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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3)화 (4/113)

3화

잠에 취한 건지, 수면제가 섞인 진통제를 먹어서 약에 취한 건지 모를 흐릿한 눈동자를 굴려 나를 쳐다본다.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활짝 웃으며 다시 손을 분주하게 움직여서 붕대를 마저 풀어냈다.

“상처가 거의 다 아물어서 다행이에요. 내가 보지 않을 때 당신 혼자 움직이는 것 같다고, 자꾸 그러면 상처가 벌어져서 치료가 더뎌질 수 있다고 했어요. 빨리 낫고 싶으면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있길 바라요.”

계속 상처가 벌어지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주치의가 아무래도 혼자 있을 때 감시를 하는 것이 낫겠다며 몰래 기사 한 명을 붙여두었다. 그 기사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신음 한번 내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힘으로 일어나 창가에 서서 하늘만 빤히 올려다본다더라.

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까? 어쩌다가 그런 몰골로 내게 나타난 걸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한 것이 태산이었으나 일부러 묻지 않았다.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그날 이후로 묵언 수행이라도 할 참인지 한마디 말도 꺼내질 않아서. 진짜 목소리를 잃어버린 걸지도 모르고. 일단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가슴과 어깨에 두른 붕대를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가며 떼어내고 물수건을 다시 꾹 짜서 상처를 피해 조심히 닦아내 주었다. 몸이 어찌나 단단하던지. 피부는 매끄럽고 고와서 닦이는 느낌도 제법 좋았다.

‘눈동자만큼이나 예쁘다. 정말.’

상처투성이인 건 좀 속상하지만 이 상처가 다 나으면 어떤 모습일지, 괜히 가슴이 설레어서 심장이 간질거렸다.

닦는 일에 집중하는데 이마가 따끔거려서 고개를 슬쩍 들었더니,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보고 있는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직접 닦아줘서 싫어요?”

다시 시선을 내리까는 그가 고개를 슬쩍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본다. 매번 나만 뚫어지게 보던 사람이 먼저 시선을 돌려서 조금 서운해지기도.

볼록볼록 예쁜 근육이 자리 잡은 상체를 다 닦은 뒤에 그의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섹시한 자태를 드러내는 등까지 전부 닦아냈다. 남은 건 하체인데…….

“이거 벗겨도 되죠?”

치료하느라 바지 대신 골반과 허벅지까지만 살짝 덮을 정도의 천을 둘러 끈으로 고정시킨 채다. 그가 깨지 않았더라면 묻지 않고 그냥 했을 텐데 아무래도 남에게 보이기 민망한 곳이다 보니.

내 물음에도 그는 대꾸 없이 눈동자를 파르르 떨기만 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애매한 표정이었으나 어차피 전신을 닦아야 하니까.

아무리 나라도 쉬운 일은 아니라서 굳은 결심을 하고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닦는 일에 집중했다. 그곳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면서 말이다.

“후, 다했다. 새 천으로 다시 가려줄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괜히 어색해질까 봐 일부러 밝게 웃으며 뽀송뽀송 잘 마른 천을 그의 엉덩이 아래 대고 다시 제대로 눕혀준 뒤에 앞으로 천을 둘러 끈으로 묶어주었다.

“오늘부터는 붕대 감지 않고 약만 발라줄 거예요. 또 상처가 벌어지면 침대가 엉망이 될 거고, 당신도 많이 아플 거고요. 진짜 움직이면 안 돼요. 알았지요? 그래야 빨리 나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에요.”

자꾸 상처가 벌어져서 속상한 마음을 그가 알까? 이렇게나 얌전한 사람인데, 누워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하늘인데 왜 힘들게 움직여 굳이 창가에서 보는 건지.

뒤늦게 그가 아직 경계를 하는 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동물들도 낯선 곳에서는 적응 기간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하인들에게 맡겼던 일을 전부 다 내 손으로 해주었다. 그에게 식사를 떠먹여 주는 것부터 약을 먹이고 몸을 씻겨주는 일까지 전부.

그가 경계를 푸는 유일한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다.

처음이 어렵지, 하다 보니 점점 흥미가 생겼다. 그의 상처들이 서서히 나아가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어 뿌듯하기도 하고.

그리고 며칠 뒤에 남자를 진찰한 주치의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히 다리의 신경과 근육은 다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당장 걷는 것은 무리겠으나, 낫지 못하는 상처는 아니므로 잘만 회복하면 적어도 걷는 일엔 지장 없을 겁니다.”

“후유증은?”

“상처가 나기 전처럼 완벽하게 멀쩡하진 못할 테지만 그것 역시 스스로 얼마나 재활에 힘쓰느냐에 따라 달려있겠지요.”

그래도 다리를 못 쓰게 되진 않겠다 싶어 안도가 되었다. 만약 희망이 없었더라면 그가 크게 낙심하여 좌절했을 테니.

주치의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다친 그를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치료를 결심한 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뿌듯하게 웃어주었다.

