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정원을 벗어나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나도 에브린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어색해서 데면데면하다가 식당의 기다란 테이블에 나란히 착석한 뒤, 식전주로 나온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에브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는다.
“정말 볼 때마다 적응 안 돼. 그렇게 철벽녀로 유명한 우리 슈아가 남자한테 키스해달라고 매달리다니.”
“……어, 어디서부터 본 거야?!”
“두 사람이 겨우살이에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 줄은 또 몰랐어. 그나저나 그 사람 되게 웃기다? 나하고 비엔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이나 하고.”
그새 파빌리엔을 애칭으로 부르다니. 그것도 어이없지만 나는 두 사람이 그렇게나 일찍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에쉬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비엔이 그러더라고. 자기 형님은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라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따라붙는데도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래. 한 마디로 우리가 몰래 뒤따르는 걸 알면서도 너한테 키스를 한 거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에쉬가 당황하지 않았구나. 모른 척한 건 역시 파빌리엔에게 우리 사이가 이만큼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테고.
“왜 웃어, 슈아? 이게 웃긴 일이야?”
“너무 귀여워서.”
“……누가 귀여워?”
“에쉬 말이야. 꼭 꾀부리는 여우 같다가도 듬직한 늑대로 돌변하기도 하고. 하여간 왜 이렇게 귀여운지.”
내 말을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에브린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랑이 정말 무섭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쟤 눈에 저렇게까지 콩깍지를 씌려면 상대가 얼마나 여우짓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런 말은 속으로만 해. 다 들려.”
연신 툴툴거리는 에브린을 무시하고 나는 향긋한 와인을 음미했다. 오늘 밤에 있을 그와의 뜨거운 역사를 어떻게 하면 잘 치를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식사가 막 나오기 시작했고, 때맞춰 에쉬와 파빌리엔이 함께 들어왔다. 다행히 서로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히 들어왔지만 에쉬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서 앉아요, 두 사람.”
내 안내를 받아 두 형제가 맞은편에 나란히 앉는다. 원래 형제들끼리 사이좋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듣기는 했지만. 막상 직접 보니 조금 안타깝기도 하다.
우리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도 연년생이라 잘 지내다가도 툭하면 싸웠다더라. 나는 워낙 나이 차이가 있는 막내에다가 싸움을 싫어해서 그런 적은 없지만.
아마 그 평화주의가 생긴 이유는 두 언니가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면서 싸우던 장면을 목격한 충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각자 결혼한 이후부터 둘이 서로 의지하고 잘 지내니 혈육은 혈육인가보다 싶기도 하고.
“일단 식사부터 해요. 멀리서 온 손님이 계시니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는 했는데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정체 모를 외부인을 저택에 끌어들이고 식사까지 챙겨주는 거,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잘 먹겠습니다.”
이제 보니 웃으면서 정곡을 찌르는 건 원래 성격인가 보다. 딱히 악의적인 느낌은 아닌데 예쁘게 말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고. 누가 에쉬와 형제 아니랄까 봐 솔직한 건 둘이 똑같다.
“오해하지 마요. 당신이 에쉬의 남동생이기 때문에 손님으로 생각해주는 거지, 만약 그게 아니었으면 아까 우리 사유지에서 당신 목이 댕강 잘렸을 거예요.”
“……쳇.”
예쁜 얼굴을 하고 입을 오리 주둥이처럼 댓 발 내민 파빌리엔이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투덜거리고는, 앞에 놓인 음식에게 분풀이하듯 격정적으로 흡입한다.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사람처럼 집중하는데, 에브린이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라.
‘또 슬픈 짝사랑의 시작인가.’
하필 내게 흑심을 품은 남자라서 괜히 씁쓸했다. 만약 둘이 잘되면…… 에브린이 나와 동서지간이 되는 건가? 그건 또 그거대로 흥미롭겠네.
“파빌리엔은 몇 살이에요?”
“스물넷, 윽!”
정신없이 먹다가 내 물음에 대답하던 파빌리엔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면서 어깨를 바르르 떤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이를 악물고 나직하게 대꾸한 그가 평온하게 식사를 이어가는 에쉬를 찌릿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스물네 살이라고? 파빌리엔이?
분명 에쉬도 스물네 살이라고 했다. 그럼 둘이 동갑이라는 거다. 그럼 쌍둥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진짜, 어머니나 아버지 쪽이 다르다거나?
‘아니야. 혼자 넘겨짚진 말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서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언제고 때가 되면 에쉬가 다 설명해주는 날이 오겠지. 어두운 가족사가 있기 때문에 감추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와 새 출발을 하려고 마음먹은 건 아주 큰 결심이었을 테니까.
“음식은 좀 입에 맞나요?”
“방금 정강이를 걷어차여서 그런지 입맛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마르엘 백작저의 요리사 솜씨는 제법이군요. 꽤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말이죠.”
아까 그게 정강이를 걷어차여서구나. 진짜 형제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아주 살짝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익숙하게 받아들인 파빌리엔이 다시 식사를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별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
“더 해가 지기 전에는 출발해야 다음 마을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괜찮다면 마차를 타고 가시겠어요?”
