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다음 날부터 동이 트면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아버지의 서재를 찾아가 서류 처리하는 방법부터 배웠다. 워낙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이어서 어렵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복잡한 내용들이 많아서 꽤 애를 먹어야 했다.
그래도 처음 배우는데 이 정도면 소질이 있다며 처음으로 아버지께 칭찬도 받아서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게 보름쯤 지났을까?
“르슈아.”
오전 일과를 마친 뒤에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손님방으로 찾아가 열심히 그의 다리를 두 손으로 조물조물 주물러 주었다. 그때 낯선 목소리로 부르는 내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나 부른 거예요?”
“예.”
놀랍게도 그가 귀족인 내 이름을 멋대로 불렀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나를 불렀다는 사실에 순간 심장이 멈추는 착각이 들었을 뿐.
항상 그랬던 것처럼 투명하고 맑은 연갈색 눈동자가 맹목적으로 나를 향한 채로, 그가 나를 향해 처음으로 설핏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보답할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그때를 놓친 것 같군요. 생명의 은인께 그 어떤 말을 해도 모자랄 것 같고.”
“……인어왕자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인어왕자?”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왕자가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그가 내 말에 고개를 돌린 채 숨죽여 웃는다. 그 작은 웃음소리도, 그의 낮은 저음마저 그의 외모만큼이나 매력적이라 가슴이 설레었다. 손가락 끝까지 저릿한 감각이 느껴질 정도로 전신의 신경이 예민해진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 처음이야.’
그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감정이 될 수 있는 건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허전한 자리를 그가 대신 메꿔주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슬픔에 조금 울적해져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나를 웃게 만들어 주었다.
참 신기하지?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내가 아닌데, 왜 이렇게 그만 보면 조금도 주저 없이 마음이 쏠려버리는 걸까?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에쉬라고 부르세요.”
“에쉬…….”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되뇌며 입속에 머금었다. 그와 참 잘 어울리는 어여쁜 이름이구나 싶어서 자꾸만 목구멍에 맴돌았다.
“그럼 에쉬, 당신 가족들이 당신을 찾지 않을까요?”
“아쉽게도 모두 잃었습니다.”
“아……. 그랬군요.”
행여 그의 가족 또한 역병으로 잃었을까 봐 차마 자세한 건 물어보지 못하겠다.
“돌아갈 곳은, 있어요?”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여기 계속 있어도 돼요. 돌아갈 곳이 없다면 정착할 곳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나의 유일한 친구인 에브린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래서 이십 년을 살아온 지금까지 운명이라는 것을 절대 믿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처음 피칠갑을 한 그의 아름다운 연갈색 눈동자를 보자마자 빠져든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브린이 말했던 것처럼 그를 보자마자 별처럼 반짝거린다는 그 기분을 느꼈었다.
상대를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뛰고 가끔 아플 정도로 저릿해진다면 그게 반한 거라고 했다. 그에게 이 마음을 주게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를 좋아해.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조금 더 그를 알아가고 싶었다.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의 마음. 저 선하디 선한 눈동자에 오롯이 나만 담기길 바랐다.
“다리는 좀 어때요? 아직도 아프거나 어디 불편한 곳이 있다면 말해줘요.”
“견딜 만합니다.”
“한번 걸어볼래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는 움직여줘야 근육이 다치지 않을 거랬어요. 내가 도와줄게요.”
어느 정도 다리 상처가 치료된 이후에는 걷는 운동으로 재활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걱정은 되었어도 에쉬가 거부하지 않아 절뚝거리는 그를 부축해 방에서만 걸었다. 며칠 뒤에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다 싶어 정원으로 끌고 나오기도 했다.
“오늘 날씨가 좋아요. 방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니까 정원을 안내해줄게요. 단, 너무 무리하지 않기예요?”
행여나 그가 아프면서도 표현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싶어 산책하는 내내 지켜보기 바빴다. 늦가을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온 신경을 동원하여 에쉬의 표정과 안색만 살폈다.
한참을 걷는 일에 집중하던 그가 뒤늦게 내 집요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제 얼굴을 그리 빤히 보는 분은 처음이군요. 불편하다 싶으면 바로 말씀드릴 테니 그렇게 예의주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보는 게 불편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만.”
“당신이 몇 달을 고통스러워하며 누워있었던 그 상황이 내게는 아직 생생해요. 처음 당신이 피를 뒤집어쓰고 내게 나타났던 그 충격도 여전하고요. 걱정이 되어 살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걱정, 이었습니까?”
살면서 걱정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 단어를 굉장히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그게 왜 이렇게 가슴이 저릿해지던지. 왠지 그가 살아온 삶이 내 생각보다 험난했을 것 같다.
