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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8)화 (19/113)

18화

“에쉬.”

나는 일단 에쉬의 팔뚝을 조심스레 잡으며 그를 불렀다. 남동생을 노려보던 그가 두 눈을 꾹 감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아까 대단한 살기를 내뿜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잠시 친구 분께 가 있어요. 이 녀석과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돌아가요. 당신을 찾아온 손님은 내 손님이기도 해요. 그리고 혈육에게 너무 매정해도 정 없어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쉬가 이만큼이나 경계하는 상대라면 정말 같은 혈육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세상 유일한 그의 가족이라 더 신경이 쓰였다.

또 원하진 않았으나 저 남자에게 빚이 있기도 하니까.

다행히 에쉬도 내 뜻을 존중해 나를 에스코트해서 에브린이 있는 어머니의 무덤으로 향했다. 아예 남동생을 무시하려고 작정한 것 같았지만. 그의 사적인 감정까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브링, 어머니께 인사는 다 했어?”

“응. 고마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더니 속이 후련하네. 부디 그곳에서는 평온하시길 바라.”

그새 울었는지 눈이 빨개진 채로 코를 훌쩍거리는 에브린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찍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 눈시울이 조금 촉촉하게 젖어갔다.

“그보다 손님이 왔어, 브링.”

“손님?”

방심한 채로 고개를 돌려 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에브린이 나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누구지? 하다가 옆에 서 있는 에쉬와 머리카락 색이 같다는 것을 눈치채고 번갈아 쳐다보더니 생각났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다시 내게 물었다.

“어! 어! 그때 그 남자, 맞지?”

“응. 브링도 기억하고 있구나. 그 사람 맞대. 그리고 에쉬하고…… 형제 사이인 것 같아.”

“……뭐? 형제?!”

뜻밖의 이야기에 에브린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돌아가자. 곧 해가 지니까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는 다시 어머니의 무덤에서 조용히 묵념을 한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내 옆에 에브린이 앉고 맞은편에 에쉬와 그의 남동생이 착석한 뒤, 마차는 조용히 출발하였다.

마차 안에서 나란히 앉은 두 남자를 보니 정말 닮긴 했다. 분위기는 완전 다르긴 하지만. 에쉬의 연갈색 눈동자는 순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반면, 그의 남동생이 지닌 푸른 눈동자는 아주 선명하여 날카롭게 느껴질 정도로 빛났다.

나를 향해 있는 그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말로만 듣던 에쉬의 남동생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것도 나와 짧은 인연이 있던 그 남자라니, 정말 세상이 좁다는 걸 새삼 느낀다.

저택에 도착해서는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서 세 사람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하녀가 간단한 간식과 차를 우릴 재료들을 함께 내왔다.

“지난번에 차를 대접한다고 했었는데 이제야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네요. 준비가 미흡하니 이해해주세요.”

“차보다는 와인이 더 좋지만, 아가씨께서 직접 우린 차라면 굉장히 의미가 있겠군요.”

남자의 말에 에쉬가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고는 코웃음을 친다. 정말 둘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남자는 에쉬의 따가운 눈빛 따위 아예 무시할 작정인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를 향해 흐뭇하게 웃기만 한다. 에쉬가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거 같기도 하고. 치미는 분노를 꾸역꾸역 참는 중인 것 같았다.

에브린도 두 남자의 묘한 기류를 흥미롭게 지켜보고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손으로 입을 슬쩍 가리고 에쉬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그쪽, 남동생한테 질투하는 거예요?”

에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부정하진 않고 고개를 살짝 돌려 헛기침을 하는 에쉬가 의자를 조금 더 옆으로 끌어 내 옆에 가까이 앉았다.

“질투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냥 기분 나쁜 놈일 뿐입니다.”

“왜 기분이 나쁜데요? 동생 분은 그쪽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마음에 들면 곁에 두고 키워보십시오. 얼마든지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남자는 그저 픽 웃으며 못 들은 척 쿠키를 하나 집어 오도독 씹어 먹는다. 자기를 물건 취급하는 형님의 말에도 그다지 기분 나쁜 기색은 없어 보였다.

자주 있는 일이여서 그럴까?

에쉬의 말에 에브린은 수줍게 어깨를 모으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교태를 부렸다. 여전히 예쁜 남자가 에브린의 취향인 모양이다.

나는 적당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찻잔에 우린 찻물을 담아 세 사람 앞에 놓아주었다.

