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최후에 살아남는 황자가 그 자리를 얻거나, 최악의 경우 제국의 이름이 바뀔 지도요.]
[후계가 많아도 문제로군요.]
피바람이 부는 제국의 운명을 따라 우리 왕국의 미래도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그 모든 것이 빨리 정리되길 바랄 뿐.
[그런데 황자들 중에서 사생아가 있었나요?]
[돌아가신 선황의 정력이 아주 남달랐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황후 폐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대단한 성욕이라서, 선황께서 황궁 시녀들을 침실로 끌어들이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짐승이 따로 없다고 비웃었는데. 발정 난 개도 아니고 성욕을 참지도 못하는 남자가 내 배우자라면 굉장히 한심할 것 같았다.
뭐, 지금 이 상황을 초래한 것도 황제의 왕성한 성욕 때문이라면 뿌린 대로 거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죽은 황제에게 비소를 날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혹시 들으셨어요? 이거 왕궁에서부터 나온 소문인데, 제국에서 황자의 난이 벌어지기 전에 선대 황제께서 독살당하셨대요.”
“독살이요?!”
독살이라…….
그건 또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독살 이후 황자의 난이 발발했다면, 아들 중 첫 번째로 황제가 된 2황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건가.
콩가루 집안이라 생각했는데, 패륜까지 저지를 정도로 황좌에 미친 자들이었구나.
“듣기로는 선대 황제께서 황후의 소생인 황태자를 마뜩잖게 여겼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다른 황자를 후계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그걸 알게 된 황태자가 선대 황제를 독살했대요.”
“2황자가 아니고요?”
“황태자가 배다른 형제인 2황자와 손을 잡았다가, 배신당한 거라고 들었어요. 결국 그 2황자도 4황자에게 독살당하여 죽었으니, 당신께서 저지른 죗값을 치르도록 신께서 직접 벌을 내린 거나 마찬가지죠.”
질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황태자도, 배신한 2황자도 결국 황제의 자리에 앉을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욕심이 화를 부른 꼴이 된 거나 마찬가지겠지. 제국의 미래를 위해 참으로 잘된 일이구나 싶기도 하고.
“이번에 즉위한 3황자가 올해 스물일곱이라던가? 사실 선대 황제께서 후계로 삼으려던 황자가 바로 그 3황자였다던데.”
“그게 정말이에요?!”
“그 3황자를 낳은 황궁 시녀가 현 황태후 폐하의 수석시녀였대요. 선대 황제께서 굉장히 총애하던 시녀인데, 우리 비엔트 왕국 사람이래요.”
그 이야기에 다시금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나 말고도 티파티 참석자 전원이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이어지는 뒷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왜 그, 예전에 반역 누명을 쓰고 참수당해 몰락한 피엔느 공작 아시지요?”
“둘째 왕자였다던 피엔느 공작이요? 그거 엄청 옛날이야기지 않아요?”
“맞아요. 그 공작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손녀딸이 제국에 시녀로 입궁했었대요. 그 시녀를 선대 황제가 무척이나 애지중지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나 성욕이 왕성했다던 선대 황제의 비위를 어떻게 맞췄을지 궁금하긴 했다. 사람이 가진 성욕은 타고나는 거라던데.
“그럼 우리 비엔트 왕족의 피가 흐르는 분께서 황제가 되신 거군요.”
“또 언제 바뀌게 될지 모르지만요. 제발 이번으로 정리가 되어야 할 텐데. 아직 살아남은 황자들이 있어서 새 황제께서도 마음을 놓지는 못할 것 같죠?”
“언제쯤 그 소리 없는 전쟁이 끝날지.”
역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은 지금 우리 비엔트 왕국은 전쟁을 치를 수도 없는 상황이다. 만약 제국이 와해되면 왕국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인데, 그럼 가장 먼저 표적이 되는 건 우리 왕국일 터.
이번 역병이 많은 왕궁 기사들의 목숨까지 앗아갔기 때문에 쉽게 함락될 가능성이 크다고 아버지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니까.
티파티에 참석한 모두가 다 같은 마음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마르엘 영애는 후계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던데, 맞나요?”
항상 모임에 참석해 영애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는데, 갑자기 내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애들 입방아에 오르는 건 그렇게 달갑지가 않아서.
“네. 어머니의 유언이 있었거든요. 국정에는 참석할 생각이 없어서 일단 영지만이라도 잘 유지해보려고요.”
“바쁘시겠네요. 그럼 슬슬 배우자를 물색해야 하지 않아요? 영애께 관심이 있는 영식들도 제법 되는데. 혹, 마음에 드는 영식이라도?”
“없어요. 아직은 생각 없답니다. 그리 급하지도 않고요.”
