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또 그런 부끄러운 말을 뱉어내면서 내게 윙크를 하는 에브린이 조금 얄밉기도 했다. 그렇게 저녁 식사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나는 바로 집사를 찾았다.
“에쉬는?”
“식사를 하시고 바로 나가셨습니다.”
“그래. 들어오면 나 서재에 있다고 전해줘.”
“예, 아가씨.”
그가 올 때까지 서류나 정리하고 있어야겠다. 몸이 여전히 이곳저곳 쑤시기는 하는데 그래도 적응한 것처럼 막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조용한 서재로 이동해 꽤 한참 동안 오늘 안으로 해결해야 할 안을 훑어보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있었는데.
“르슈아.”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기분 좋은 에쉬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바로 서류를 내려놓고 일어나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바로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면서 나를 와락 끌어안아 주었다.
‘아, 행복해.’
그의 널찍한 가슴팍에 파묻히는 기분도, 단단한 몸에 밀착되는 그 느낌까지도 사랑스러웠다. 반으로 뚝 잘라져 허전했던 기분이 한순간 가득 채워진 느낌이기도.
그가 없던 짧은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게 흐르던지. 사실 서류를 보면서도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창밖만 쳐다보게 되었다. 분명 읽었는데 바로 윗부분이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기억나질 않아서 다시 읽기를 반복하는 사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에쉬가 도착한 것이다.
“어딜 돌고 온 거예요?”
“북동쪽 메슬라 강에 다녀왔습니다. 최근에 비가 제대로 내리질 않아서 수위가 많이 낮아지긴 했더군요.”
“아. 맞아요. 그래서 올해는 흉년일지도 모른다고 다들 걱정이더라고요. 비가 와줘야 하는데 너무 건조해져서 산불도 조심하고 있어요. 게다가 또 역병이 다시 재발할까 봐 겁나고.”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일단 전체적으로 방역을 미리 해둘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준비는 해놨어요. 그전에 비가 내려주길 바라야죠.”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그게 에쉬라서 더 기뻤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서로 안고만 있어도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이렇게 행복하다고,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자랑을 하고 싶은 기분이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위에 누워도 이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 같다.
“당신은 친구와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까?”
“네. 아까 에브린이 좀 못되게 굴었지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 친구 분께서 당신을 아주 깊게 애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서 나쁘진 않았습니다. 좋은 친구를 두셨더군요.”
“맞아요. 좋은 친구예요. 에브린의 어머니와 저희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거든요. 우리도 그렇게 평생 가족 같은 사이로 남아있자고 약속도 했어요.”
“그렇게 될 겁니다. 꼭.”
그가 에브린의 행동에 불쾌해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면 곤란한 일이 생겼을 테니.
말은 저렇게 해도 약간 속이 상하기는 했을 거다. 에브린이 에쉬를 노려보던 그 눈빛에 의심이 가득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내세우는 것보다 상대를 이해해주는 건 마음이 넓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도 괜한 기 싸움이 싫어서 가능한 좋게 넘어가려고 하는 편이라. 그런 면에서 그와 참 잘 맞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였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끼다가 자연스럽게 떨어져 테이블의 의자에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았다.
“가끔 보면 에쉬 당신도 우리 아버지하고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걸 싫어하고 평화주의자라는 점에서? 아까 브링에게 제국의 새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당신하고 더 비교가 되는 느낌이라.”
“나를요? 어떤 이야기를 들었길래?”
그의 눈꼬리가 반달로 곱게 휘었고, 섬세한 손놀림으로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 넘겨주었다. 그 간질거리는 아늑함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브링의 말에 의하면…… 이거 듣고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그랬다가는 우리 목숨도 위태로우니까요.”
“제가 이곳에서 말할 상대가 당신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이래 봬도 입은 꽤 무거운 편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아주 믿음직스러운데요?”
어차피 그가 나와 혼인하면 우리 마르엘 백작가의 사람이 될 것이다. 정계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가문이니만큼 그와 친분을 쌓으려는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겠지.
그래서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그를 알아가면서 확실히 느꼈다. 분명 그도 과거에 귀족이었음을. 몸에 밴 습관이나 예법을 비롯해 대화법에서 그 증거가 속속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덕분에 걱정이 지워지면서 점점 더 신뢰가 쌓인다.
“새 황제가 그렇게 잔인하대요. 남녀 가리지 않고 침실로 끌어들이는 변태에 폭력성을 보이는 또라이 라고.”