주치의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면서 곳곳에 오래된 상흔들이 보인다고 했었다. 해서 그가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 동요하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조금 먹먹해진다.
참 이상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심장이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반하게 되는 날이 올 줄도 몰랐고, 그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그 무엇보다 즐겁고 흥미로웠다.
“왜요? 걱정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닙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 낯설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믿지 못해 경계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거든요.”
“당신이 나를 해치기 위해 그 무수히 많은 상처를 스스로 내어 내 마차에 올라탔다고는 생각 못하겠던데요? 그렇다고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파렴치한으로도 보이지 않고. 이래 봬도 저, 사람 보는 눈이 제법 정확하다고요.”
다른 뜻으로 말하자면 촉이 좋은 편이어서 느낌이 좋지 않다 싶으면 거리를 두었다. 세상에 나와 무조건 다 맞는 사람은 극소수에 가까우니. 게다가 내게 줄을 대려는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이들이 많아서 더욱 경계 중이긴 했다.
하지만 그는 뭐 하나 나쁘다는 느낌이 든 적이 없었다. 목적을 가진 이의 눈빛은 탐욕으로 일그러져있었으나 그의 눈동자는 그저 담백하였고 항상 마음이 설렐 정도로 깨끗하게 반짝거렸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를 어느 정도 신용할 수 있다 여겼다.
그 전에 이성으로서의 매력이 내 심금을 울려버리고 만 것 같지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파렴치한이 되지 않으려면 백 개 천 개의 질문도 대답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당신이 겨우 눈을 떴을 때 갈 곳이 없다고 했잖아요. 만약에…… 상처가 전부 회복되어 두 다리로 걷는 것에 문제가 없어진다면 여길 떠날 건가요?”
계속 그게 궁금했다. 그가 다 나으면 더는 이곳에서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며 훌쩍 가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아 있길 종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게는 그의 인생이 있을 테니까. 내가 그에게 말 못 할 감정을 품고 있지만 그는 아닐 수도 있고.
나는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척 표정을 관리하며 듣기 좋은 미성에 귀를 기울였다.
“딱히, 그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갈 곳이 전부 사라진 터라……. 만약 떠나야 한다면 안전한 곳을 찾아가게 되지 않을까 싶군요.”
“안전한 곳. 여기는 당신이 머물기에 안전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갈 곳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 처지라면 떠날 이유가 없다고 여겨진다. 이 영지는 우리 백작령이고 떠돌이보다는 이 영지에 정착하는 것이 그에게 더 안전할 수도 있을 테니까.
사실 조금의 사심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본 그의 얼굴선이 저 하늘만큼이나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도…… 이곳이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아주 아늑하고 평화로운 곳임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감히 제가 머물러도 좋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나는 당신이 이곳에 남아 나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의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만 보아도 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치의는 그의 상처가 절대 한 사람만의 짓이 아닌 것 같다고 하였다. 아마 혼자서 여럿과 싸우다가 그런 상처를 입게 되었을 터.
문득 그가 용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내 쪽에서 고용할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야겠다고 한다면 붙잡진 않을 생각이다.
서로의 인연이 단지 그뿐이라는 뜻일 테니까.
에쉬 또한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해서 나도 더는 묻지 않았고 점점 더 쌀쌀해지는 가을 내음을 느릿하게 들이마시며 곧 찾아올 겨울에 단단히 대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새해가 시작되던 신년. 다행히 그는 언제 다쳤냐는 듯 아주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간혹 걷다가 통증을 느끼기도 했지만 검술 연무도 가능할 만큼 건강해졌다.
“에쉬-!”
잠에서 깨면 세안을 하고 아침 식사하기 전에 늘 찾아가는 곳이 연무장이었다. 날이 추운데도 새벽마다 먼저 일어나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저 멀리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에쉬를 크게 부르면서 손을 흔들면, 그도 검을 내려놓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면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르슈아.”
“에쉬도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도 열심히 하네요. 꾸준히 하는 모습, 보기 좋아요.”
“당신이 살려놓은 몸이니 빨리 회복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그래도 이제 좀 몸이 풀려서 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적당히 해요.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요. 날이 이렇게 추운데, 그러다가 또 다칠라. 어서 식사하러 가요, 우리.”
그와 마주 보며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건 아버지가 없을 때만 가능했다. 그가 젊은 남자라서 그런지 나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진 않았다. 에쉬가 내게 해코지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대체 아버지는 에쉬를 그리도 못마땅하게 보는 걸까? 크게 싫어하는 건 아닌데 유독 에쉬를 보면 눈빛부터가 사나워지곤 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