“……저 말입니까?”
후식으로 나온 차가운 푸딩을 맛보고 있던 파빌리엔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뒤늦게 대꾸한다.
“여기 손님이 당신 말고 또 누가 있나요?”
“오늘 당장 갈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못갑니다. 아직 형님과 해결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서요.”
그때까지 평온함을 유지하던 에쉬의 얼굴에 쩍,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꺼져가던 벽난로의 불 위에 다시 기름을 퍼부으면 이런 느낌일까?
살벌하게 가라앉는 에쉬의 서늘한 눈빛을 바로 맞은편에서 마주하게 되어 오싹 소름이 일었다. 오늘 에쉬의 여러 숨겨진 모습을 보게 되어 느낌이 색다르긴 하지만, 저런 무서운 표정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내게는 그렇게나 한없이 다정하게 웃어주기만 하던 남자라서.
여기 더 머물겠다는 파빌리엔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그런 내 마음도 몰라주는 에브린이 두 손뼉을 짝 맞추며 눈치 없이 끼어든다.
“그럼 손님방을 내어주면 되겠네! 나야 어차피 네 방에서 너와 같이 생활하니까 그 방을 비우면 되지. 내 짐을 빼는 건 내가 집사에게 직접 전달할게!”
“어? 브, 브링! 잠깐……!”
내가 미처 붙잡기도 전에 에브린은 벌떡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이게 아닌데. 손님이 머무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머무는 손님이 누구냐가 제일 큰 문제라고!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에브린조차 나를 도와주지 않는구나.
에쉬는 반쯤 먹은 푸딩을 노려보더니 포크로 푸딩을 사정없이 푹푹 쑤시며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보이기까지.
“나와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있었던가? 난 할 말을 다 전달한 것 같은데.”
“그건 형 생각이고.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잖아? 대화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다시 배워오지 그래?”
“파빌리엔.”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형이 물려준 그 자리,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하기도 싫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나를 뜻하는 거겠지? 에쉬가 맡았던 목장을 파빌리엔에게 넘겼는데 거부하는 상황인가 보다. 그럼 지금 목장은 또 방치 중일 테고. 에쉬는 절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고.
에쉬가 골머리 썩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대책 없이 여기까지 찾아와 투정을 부리는 남동생이 얼마나 답답할까.
또 한편으로는 파빌리엔도 이해가 되었다.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은 것도 모자라 마음에 품었던 여자까지 빼앗겼으니 억울하겠지. 에쉬 앞에서는 이런 말 절대 못하지만.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한 뒤에 침착하게 두 사람을 중재했다.
“좋아요. 손님이 머무는 것을 허락하겠어요. 하지만 목장을 오래 비우면 또 크게 탈이 날지도 몰라요. 동물들에게 먹이도 주어야 하고 돌봐야 하는 중요한 일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라도 보내도록 해요.”
“……그 목장이 동물을 기르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악! 야!!”
분명히 들었다. 무언가를 묵직하게 콱! 밟는 소리를. 에쉬가 파빌리엔의 발등을 무언가로 내리찍었고, 생각지도 못하게 또 당한 파빌리엔의 울분 어린 외침이 실내를 울린다. 이번에는 진짜 아팠는지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달려있어서 조금 불쌍하기도 하고.
그런데, 왜 자꾸 파빌리엔의 말을 막는 걸까? 궁금해지게.
“씁, 아이씨……. 겁나 아프네. 형이라는 놈이 동생을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만날 이런 식으로 괴롭히기나 하고!”
“그렇게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네가 더 문제라는 생각 안 하나? 하여간 철딱서니 없는 놈.”
짓씹듯 나직하게 중얼거린 에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다정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목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관리인이 따로 있어서요. 저 녀석이 머물 수 있도록 당신이 허락했으니 굳이 내쫓진 않겠습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에쉬?”
“내겐 당신만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식사를 다 마친 것 같으니 아까의 티타임을 다시 이어가는 건 어떻습니까? 당신이 내어준 그 차를 다시 마시고 싶은데요.”
“그럴까요?”
하나 확실한 건, 이 두 남자를 붙여놓으면 안되겠다는 거다. 에쉬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건 굉장히 흥미롭긴 하다만 그가 상처를 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질 않았다.
‘나중에 에쉬가 외출하게 되면 파빌리엔과 진지하게 대화를 좀 나눠봐야겠어.’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이쯤에서 떼어 놓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에쉬와 함께 먼저 식당을 나섰고, 마침 분주하게 움직이는 집사를 불러다가 물었다.
“브링은 어디 있어?”
“손님방을 비우기로 했다 들었습니다. 오늘 오신 저 남자 분께서 머무신다고 하시던데, 정말입니까?”
“응. 에쉬의 남동생이야. 부족한 것 없이 잘 모시도록 해. 담당 사용인도 붙여두고.”
“아, 그러셨군요. 귀한 손님이니만큼 잘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