있는 그대로를 설명했더니 에쉬의 연갈색 눈동자에 가벼운 파동이 일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다. 몹시 당황하여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서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한 손을 내 두 손으로 꼭 맞잡아주었다.
“당신과 비교했던 건 미안해요.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만 내 남자가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그 말, 진짜입니까? 새 황제에 관한 이야기? 아, 아니 다른 뜻이 아니라 정말 너무 놀랄만한 이야기라서.”
“소문이니까 너무 믿지는 마요. 원래 귀족가의 소문은 뜬구름이고,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했을 테니 전부 다 사실일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불을 때지 않은 굴뚝에서 연기가 날 일은 없으니까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중립을 고수하며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일일이 만져보았다. 커다란 손만큼 손가락도 길쭉하고 단단하다. 마디마디 굵은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것을 보니 꽤 검술 연무에 힘을 쓴 것 같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거칠긴 해도 그 느낌이 좋았다.
어제 나를 어루만졌던 이 손이 너무 부드러웠거든.
그 기억을 떠올리자 또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아까 에브린이 오지 않았더라면 어떤 상황이 이어졌을까?
“에쉬. 나 궁금한 거 있어요.”
“어떤……?”
“아까, 에브린이 오기 전에 말이에요. 정말 나하고 그거 하려고 했던 거예요?”
조금 가라앉아있던 그의 눈빛이 다시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가 엉덩이를 당겨 앉아 내 다리 사이에 오른쪽 무릎을 끼웠다. 그에 의해 허벅지가 살짝 벌어져서 심장이 쫄깃하게 졸아들었다.
“에쉬…….”
“나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진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당신을 원하니까.”
슬금슬금 내 손등부터 시작해 팔뚝을 타고 스치듯 올라오는 그의 손이 옷자락 위로 드러난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쥔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에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달콤한 초콜릿을 머금을 때처럼.
“몸은 좀 어떻습니까? 아직도 아파요?”
“견딜 만해요. 아침보다는 훨씬 나아졌어요.”
천천히,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상체를 숙여온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내 목덜미 위에 입술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그때부터 내 모든 신경은 그의 입술이 닿는 곳으로 집중되었다.
쪽, 입을 맞춘 목덜미부터 혀로 핥으면서 내려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축축하면서도 따끈한 감촉에 취할 것만 같았다. 심장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난동을 부리면서 점점 호흡도 버거워진다.
“아까 당신 친구가 당신을 애칭으로 부르는 것 같던데. 저도 당신을 슈아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불러주면 정말…… 기분 좋을 것 같아요.”
“슈아…….”
아아, 달콤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쾌감이 집요하게 들러붙어 내 정신마저 휘둘렀다. 그가 나의 애칭을 불러주는 지금, 더욱더 깊은 열락 속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쾌락에 흠뻑 젖어버린 나를 그가 조심히 안아 들고 소파로 향했다. 서재에 기다란 소파가 없다는 것이 왜 이렇게 아쉽던지.
“불편하면 침실로 갈까요?”
좁은 1인용 소파에 앉혀둔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대낮부터 남자와 방에서 부끄러운 짓을 한다는 사실이 퍼지는 건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에브린도 저택에 머물고 있으니까 더 신경이 쓰였다.
내 발아래 다른 소파의 방석을 놓고 그 위에 무릎을 대고 앉는다.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키스로 이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응, 흐…….”
아랫입술을 혀로 가볍게 핥는 자극마저 아찔했다. 일부러 더 집요하게 입술을 핥고 살짝 머금어 빨아낸다. 그의 체취를 담은 숨결에 묘한 감각이 아랫배를 맴도는 게 느껴졌다.
“여기, 당신 체취가 가득합니다. 최상급 와인보다 더욱더 향긋한 향기라서…….”
흐뭇하게 웃는 그가 입술을 쪽 맞춰왔다. 괜히 민망해져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좋았습니까?”
짓궂은 물음에 살짝 얄밉기도 했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수줍게 웃었다.
“물론이에요. 정원에서부터 쭉. 당신을 원하고 있다고요.”
여유롭던 그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어제와 같이 허기진 짐승의 눈빛으로 돌변한다. 저 표정을 보니 또 머리카락이 쭈뼛 서버리고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도발하는 거라면…… 위험한데.”
삐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린 그가 나를 덮치듯 두 팔로 나를 끌어안고 입술을 집어삼켰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오려다가 바로 이어진 키스에 다시금 목구멍 아래로 쑥 내려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