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말랑한 입술을 포개는 그의 숨결에 온몸이 간질거린다. 폭신하게 눌린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가 말캉한 혀끝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핥다가 미끄러지듯 입속으로 들어왔다.
소복이 쌓인 눈이 따스한 봄볕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다정한 키스에 심장이 말랑하게 풀어져버렸다. 몸이 아픈 것도 잊을 만큼 심취하게 되었다. 내 안을 침입한 그의 혀와 닿아서 얽히는 그 감촉이 은밀한 야릇함을 주었다.
“아가씨?”
다시 들려오는 유모의 목소리만 아니었어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면서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다가 같이 웃어버렸다. 에쉬도 나처럼 유모를 조금 원망했던 모양이다. 하여간 은근 귀여운 남자라니까?
“그럼 이따 봐요, 에쉬.”
“기다리겠습니다.”
바닥에 허물처럼 떨어진 자신의 옷을 가지고 옆 휴게실과 이어진 방문으로 사라진 그를 확인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조금 걷다가도 허리가 욱신거려서 몇 번을 휘청거렸는지 모른다.
“들어와, 유모.”
방문이 열리고 유모와 그 뒤를 따라 목욕 시중을 도와주는 하녀 한 명이 같이 들어왔다. 내게 묵례한 유모가 실내를 한번 슥 둘러보았다. 아마 나와 같이 있었을 에쉬를 찾나보다.
“뭐 찾아?”
“기사에게 분명 그분이 늦은 새벽에 도착하였다는 이야기를 방금 전해 들었는데요. 아무도 어디로 갔는지 도통 위치를 모르더군요.”
“에쉬라면 옆 휴게실에 있어. 에쉬가 입을 만한 새 옷을 좀 가져다주렴. 에쉬가 머물 방도 안내해주고 목욕 준비를 도와줄 하인을 데려와.”
“어쩐지. 여기 계셨던 거로군요. 분부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아가씨.”
하녀가 물러간 이후에 나는 통증을 애써 참아가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 내 뒤를 쫓아 들어온 유모가 눈치를 슬쩍 보는가 싶더니 목을 가다듬으며 조심히 묻는다.
“거동이 불편하신 것 같습니다. 어디 아프십니까?”
“……잠을 잘못 잤나 봐. 근육통이 좀 심하네. 오늘 목욕물은 좀 뜨겁게 해줘.”
짓궂은 질문에 대충 둘러대면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슬쩍 축였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유모가 빙긋 웃으며 욕실 벽에 위치한 줄을 당겼다.
“우리 아가씨께 귀여운 버릇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간혹 거짓말을 하고 나면 의식적으로 입술에 침을 바르시더라고요. 몇 년 만에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버릇을 듣게 되어 어리둥절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짝 만지다가 방금 내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버렸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통 나버려서 뭐라 할 말도 없었다.
그사이에 뜨거운 물을 나르는 하인들이 욕조를 가득 채워주었고, 나는 그때까지도 괜히 머쓱해서 목을 긁적거리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유모는 그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니 뭉친 근육들이 조금은 풀어진 것 같았다. 완전히 풀리려면 며칠 더 마사지를 병행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처음 일어났을 때보다 숨 쉬는 게 편해졌다.
“아버지는 일어나셨어?”
“그렇지 않아도 오늘 수도로 출발하신다고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수도? 왜 갑자기?”
“잘은 모르겠지만 국왕 전하께서 귀족들을 전부 긴급 소집한다고 전언이 왔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수도에 역병이 퍼진 것이 작년 여덟 번째 달. 보름 정도 지나면 정확히 1년째가 된다. 어머니의 첫 기일이기도 하고.
아직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슬픔에 잠긴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아마 왕국에서 가장 슬픈 달이 바로 여덟 번째 달이 될 것이다.
그 아픔과 슬픔을 에쉬로 인해서 꽤 많은 위로를 받았었다. 둘째 언니가 그랬다. 슬픈 건 슬픈 일로 남기되, 그 슬픔에 깊게 빠져들진 말라고. 그건 자신을 해치는 길이라며 백작저에 혼자 남을 내가 눈에 밟힐 것 같다면서 있는 대로 걱정을 했다.
그렇게 마음이 약한 편은 아닌데. 둘째 언니의 눈에는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것 같다. 나와 다섯 살이나 차이 나니 그럴 수도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으니 준비를 서둘러줘.”
“결혼을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머리를 감겨주는 유모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또 말문이 턱 막혔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서.
“그렇게 막, 급하진 않은데…….”
“혹시 모르잖습니까. 행여 갑자기 두 분이서 사고라도 치면 주인님께서 크게 노하실 수도 있는 것을요.”
결혼 전에 아이 만들 짓을 하지 말든가, 결혼을 빨리해서 안정적인 부부 생활을 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하라는 뜻인가. 이미 내가 에쉬와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유모가 눈치챈 것 같으니 더는 미룰 것도 없긴 하다.