지금 내게 결혼에 대한 질문을 던진 테페른 영애의 속내를 모르지 않다. 자신의 막내 남동생이 나와 동갑인데, 전부터 나와 엮어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딱 잘라서 거절하자 영애도 더는 거론하지 못하고 조금 서운한 티를 냈다. 여러 가문의 영식들이 백작위를 받을 내 옆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첫째 언니가 왕비고 둘째 언니가 후작 부인이다 보니 어떻게든 우리 가문과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사랑이 아닌, 권력을 위해서라면 달갑지 않았다. 또 어머니께서 남긴 유언장에는, 나만큼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쓰여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 유언을 꼭 지킬 생각이다.
당연히 에쉬와 함께.
그렇게 바쁜 봄을 보내고 후더운 바람이 부는 여름이 찾아왔다. 에쉬가 떠나간 지 벌써 넉 달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게 되어 슬슬 초조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까? 위험해진 건 아니겠지. 설마 나 아닌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든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네. 그를 의심하게 될 줄이야.”
그의 표정도, 그의 눈빛도 진심이었음을 누구보다 내가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준단 말인가.
나를 향한 그 맹목적인 시선과 관심도 진짜였다. 그건 거짓으로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과는 별개로 마음이 허전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한번, 꿈에서도 그가 나온 적이 있었다. 자다가 시선이 느껴져 눈을 떴는데, 내 위에 올라탄 그가 전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 잠옷 끈을 풀어내는 그런 꿈도 꾸었다. 너무 놀라서 깼는데 그가 환상처럼 사라져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그냥 덮치게 놔둘 걸 그랬네.’
그가 다리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을 때 수도 없이 봤던 그의 나체를 기억한다. 다 낫고 나서 하루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을 증명하듯 단단했던 근육으로 뒤덮인 몸. 쭉 뻗어있던 쇄골과 올록볼록한 가슴 아래 복근마저 근사했었다.
훌륭한 역삼각형의 남다른 상체를 지나 매끈하게 빠진 골반과 튼실한 허벅지. 그리고 항상 볼록하게 솟아있던 천 조각 아래로 우람했던 남성의 상징이 떠오를 때면 이상하게 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엄청났는데, 정말. 그에게 하룻밤을 보내자고 제안이라도 해볼걸.’
오늘은 에쉬가 너무 그립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그의 침실에 잠입해 당장 나를 안아달라고 유혹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나답지 않아 픽 웃음이 나기도 했고.
“살아있지? 돌아오는 거지? 잘 지내고 있는 거예요, 에쉬?”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내 은밀한 곳에 손댈 수 있는 건 오직 그와의 첫날 밤, 그의 손이어야 한다. 그와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고 싶다.
‘그러니까 꼭 무사히 돌아와요.’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그동안 잘 참아왔던 그리움이 도무지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게.
초조한 마음이 그대로 표정과 행동에 드러났다.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더 속이 타들어 가서 일부러 바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괜히 하루에도 몇 번씩 영지에 문제가 없는지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그러나 했던 일을 또 하는 바보 같은 짓이 점점 늘고, 누가 불러도 딴생각에 빠져 듣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대도 그런다.”
“아무래도 몸보신을 좀 하셔야겠어요. 주치의 진찰도 좀 받아보시고요.”
가문의 후계인 내가 탈이라도 날까 봐 사용인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모만큼은 내가 에쉬 때문에 이런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저 숨죽여 웃기만 했다. 그런 유모를 흘겨보며 살짝 삐치기도 했고.
그러다가 밤에 쉽게 잠들 수 없을 만큼 덥던 어느 여름날.
그날따라 유난히 더워서 잠이 오질 않아 연신 뒤척거렸다. 일찍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아서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이 찬란한 빛을 내뿜는 그 자태를 올려다보며 갑갑한 마음을 담아 크게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
“르슈아.”
아래쪽에서 꿈에서나 들었던 에쉬의 목소리가 들려와 발코니를 내려다봤다.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아래에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에쉬가. 여전히 근사한 모습으로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흠, 도착하고 나니 너무 늦은 밤이라서 아침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순간 환상이 보이는 줄 알았습니다.”
“……에쉬?”
“예. 접니다. 약속대로 돌아왔습니다. 무사히.”
행여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나 역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환상을 보는 건 아닌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그의 모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잠옷을 두 손으로 한가득 집어 들고 다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방문 밖으로 나갔다.
‘그다. 진짜 그야. 그가 왔어.’
2층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계단 아래쪽에서 성큼성큼 올라오고 있는 에쉬의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고요한 실내를 울리는 구두 굽 소리는 진짜였다. 벽면에서 타오르는 작은 촛불과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만이 실내를 밝혀주는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확실히 유령은 아니었다.
“에쉬……!”
수만 가지의 감정이 나를 어지럽게 휘저어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표면 위로 떠오른 감정은 기쁨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환희에 가슴이 벅차올라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