란 동생이지만 어머니께서 그 녀석을 제법 애정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녀석을 혼자 남기고 떠나게 되어 마음이 쓰이신다고 하실 정도로.”

어머니가 파빌리엔만 편애한 건가? 에쉬가 질투를 하거나 불쾌하다거나 실망한 느낌이 없는 것 같아서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쉬는 믿을 만한 아들이었나 봐요?”

“전 무엇보다 건강했거든요. 하지만 그 녀석은 어렸을 때 몇 번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난 목숨인지라.”

“무슨 일로……?”

“워낙 몸이 약해 병치레도 잦았습니다. 조산으로 태어나기도 했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멀쩡해 보이는데. 하긴 부모는 자식이 어릴 때 아프면 커서도 걱정한다더라. 내가 가끔 아파서 앓아누울 때마다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나지 못했을 정도니.

“아픈 건 누구의 탓도 아닌데. 부모님들은 그게 자신들의 탓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에쉬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요.”

“그렇지요. 누구의 탓도 아니지요. 하지만 정작 아픈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녀석, 어릴 때부터 천식을 앓았는데 그건 어머니의 지병이기도 했거든요.”

“아……. 파빌리엔이 어머니를 원망했군요.”

“그런 놈을 혈육이라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것도 모자라 제게 녀석을 부탁하고 가셨으니……. 저는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사지 멀쩡하게 잘 큰 남자 녀석을 거둘 만큼 여유롭지도 않고 말입니다.”

왜 에쉬와 파빌리엔의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은지 이해가 되었다. 내가 방금 들은 건 단편적인 거니 그 이외에도 서로에게 쌓인 감정이 많겠지. 그의 말대로 파빌리엔도 이제는 완전한 성인이고, 에쉬가 자신의 목장까지 넘겨주었으니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다.

나를 향한 그 감정만 무탈하게 정리된다면.

“그래도 형제잖아요. 혈육은 싸워도 혈육이라던데. 나는 두 사람 사이가 완만하게 해결되길 바라요.”

“그 녀석 보기보다 집요해서 아마 당신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나도 마찬가지고요.”

손가락으로 내 턱을 슬쩍 들어 올린 그가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짧은 입맞춤만 하고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리고 그 겨우살이 아래에서 맹세했던 이후로 나는 절대 포기 못합니다. 그 녀석은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끊어진 인연일 뿐. 쉽게 말해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 바뀐 것뿐입니다.”

나를 향한 진지한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맹목적인 시선을 마주할 때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심장에 담긴 나에 대한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크기가 아닐까 하는.

자신의 마음을 단호하게 고백한 그가 회색빛의 눈꺼풀을 내리깔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 뺨을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감싸 쥐며 눈두덩 위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남겼다.

“내 목숨을 당신께 바치기로 했던 것을 기억합니까? 나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신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슈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도 사랑해요. 당신이 죽으면 나도 살지 못할 만큼. 그러니까 꼭 나를 위해 끝까지 살길 바라요.”

“그 명령, 받들겠습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나의 부모님처럼 사랑하고 싶었다. 그저 나란히 서 있기만 해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서로에 대한 애정이 흘러넘치는 그런 사랑을.

내가 그를 어머니가 보내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와 함께라면 부모님보다도 더 애틋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와 함께라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두렵지 않았다.

한평생 함께할 배우자로 그처럼 완벽한 상대는 또 없을 것이다.

‘밤일 능력도 대단하고.’

아무리 첫날밤이라고 해도 정사 도중에 기절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정신을 놓을 만큼 약한 편이라고는 생각하진 않고.

더군다나 내가 쾌락에 취해 미칠 때에도 그는 지치지 않는 체력을 자랑하며 나름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다리 아프다고 찡찡거리지만 않았다면 오늘 나를 재우지 않았을 수도.

그 순간 아랫배가 꽉 조여지면서 허리가 움찔 떨렸다.

“으…….”

“슈아?”

내게 뽀뽀 세례를 퍼붓던 그가 내 반응을 보고 놀라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살핀다. 붉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주섬주섬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그를 마주 보고 옆으로 누워있는 나를 엎드리게 자세를 고쳐주었다. 갑자기 왜? 라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 그가 내 허벅지 위에 앉아서 두 눈을 파르르 떨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러나 그 설마가 사람 잡았다.

“당신이 잠들어 있던 사이에 고민을 해봤는데, 다리가 아프지 않게 하는 방법 중에 가장 무난한 체위는 이것이더군요.”

“아니, 지금 당장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

“왜요? 싫어요? 하지 말까요?”

“으…….”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고.”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이대로 내어주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데 몸은 정직하게 그를 원한다는 듯 다리 사이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상반되는 생각이 서로 주먹다짐을 하며 충동질하는 사이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심란한 나와 다르게 아주 기분 좋다는 듯 뜨거운 숨을 흘리기까지.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침대시트에 뺨을 대고 몸에 힘을 쭉 뺐다. 이성이 암만 발버둥을 쳐도 육체의 쾌락을 이길 수 없다고 아주 시원하게 결론 내렸거든.

“나 내일은 무사히 걷고 싶어요. 걷게만 해줘요.”

“허락해주는 겁니까?”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해요. 빨리.”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베개를 하나 집어다가 골반 아래에 쑤셔 넣었다.

“슈아. 지금 이 모습, 정말 아름다워요.”

“윽, 그런 말은 부끄럽단 말이에요!”

“모르는 소리. 이건 부끄러워할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이 그만큼 내게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겁니다. 당신의 나체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해요.”

그에게는 여자의 심장을 녹이는 재주가 있다. 어쩜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건지.

쑥스러워서 애꿎은 침대보만 꾹꾹 말아 쥘 때, 다시 자리를 잡은 그의 것이 나를 가득 채운다. 짜릿한 희열이 내 정신을 한순간 덮쳐버렸다.

황홀한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

“슈아, 좋은 아침! 아니, 좋은 점심인가? 무튼 무사히 잘 살아 돌아와서 반갑네!”

식당에 먼저 와 앉아 있는 에브린의 외침이 실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덕분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두 팔로 나를 가뿐히 안아 들고 있는 에쉬의 어깨에 뺨을 파묻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내가 에쉬의 방에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눴다는 것을 에브린이 예상하고 있음을. 또 에쉬가 나를 잠재우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하나, 에브린이 나를 만나면 절대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다 들어맞는지.’

어디서부터 실수한 걸까? 겁도 없이 에쉬를 유혹한 게 문제였나? 에쉬가 스스로 꽉 쥐고 있던 본능의 고삐를 내가 풀어헤쳐서? 그를 말리지 못한 육체의 쾌락이 문제였을까?

어쨌든 결론은 전부 다 내가 선택해서 얻은 현실일 뿐이다. 에쉬의 저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표정도. 어깨를 들썩거리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음흉하게 웃고 있는 에브린의 짓궂은 태도도.

그리고 그 옆에서 벌레 씹은 표정으로 삐딱하게 앉아 있는 파빌리엔의 짜증 가득한 얼굴도.

“배가 많이 고프지요, 슈아? 바로 식사부터 내오라고 했으니 조금만 참아요.”

눈앞에 앉아있는 두 남녀를 유령 취급하는 에쉬가 사근거리며 나를 식탁 의자에 조심히 앉혀둔다. 여전히 제구실을 하지 못해 아무렇게나 놓인 내 두 다리를 그가 똑바로 모아 가지런히 두었다. 마치 내 몸에 붙어있는 남의 다리 같았다.

‘내가 어제 걷게만 해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