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어딜 가는 길이냐, 르슈아?”
에쉬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가던 순간, 계단을 내려오시는 아버지와 딱 마주쳐버렸다. 그러더니 또 아주 근엄하게 목소리를 낮게 깔고는 에쉬를 흘겨보며 내게 물으셨다.
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식사 시간이라서요. 아버지는 이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시려고요?”
“……식당에 가려고 한다.”
“식당이요? 아침 식사는 원래 안 하셨잖아요? 입맛 없으시다고.”
“오늘부터 아침 식사를 챙기도록 지시하였지. 오전 공복은 몸에 좋지 않다고 해서 말이다.”
물론 뒤에 따라오던 집사는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어리둥절해했다.
아버지가 나와 에쉬가 함께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평생 드시지 않던 아침 식사를 추진하신다 생각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속이 좁으신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내가 그동안 아버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어쩔 수 없이 에쉬와 따로 떨어져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하게 된 요리사가 긴장한 채로 식사를 내왔으나, 아버지는 채소류만 가볍게 드시고는 포크를 내려놓으셨다.
“……벌써 다 드셨어요?”
“식사는 과한 것보다는 부족하게 하는 것이 더 건강에 좋다고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구나.”
준비된 식사는 요리사의 성의라며 남긴 적이 거의 없으신 분인데. 그래서 양을 적당히 조절하라고 명하기는 했다만. 육류는 정말 조금도 손대지 않으셨다.
그래서 분명 일부러 원치 않는 식사를 하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내 아버지가 딸바보인 아버지들이나 한다는 행동을 하신다니. 대체 에쉬가 어디가 어때서?
“아버지. 에쉬 말인데, 어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신 거예요?”
“글쎄. 제법 눈치도 있고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것으로 미루어보아 정식으로 교육을 받기는 한 것 같던데.”
에쉬에 대한 질문에 표정은 떨떠름해졌어도 평가는 제법 후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흠을 발견하지 못하여 불만스럽다는 느낌이긴 했지만. 깐깐하다 소문난 아버지께 인정받을 정도면 역시 에쉬가 보통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이제 어느 정도 회복은 되었고, 에쉬는 딱히 정착할 곳을 찾지 못했다고 했어요. 검술도 훌륭하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지식을 갖춘 이라면 저희 백작가에서도 충분히 쓸모 있는 사람 아닐까요?”
“정착할 곳이 없다고 하는 녀석치고는 이곳에 미련을 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스스로 남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는 너무 마음 주지 말거라.”
그래서 에쉬를 그리 경계하셨던 거였나 보다. 내가 에쉬에게 너무 친밀감을 드러내어 더욱 걱정하셨던 것일 테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곳에 정착할 생각이 있었다면 일단 가문 사용인들과의 친분부터 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용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고 검술 연무와 재활을 제외한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설레발을 친 걸까? 내 바람대로 강요하려던 건 아니었을지 반성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것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떠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상대에게 정을 주어봐야 후회할 테지만, 왠지 그와의 좋은 기억들은 훗날 시일이 지나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적당히 관심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정원을 산책하곤 했었는데, 어느새 그도 그 시간이면 정원에 나와 있었다. 왠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어서 기분 좋게 설레기도 했다.
“과꽃 좋아해요? 매번 그 꽃만 보고 있는 것 같던데.”
“과꽃은 조금만 건조해져도 시들어버려서 관리를 잘해주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백작저의 정원사는 이 정원을 가꾸는 데 많은 공을 들이는 것 같군요. 항상 보면서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물이나 식물처럼 말 못 하는 생명을 보살피는 일은 그만한 애정이 없다면 힘들지요.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요.”
그가 내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과꽃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해서 나도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꽃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나이도 듣지 못한 것 같네요. 에쉬, 몇 살이에요?”
“열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의 기일이 올해로 십 사주기니까…… 스물네 살이군요.”
그의 어머니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계산법이 희한해서 어리둥절했다.
“무슨 나이를 그렇게 계산해요?”
“이게 더 확실하거든요.”
나는 올해 스물한 살이 되었으니까 나보다 세 살이 많은 거다. 아주 적당한 나이라서 흡족했다. 상당히 어른스러워 보여서 그 나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철이 일찍 들어버린 걸까?
“에쉬도 어머니가 계시질 않았군요. 힘들었겠어요.”
“너무 어릴 때여서 당시 기억이 그리 깨끗하지 못합니다. 그보다 내가 당신 마차에 멋대로 올라탔던 그때가 당신 어머니의 기일 아닙니까?”
