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에브린도 짐 정리를 도와주느라 바쁜 것 같고. 이참에 에쉬와 단둘이 시간을 좀 보내야겠다. 그래서 나는 하녀에게 차를 준비해 달라 부탁하고 2층으로 함께 올라가 새로 내어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실은 괜찮아요? 부족한 게 있다면 말해요. 불편한 걸 참지는 말고요.”
“당신이 없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곳입니다.”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등 뒤에서 나를 조심히 끌어안는다. 따스한 온기가 내 몸을 전부 뒤덮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날이 더운데도 불구하고 그와의 밀착이 부담스럽지 않다.
“나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곤란하면 답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곤란해지는 질문입니까?”
“그럴 것 같아서요.”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건 물어봐도 된다는 의미겠지? 굳이 답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으니까 선택은 그가 할 테고.
“파빌리엔하고 쌍둥이예요?”
“아닙니다.”
아니라면, 어떻게 같은 해에 동생이 생길 수 있을까? 정말 배다른 동생일까?
“에쉬는 부모님 중에 누굴 닮았어요?”
“질문이 하나가 아니군요.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파빌리엔이 더 어머니를 닮긴 했지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제가 전부 물려받긴 했지요.”
그럼 둘이 어머니는 같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다른 형제일 가능성이 크다.
“에쉬 어머니께서 굉장히 미인이셨나 봐요. 뵙지 못해서 아쉽네요.”
“당신은 부친을 더 닮은 것 같더군요. 백작께서 젊을 적에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영지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던데.”
“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꽤 많은 여자를 울렸다고는 들었어요. 그런데 에쉬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그와 이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특히 그의 목소리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기분 좋은 저음인데, 간혹 작정하고 나를 유혹할 때면 내 귀와 심장을 크게 뒤흔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울리고 싶은 상대는 유일하게 딱 한 사람. 침실에서 슈아 당신이 쾌락에 취해 우는 모습을 매일 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귓가에 가까이 대고 중얼거리는 그의 거친 숨소리에 온몸의 감각들이 다시금 일깨워져 곤두세워진다. 쾌락에 취해 우는 모습이라니. 듣기 민망해서 그런지 아랫배가 묘하게 수줍어하듯 꿈틀거리는 야릇한 느낌이 전해졌다.
조금 전 정원에서의 뜨거웠던 키스로 인해 찌릿했던 감각이 다시금 정수리까지 치솟아 올라 정신이 아득해진다. 몸에서 열이 나는 건 날이 더워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에쉬…….”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사람이 아님을 나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그를 사랑했던 게 아니었다. 그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인 행복이 사랑으로 변한 거다. 항상 나를 향해있던 그의 집요한 눈빛이. 억누르고 억눌러왔던 감정을 서로 더는 숨길 수가 없던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사랑이 완성된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에쉬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여 입술을 가볍게 얹었다. 더는 누군가 방해한다 해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쾌락에 취해서 울게 해줘요. 나를. 당신 뜻대로.”
내 속삭임이 그의 가슴 안에 있는 짐승을 깨운 시발점이라는 사실도 솔직히 기뻤다. 그때만큼은 그가 오로지 나만을 생각해주는 시간이니까.
다시 황홀한 키스를 이어가던 그가 분주하게 손을 놀려 드레스를 벗겨냈다. 그리고 나를 안아 들어 침대에 앉혀두고 내 위로 올라탔다.
“읏, 아…….”
내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고 간지럽게 핥더니, 귓불을 살짝 깨물고 입술로 물어서 쪽 빨아낸다. 그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성감대가 되어 굉장히 자극적으로 와 닿는다.
“오늘은 지난번처럼 중간에 그만두진 않을 겁니다.”
“그러려고, 그 약 사다 놓은 거 아니에요? 나도…… 하아, 바라는 바가 아니라서, 으응……!”
생경한 쾌감이 정신마저 뒤흔들어 눈앞이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쾌락이라는 게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건 알겠다. 몸이 전부 터져버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갈증에 마음이 더욱더 조급해졌다. 허벅지 안쪽이 미친 듯이 간지럽고 허리가 배배 꼬여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게 되는 그런 이상한 기분.
그가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귀여워. 내게 취하는 그 표정이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데, 나만 볼 수 있어서 굉장히 기쁩니다.”
“나도, 당신이 흥분하는 거 보고 싶은데…… 흣!”
“그건 나중에. 오늘은 양보 못합니다.”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기쁘게 웃는 그의 표정만으로도 흥분감이 치솟아 오른다. 뜨거운 숨결이 피부에 내려앉는다.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에쉬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시니까. 너무도 관능적인 눈빛에 차마 그걸 쳐다볼 수가 없어서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또 긴장했나 보네. 편안하게 힘 빼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힘들고 당신도 괴로워질 겁니다.”
