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2)화 (13/113)

12화

하여간 에브린하고 놀면서 못해본 건 없는 것 같다. 물고기나 파충류에 질겁하는 나와 다르게 뭐든 잘 만지고 호기심이 굉장히 큰 편이었다. 담벼락은 물론이고 나무를 타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한번은 나도 호기심이 생겨서 에브린을 따라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떨어진 적도 있었다.

[아, 아이고! 아가씨!]

다행히 바닥에 깔린 잔디가 충격을 완화해 주었다. 가벼운 타박상만 있었을 뿐, 뼈가 부러지거나 머리를 다치진 않은 게 행운이었지. 그때 에브린이 백작 부인께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방 까먹었는지 또 신나게 놀았다. 그 밝은 성격에 매료되어 호되게 당한 뒤에도 꾸준히 같이 놀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제멋대로에 꽤 긍정적인 성향이라 가끔은 부럽기도 했었다. 내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슈아!]

매번 나를 볼 때마다 굉장히 반가워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포옹도 했다. 내 소극적이고 소심한 성격이 조금 바뀐 건 에브린을 만나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 아니면 내가 너희 집에서 잘까?]

[……너 우리 언니들 별로 안 좋아하잖아.]

[에이, 안 좋아하는 게 아니고 좀 대하기 껄끄러운 거야. 예전에 나 때문에 너 나무에서 떨어졌던 이후부터 나만 보면 째려보니까 무서운 거지.]

몇 번 서로의 집에서 잠도 같이 자고 너희 집이 우리 집이라는 느낌으로 지냈다. 브레이튼 백작 부인도 나를 굉장히 예뻐해 주셨다. 우리 어머니도 에브린을 넷째 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고, 에브린은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어머니가 더 좋다고 마구 애교를 피우기도 하였다.

워낙 자유분방하게 자라서 보통 귀족 영애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또 흠이라면 흠이랄지,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무시당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었다.

하지만 에브린은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는 상대에게 몰래 발을 걸어서 넘어지게 하거나 짓궂은 장난을 쳐서 갚아주며 나중에 깔깔 웃어넘겼다.

[걔 표정 봤어, 슈아? 흥. 꼴좋게 되었네. 그 비싸다는 드레스가 찻물로 엉망이 되었으니. 쌤통이다.]

[에브린. 너무 그렇게 적을 만들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어머니께서도 그랬잖아. 상대가 무례하게 굴면 그냥 무시해버리는 게 가장 좋은 해답이라고.]

[그 계집이 먼저 우리 가문을 욕보였어. 너도 들었잖아? 티파티에 나를 초대한 것도 다 목적이 있던 거야.]

[그래. 알아. 아는데……. 그 영애가 잘못하긴 했지만 우리는 귀족이잖아. 적어도 예법에 맞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어?]

[예법은 개뿔. 왈왈 짓는 개한테 예법에 맞춰 행동하진 않잖아? 오는 마음이 예뻐야 가는 마음도 예쁜 법이지. 우리 슈아처럼 예쁜 마음을 가진 상대가 아니라면 예법도 아까워.]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를 꽉 끌어안아 뺨을 비비는 행동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래도 자기 걱정해주는 건 슈아 너뿐이라며, 앞으로 계속 자신의 친구로 남아 있어 달라고 잔망스럽게 애교를 피우기도 했다.

“에브린이 누굽니까?”

내가 편지 봉투를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자, 그걸 지켜보던 에쉬가 조금 뾰로통하게 묻는다. 질투도 할 줄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픽 웃음이 났다.

“친구예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내게는 가족과도 같아요.”

“여자?”

“그럼요. 여자 이름인 거 티 안 나요?”

“이름으로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이 의외로 많거든요.”

어쨌든 여자라서 안심이라는 듯 다시 환하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두피로 전해지는 기분 좋은 느낌에 조금 나른해지기도 했다.

“편지, 확인 안 해도 됩니까?”

나는 편지를 유모에게 건네주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천천히 봐도 돼요. 당장 급한 것도 아닐 테니.”

“그럼 산책을 조금 하고 식사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요.”

요즘은 날이 더워 한낮에는 외출을 거의 안 하는 편이었다. 지금 아니면 산책도 거의 불가능이기도 했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더 몸이 쑤실 것 같아서 그와 함께 뒤뜰 산책로를 거닐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아버지가 정말 그런 말을 했었어요?”

“짐승도 은혜를 아는 법이니, 짐승 이하는 되지 않길 바란다고 하셨지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 제 목을 찢어버리겠다고 경고도 하셨고.”

“그게 정말이에요? 아버지가?!”

그만큼 과격하게 표현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셨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은 아니라는 말만 소문으로 들었을 뿐, 우리 가족들 앞에서는 거의 창문에 매달린 커튼 같은 존재였다.

언니들이 결혼하기 전만 해도 집안에 여자가 넷이라 항상 시끌벅적했었다. 아버지 혼자 남자라서 그런지 쉽게 끼어들진 못했고 그냥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가끔 둘째 언니만 아버지께 아양을 떠는 때가 있었는데, 그게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 머쓱해 하셨다.