“들었지요? 나을 수 있대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요.”

오래 걷지 못하면 다리 근육에 손상이 올 수도 있다고 해서 그의 왼쪽 다리를 내 손으로 직접 열심히 주물러주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누군가에게 이런 마사지를 직접 해 준 적은 처음이라 서툴긴 했어도 그는 별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르슈아.”

“아! 아버지.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그날도 마침 그의 다리를 마사지하고 있을 때였다. 노크도 없이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딱 걸려서 순간 왜 이렇게 민망해지던지.

아버지는 다친 사람을 치료해준 것에 대해서는 그저 잘한 일이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역병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의 치료에 열성인 것만큼은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 쓸데없는 정성을 퍼붓는다며 혀를 끌끌 차긴 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하지 않던 행동이라 질투가 나서 그러는 걸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질투라니. 아마 어머니께서 천국에서 들으시면 코웃음을 치실 거다.

“주치의에게 이야기는 건너 들었다. 젊고 체력도 좋은 편이라 오래 걸리지 않아서 무사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더구나.”

“네. 처음 치료를 맡겼던 의사는 가망이 없을 수도 있다고 했을 정도로 심각했는데, 살겠다는 의지가 없었다면 아마 위험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택 내에서 망자를 볼 일은 없겠군. 그보다 르슈아, 잠시 따라오너라.”

다시 방문을 나서는 아버지가 내게 용건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남자의 이불을 정리해주고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무슨 할 말이 있으세요?”

그가 머무는 손님방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복도에 멈춰선 아버지께서 내게 서찰 하나를 내미신다.

“요안나가 남긴 마지막 유언에 너에 대한 내용이 있더구나. 그건 네가 직접 확인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서.”

어머니의 유언…….

처음 그것을 받았을 때에는 아버지께 먼저 보여드리는 것이 맞다 여겨 내용을 확인해보진 않았는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히 받아 들어서 아버지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편지를 펼쳐서 내용을 확인하였다.

수도에 역병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여 급히 몇 자 적는다고. 며칠 전에 다녀온 살롱의 회원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상태를 확인해보니 이미 피부가 썩기 시작한 상태인 걸로 보아 아픈 것을 숨긴 듯 보였다며. 그가 전염이 강한 역병 감염자임을 확인하였으니 아마 그 살롱에 참석한 귀족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을 것 같다고.

얼마나 급박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그 차분한 글귀 속에 고스란히 깃들어있었다. 익숙한 필체를 보고 있노라니 더욱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눈물이 맺히려는 것을 꾹 참고 읽어 내리는데, 마지막에 정말 나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내 위로 두 언니는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서 여한이 없지만, 늦둥이인 막내딸을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며. 르슈아는 강단 있고 누구보다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아이니, 당사자의 뜻으로 가문을 위해 일하기를 원한다면 맡겨도 좋을 것 같다고.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르슈아만큼은 원하는 이와 맺어져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닌데. 어머니께서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시던 그 무수히 많은 장면이 떠올라서 울컥해버리고 말았다.

“항상, 어머니가 제 미래를 걱정하시곤 하셨는데…… 죽음을 앞에 두고도 제가 그리 눈에 밟히셨나 봐요.”

“네가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뭐, 아비인 나를 닮아 문제라느니. 내가 볼 때에는 그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지.”

첫째 언니가 유독 아버지를 많이 닮아 인정이 없는 편이라고 하시는 건 몇 번 듣긴 했는데. 나는 그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건만, 어머니가 보기에는 첫째 언니나 나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여기셨나보다.

어쩐지 조금, 충격인데.

“그래서 이 유언장을 제게 보여주신 이유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 안에 담긴 그대로다. 네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 묻겠다. 너의 뜻이 어떠한지, 정말 후계교육을 받고자 하는지.”

그건 이미 예전부터 어머니와 꾸준히 상담했던 내용이었다. 꼭 남자아이만이 후계가 될 수 있는 거냐고, 아들이 없는 우리 가문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해서 어머니는 가문을 아끼고 사랑하는 나라면 충분히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결심했었지. 우리 마르엘 백작가와 영지는 훗날 내가 지키겠다고.

“정식으로 후계 수업을 받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책임지겠어요.”

“아직 우리 왕국은 여성이 후계교육을 받은 역사가 없다지. 쉽지만은 않을 거다. 그래도 하겠느냐?”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혼인도 국왕 전하께서 그리 반대하셨다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맺어진 건, 그만한 각오와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럼 내일부터 속성으로 교육을 시작하마. 자세한 건 집사가 서류로 챙겨다 줄 테니 미리 훑어보고 오너라.”

“네, 아버지.”

내 결심이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짓는 아버지의 밝은 표정은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남들이 보면 어떻게 저게 웃는 얼굴이냐고 반박하겠지만, 매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살짝 풀어지면서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저 표정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간혹 어머니의 애교에 무장해제 할 때만 보이던 표정이어서 어쩐지 감회가 새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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