“제가 즐겨 마시는 카모마일인데, 여기에 말린 과일을 더 추가한 거라서 보통 카모마일과는 맛이 조금 다를 거예요. 마셔보세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정중한 태도를 보아하니 그도 에쉬 만큼 예법이 몸에 밴 것 같았다. 조금 더 거만한 태도가 엿보이긴 해도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고는 한 모금 마시더니 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맛이 좋습니다. 일반적인 차와 다르게 단맛이 강해서 먹을 만하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에쉬는 어때요? 카모마일이 지혈을 막는 효능이 있어서 당신께는 권하지 못했어요. 혹시 괜히 상처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되어서요.”

“아, 그랬습니까? 조금 상처받을 뻔했습니다. 당신이 즐겨 마시는 차가 있었다니.”

“당신이 이곳에 와서 떠나던 날까지는 거의 마시지 않았어요. 저도 오랜만에 마시는 거예요. 우리가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워낙 부족했잖아요.”

그가 돌아온 날에는 그와 야한 짓을 하고 서로를 그리워하기 바빴지 않은가. 게다가 다음 날에는 에브린이 찾아오는 바람에 서로에 대해 알아갈 시간이 너무 없었다. 앞으로의 시간은 많기 때문에 조급하게 생각하진 않기도 했고.

그제야 에쉬의 굳은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듯 풀렸다. 그가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음을 그때 알았다. 그 불안함을 잠재워주려면 일단 그의 남동생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효과적일 터.

그래도 궁금한 건 물어봐야겠다 싶어서 테이블 아래에 있는 에쉬의 손을 꼭 잡아준 뒤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비엔’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파빌리엔’. 그게 저 녀석 이름입니다.”

에쉬가 덧붙여 말하는 걸 보니 비엔이라는 이름은 애칭인가 보다. 내 입으로 남동생의 애칭이 불리는 건 상당히 기분 나쁘다는 의미겠지.

나는 에쉬를 향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만나게 되어 감회가 새롭네요, 파빌리엔. 그럼 질문을 좀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에쉬를 만나러 온 거예요?”

“음…….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여기 온 목적이 정확히 뭔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제야 파빌리엔의 눈동자가 에쉬에게 향했다. 그러자 여전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에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이 굉장히 재미있다는 것처럼 삐뚜름하게 웃는 파빌리엔이 차를 한 모금 다시 음미하고는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기댔다.

“형님이 왜 내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는지, 그 이유를 최근에 알았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두 사람 결혼을 방해하러 왔습니다.”

“……왜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2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호감을 보이긴 했었는데, 그 짧은 만남 이후로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우리의 결혼을 방해하겠다는 건, 내게 특별한 마음이 있다는 뜻?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주시겠어요?”

“이년 전, 당신을 처음 보고 한눈에 반했던 쪽은 나입니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품었던 당신을 가로챈 건 형님 쪽이고요.”

짓궂은 장난질을 치려는 건가 싶다가도 에쉬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아서 혼란스러워졌다. 에쉬는 그저 파빌리엔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브린은 이 치정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듯 조용히 경청하면서 차를 홀짝거렸고.

‘곤란한 건, 역시 나뿐인 건가.’

에쉬가 동생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나는 파빌리엔과 그 어떤 정을 쌓은 적도 없었고, 내가 반한 쪽은 에쉬였으니까. 먼저 좋아한 쪽이 승자라는 법은 없다고 했고.

“참 이상한 말이군요. 제게 마음이 있었다면 왜 그 이후로 저를 찾아오지 않았나요?”

“왜겠습니까? 나라고 찾아가기 싫어서 가지 않았겠습니까?”

“물리적으로 누군가에게 발목을 잡혔다는 의미로 들리네요. 그게 에쉬라는 거예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변명할 말이 꽤…… 많아 보이는 눈친데.”

여유롭게 미소 짓는 파빌리엔을 따라 나는 고개를 돌려 에쉬를 쳐다봤다.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턱이 파르르 떨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맞춘다. 할 말이 많아 보이긴 했다. 그러나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한다.

일단 파빌리엔의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니라는 거네. 그렇다고 속았다는 기분이 들거나 배신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기 때문에.

“에쉬. 우리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할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도 나를 따라 일어섰다. 에브린은 말없이 손을 들어서 잘 다녀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나는 파빌리엔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하고 에쉬와 함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갈래요? 어디가 편해요? 정원? 아니면 내 방이나 당신 방으로?”

“정원으로 갔으면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긴 했어도 나를 보는 눈빛은 제법 강렬했다. 자신을 믿어달라는 것이 분명하다.

참 사람 마음이 이렇게 쉬운가 싶다. 그 눈빛 하나에 묵직하던 가슴이 제법 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나 놀랄 정도로.

‘정말 단단히 빠지긴 했나보다, 나.’

파빌리엔에게는 미안하지만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어도 에쉬를 향한 이 마음이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 같다. 다친 에쉬를 만나게 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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