“정확한 날짜는 그날보다 이틀 전이라고 했어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울적해지는 것이 표정에 드러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별말 하지 않고 그저 옆을 지켜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가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했을 때 무리해서 창가로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봤다고 했지. 그래서 나도 그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쌀쌀한 겨울바람을 머금어 약간 흐린 하늘이 옅은 회색빛으로 물든 그 하늘을.
“하늘 좋아하나 봐요?”
“하늘을 보면, 세상이 참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되거든요. 나는 이렇게 좁은 세상에 갇혀 치열하게 살아가는데. 하늘은 변함없는 아름다움으로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라서 좋아합니다.”
이상하게 하늘에게 그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묘했다. 하늘이 아닌 내게 그런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괜히 심술이 나서 뾰로통해진 나 스스로가 우습고 어이가 없었다. 그때 내가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혹시 부인이 있나요?”
“아직 미혼입니다. 부인이 있다면 이곳에서 이렇게 태연자약한 시간을 보내고 있진 않았겠지요.”
“그렇긴 하네요.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후계 수업을 받았었습니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였으나 애써 참았다. 어쩐지 신상을 캐내는 것 같이 들릴까 봐.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하질 않아서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 질문만 최대한 골라서 했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그래도 두루뭉술하게 대답을 해주긴 했다.
“당신이 지내던 곳은 어떤 곳이었나요?”
“이곳만큼 평화로운 곳은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평화가 마치 꿈만 같아서 깨어질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옥 같은 세상을 경험하고 온 이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지는 것을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진다. 대체 얼마나 힘든 생활을 견뎌왔던 것일지. 후계 수업을 받았던 거라면 장래가 유망했을 텐데. 집안이 그리 평온하진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고.
“제가 이것저것 캐물어봐서 곤란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그냥 당신이 궁금해서 알고 싶으니까 물어보는 거지, 별 뜻은 없어요.”
“곤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있군요.”
“아쉬운 거요?”
“저 역시 르슈아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매우 알고 싶어졌거든요.”
심장이 벌렁벌렁. 언제나처럼 내게 고정된 시선에 나에 대한 호기심이 느껴져 뺨이 확 달아올랐다.
딱히 자랑할 거리도 없는 평범한 삶이었는데도, 내 이야기에 일일이 반응을 보이며 집중해서 들어주는 그에게 점점 더 호감이 생겼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어서일까? 친한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편안한 대화가 가능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래서일까? 그것만으로도 서로가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도 그에게 관심이 있는 만큼, 그도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너무 기뻤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느낄 정도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나와 꽤 잘 맞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굳이 대화를 하지 않고 나란히 걷기만 해도 불편한 기색 없이 편했다.
심장은 편하지 못했지만.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그저 좋았다. 예전에는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거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가 옆에 없으면 허전했다. 혼자 잠들 때에도 계속 생각나고 그리웠다. 그를 보고 있음에도 더 보고 싶어졌다.
부모님께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는 나만큼 동물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몸에 밴 습관처럼 깍듯한 예의범절은 그가 귀족이긴 했다는 것을 증명할 정도로 대단했다. 보석이나 단장하는 것도 번거롭고 화려한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몸 일부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항상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검에 무슨 사연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 검, 언제부터 차고 있던 거예요?”
“아버지의 유품입니다.”
“아…….”
그래서 그가 갈 곳이 없는 혈혈단신이라는 의미를 완벽하게 깨닫게 되었다. 분명 귀족이었는데 이번 역병에 피해를 입은 가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아니면 우리 왕국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아가씨. 자꾸 보다 보니까 저분과 아가씨, 꽤 잘 어울리세요.”
“맞아요! 마치 옛날 마르엘 백작 주인 두 분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아요. 그때도 백작께서 부인께 얼마나 다정하셨는지 몰라요.”
간혹 사용인들이 나와 에쉬의 관계를 좋게 봐주어 몹시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했다. 그가 계속 내 곁에 남아주면 내 부모님께서 했던 사랑을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쁨에 더 마음이 가 버리고 말았다.
에쉬도 은근히 내게 서서히 마음을 여는 것 같아서 아주 조금 기대를 하기도 했고.
얼마 뒤에 역병이 완전히 잠잠해져 수도가 다시 개방되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가 직접 수도에 다녀오셨다.
역병이 휩쓸고 간 수도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고, 수도 백작저 역시 그사이에 폐허가 되어 다시 복구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잠시 별장으로 몸을 피해있던 국왕 전하와 첫째 언니인 왕비 전하께서 무사하시다는 보고에 안도했다. 완전히 정리되어 안정이 될 때까지는 수도를 방문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왕명도 내려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