쉽게 말하면 표현을 하지 못하는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원래 저를 좀 못마땅하게 보시기는 하셨습니다. 당신이 나를 아껴주니 이렇다 할 불만을 표출하지 못해서 은근히 갈구셨으니까요.”

“아버지가 괴롭혔는데 왜 지금껏 나한테 이야기해주지 않았어요?”

“그 정도는 괴롭힌 것도 아닌 것을요. 제 아버지에 비하면 굉장히 인간적인 분이십니다.”

“……당신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굳이 과거를 캐묻고 싶진 않았지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넌지시 묻자,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딱히 좋은 마음도, 싫은 마음도 들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부자간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았거든요.”

“가족에게…… 소홀했어요?”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하긴 하셨지요.”

부부 사이는 좋았으나 자식에게는 냉대했다는 걸까? 어째서? 설마, 어머니가 재혼? 자기 아들이 아니어서?

물어보고 싶은데 너무 묻기 어려운 내용이라서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에게 다시금 상처를 안겨주는 것만 같아서.

“형제는, 없었어요?”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만. 이미 연을 끊은 지 오래입니다.”

왠지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다. 둘이 아버지가 다른 반쪽짜리 혈육일 가능성이 크다. 안 물어보길 잘했네.

“미안해요, 에쉬.”

“당신이 왜 사과를 합니까?”

“그냥. 아픈 상처를 건든 것 같아서요. 나도 기억하기 싫은 걸 억지로 떠올리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왠지 당신도 그럴 것 같아서…….”

말문이 턱 막혔다.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어젯밤처럼 붉은 기운에 서서히 젖어가고 있어서 그랬다. 왠지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라 손가락 끝이 간질거려 기분이 이상했다.

“에쉬?”

“……어제, 생각해 보니까 괜히 그만뒀나 싶더군요.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았는데 지금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습니다.”

자연스레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 허리를 한 팔로 감싸서는 조심히 당겨 안았다. 단정한 바지 아래에서 불끈거리는 그의 분신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태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성욕이 이만큼 주체가 되지 않는 건 처음이라, 이러다가 짐승이 될까 두렵기도 하고요.”

정사에 밤낮이 없다더니. 물론 익숙해지면 세상 그만한 쾌락은 존재하지 않는다던데.

“굉장히, 뜨거워요.”

“당신 생각만 해도 몸에 열이 납니다. 지금처럼.”

“나도 그런데. 나랑, 하고 싶어요?”

“당신만 괜찮다고 한다면.”

이미 그의 눈빛에 취해버린 것처럼 몽롱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취해 격렬한 키스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색정적인 분위기가 가득 담긴 키스에 현기증이 일었다. 예법 따위 전부 던져버리고 당장에라도 두 사람의 육체가 하나로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진하게 밀착하고 있었는데.

“슈아! 슈아, 나 왔……!”

경쾌하게 뛰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에브린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떼어내고 둥그렇게 뜬 눈으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는데.

맙소사. 정말 맙소사!

“에, 에브린?”

쟤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주황빛의 고수머리를 풍성하게 부풀려 간단하게 반 묶음으로 단장한 여자. 나를 발견한 그녀가 연보라색 눈동자를 파르르 흔들면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두 눈꺼풀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본 사람처럼,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는 철렁 내려앉는 심장을 추스르며 에쉬와 떨어져 서서는 헛기침을 뱉어냈다. 괜히 민망해져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 쥐면서 눈동자만 데굴 굴렸다.

“온다는 이야기…… 못 들었는데. 어, 언제 왔어?”

“……지금 내가 본 거, 실화야?”

나와 에쉬를 번갈아 쳐다보는 에브린의 눈이 가늘어진다. 마치 추궁하는 것 같아서 목이 바짝 말라왔다. 지금껏 에브린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에쉬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놀랄 만도 하겠지.

대체 이 민망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한담?

그때 황급히 등장한 집사가 에브린의 뒤에 멈춰 서서는 내가 궁금한 것을 대신 전달해주었다.

“아가씨. 영애께서 백작 부인의 기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당분간 머무시겠답니다. 조금 전 도착한 편지에 오늘 도착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하시는데, 아직 확인하지 못하셨습니까?”

“아…… 산책을 하느라. 유모에게 맡겨두었는데.”

“뭐야? 내 편지보다 그 남자하고의 산책이 중요한 거였어?! 너무해!”

서운하다며 툴툴거리는 에브린이 내게 다가와서는 내 옆에 서 있는 에쉬를 힐끔 쳐다본다.

“그보다 이 사람, 누군데 대낮에 이렇게 밝은 곳에서 그렇게 진한 키스를 해?”

“……일단 들어가. 들어가서 얘기하자. 식사, 아직이지? 같이 해.”

당장 이 부끄러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용인들이 다니지 않는 산책로라 안심하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설마 에브린이 지금 나타날 거라고는 정말 공기 중의 먼지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보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