“그러네. 그것도 한번 말씀드려야겠어.”
“제가 아가씨를 처음 뵌 것이 다섯 살 때셨는데. 이렇게 장성하셔서 결혼을 하신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백작 부인께서 살아계셨으면 참…… 기뻐하셨겠지요. 어렸을 때부터 아가씨만큼은 꼭 행복해지시길 바라셨던 분이시니.”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유모의 말에 코끝이 조금 찡하게 울렸다. 나도 유모도, 수도로 떠나는 어머니를 배웅한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하늘에서, 지켜봐 주시겠지. 아마 기뻐하실 거야. 그날 에쉬를 만나게 된 건, 분명 어머니의 뜻이라고 생각하니까.”
유모도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그 운명적인 만남은 분명 신께서 개입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목욕을 마치고 단장한 뒤에 아버지를 뵈려고 방을 나섰다.
“르슈아.”
마침 방문 앞에서 나를 기다린 에쉬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온다.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정갈하게 갈아입은 그는 제법 귀족 같아 보였다.
생글생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다.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는 그에게 매달려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많이 기다렸어요?”
“조금. 그런데 걷는 거 괜찮습니까?”
“흠, 뭐…… 힘들긴 해도 죽을 만큼 아프진 않네요. 그보다 마침 잘 되었어요. 같이 아버지 뵈러 가요.”
“저도 백작께 인사를 드리러 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나와 에쉬의 다정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유모의 안색이 평소보다 밝았다. 신기하게도 에쉬의 존재가 우리 백작가에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기본적으로 외부인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아닌데. 나도 마찬가지고.
그와 손을 맞잡고 복도를 거니는 이 상황도 낯설지가 않았다. 오래전부터 나와 함께 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미 내 마음속에 가족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까?
“아버지, 지금 떠나시는 거예요?”
아래층 중앙홀이 분주하다 싶어서 내려왔더니 이미 외투를 입고 나가시려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하던 아버지가 나와 내 옆에 서 있는 에쉬를 보고는 주름진 미간이 슬쩍 풀어진다. 놀랍게도 그 딱딱한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자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살아온다더니 정말 살아 돌아왔군.”
“귀애하는 따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정말 사력을 다해 살아남았으니 적어도 기특하다 칭찬이라도 해주십시오.”
“그래. 잘 돌아왔다.”
나 모르게 둘이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아버지는 그렇게 대놓고 자식에게 애정을 보이는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괜히 가슴이 조금 설렜다. 아버지도 내 걱정을 하고 있으셨구나.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일단 다녀오마. 다른 이야기는 다녀와서 듣겠다.”
“네, 아버지. 조심히 다녀오세요.”
“노파심에 한마디 하겠다만, 네 아비인 나 이외의 사내라면 누구도 믿지는 말거라. 특히나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라면 더더욱 위험하니 항상 거리를 두는 것도 명심하고.”
아버지의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지 않았길 바랐다. 생각지도 못한 당부이기도 했고, 이미 사고를 쳐버린 뒤라서 어쩐지 뜨끔해버리는 바람에.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내 딸을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사나운 눈빛으로 에쉬를 빤히 노려보셨다. 그 어색한 분위기가 너무 불편하다 싶을 때, 아버지께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시고 몸을 돌려 마차에 오르셨다.
아버지를 배웅하고 나서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쁜 짓을 저질러버렸는데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껴지질 않아서. 그와의 뜨거웠던 첫날밤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벅차오르는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고르는 사이, 집사가 내게 종이 하나를 정중히 건넸다.
“아가씨. 브레이튼 백작 영애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에브린 편지구나. 고마워.”
나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유일한 친구. 에브린과의 편지는 십 년이 넘도록 이어진 하나의 즐거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일이 없어도 에브린 쪽에서 자주 보내오곤 했는데, 최근에는 좀 뜸했다가 오랜만에 도착한 편지라 상당히 반가웠다.
‘벌써 에브린을 보지 못한 게 일 년이 넘어가네.’
역병이 돌기 시작한 이후부터 서로 조심하자는 차원에서 만나지 못했다. 지난번 티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 수도에 갔을 때에는 에브린이 수도에 없었고.
내가 여덟 살 때였나? 브레이튼 백작 부인이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다고 해서 함께 브레이튼 백작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에브린과 처음 만났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브레이튼 백작 부인과 어머니께서 임신과 출산한 해가 다 똑같다는 거다. 브레이튼 백작 부인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인 첫째가 우리 첫째 언니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리고 둘째도 셋째도 같은 해에 태어나 또래 친구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었다.
[르슈아. 이쪽은 에브린. 너와 동갑 친구란다. 서로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에브린은 둘째 언니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나와 다르게 아주 활달하고 개구쟁이로 유명했다. 둘째 언니가 나를 애착 인형쯤으로 생각하고 곱게 다루는 쪽이었다면, 에브린은 같이 뛰어 놀아주는 강아지로 여기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