“읏, 네…….”
이 순간을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 지난번처럼 그저 아프기만 한 게 아니라 서로 더 진하게 교감이라는 걸 나누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의 말대로 긴장 대신 그 모든 감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호흡을 고르며 몸에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잠들 때처럼 목과 어깨부터 나른하게.
“잘했습니다. 그 감각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해주길 바라요.”
흐뭇하게 웃는 그가 중얼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낯선 감각이 기분 좋게 스며들어 서서히 숨이 차올랐다.
“좋아요?”
“네, 좋아요……. 아아…… 당신이 해주는 건, 다 좋은데…….”
“더 좋아질 겁니다. 손으로 여길 이렇게 잡아요.”
그가 침대시트를 바짝 말아 쥐고 있는 내 왼손을 끌어내려 왼쪽 허벅지를 감싸도록 유도했다. 뭔가 더 의지할만한 것이 생겨서 편해진 것 같기는 한데.
“힉!”
순간 눈앞에 별빛이 보였다. 따끔하면서도 강한 자극이 생성되어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숨이 턱 막힌다. 이성이 탈곡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느낌이다. 찌릿한 자극이 점차 강한 전율로 뒤바뀌어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아프면서도 아찔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신음이 교성으로 바뀌는 것도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감촉과 모든 감각을 붙잡아 확인할 새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두 눈을 꾹 감고, 곤죽이 되어가는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황홀한 열락에 빠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겠지. 이대로 숨이 멈춰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강렬한 쾌감이다.
그때 다행히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몸에 남은 자극이 너무 강해서 떨림이 멎질 않았다.
“그렇게 좋았습니까?”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손가락이 닿아 또 움찔, 신경이 제멋대로 반응을 보여 버렸다.
그는 그저 만족스럽다는 듯 배부른 맹수처럼 능글맞게 웃기만 했다.
“평소의 당신과 쾌락에 취한 당신은 너무 판이해서 기분이 이상합니다. 이성이 무너져가는 당신이 한 줄기의 희망처럼 나를 꼭 붙잡고 있는 것도 상당히 마음에 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싶다가도 움직이는 그의 시선을 좇아가 보니, 내 허벅지를 고정하고 있는 그의 팔뚝을 붙잡고 있는 나의 오른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마나 세게 붙잡았는지 그의 매끄러운 팔뚝에 내 손자국이 빨갛게 새겨져 있었다.
문제는 손자국이 아니었다. 그 위로 내 손톱에 찍히고 긁힌 곳이 군데군데 빨간 상처로 남아 부어있었다는 거다.
“아…… 미, 미안해요. 어떻게……. 약을 가져와야…….”
“어딜 가려고.”
그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려고 일어나려던 찰나, 그가 내 팔을 다시 잡아 뺐다.
“에쉬?”
“이 정도는 상처도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약을 발라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고.”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 버렸다. 노골적인 시선에 아랫배가 뜨거운 기운으로 들끓어 올랐기 때문이다.
“슈아. 당신 베개 밑에 약통이 하나 있을 겁니다. 꺼내주겠습니까?”
머리와 등을 기대고 있는 베개 아래로 손을 집어넣자, 동그란 원형의 딱딱한 무언가가 손가락에 걸렸다. 그것을 꺼내 살펴보자 이상하게 낯익은 통이다.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귀족들이 첫날밤에 사용한다는 진통제인데 투명한 크림형으로 되어있답니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말해도 되나……? 사실 그거, 당신의 친구 분께서 주셨습니다.”
……왜 민망한 건 나의 몫인지. 에브린은 대체 이런 걸 왜 가지고 다니는 거람?
“아, 그게 상처 지혈에도 효과가 좋아서 늘 가지고 다니는 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덧붙인 이야기긴 하지만요. 미약 같은 건 섞지 않았으니 안심하라고 하더군요.”
“그, 그랬군요.”
나는 모르는 척 그에게 약통을 넘겨주었고, 그가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미끈한 약을 손가락으로 잔뜩 퍼내 발라주었다.
약간 서늘한 액체가 나와 그의 체온에 의해 서서히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이상한데?’
지난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좋은 건 둘째 치고 너무 화끈거렸다. 진통제의 역할은 통증을 줄이는 거 아닌가?
무뎌져야 할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에쉬, 이거 아닌 것 같…… 으흑!”
“슈아?”
미약 같은 건 들어있지 않다더니! 이건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