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뭘 안 했다는 거야? 약국은 왜 가고? 난 괜찮다니까? 콜라 마셨더니, 가라앉았어.”
다연은 제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태준을 향해 몸을 휙 돌리며 쉬지 않고 말했다.
“내가 안 했다는 건 생리고, 약국은 임신 테스트기를 사러 가는 거고, 지금 태준 씨 걱정하는 거 아니니까 오버하지 말아요.”
“그래. 그러니까 그 임신 테스트기를…… 뭐? 지금 뭐라고 그랬어?”
다연의 말을 따라 하던 태준은 ‘임신 테스트기’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임신 테스트기라니. 그럼 다연이 임신했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야? 임신했어? 우리한테 아기가 생겼어?”
“아직은 몰라요. 우리한테 아기가 생겼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약국에 가려는 거지.”
다연의 대답에 태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기가 생겼을 수도 있다니. 아까 서원의 아들을 품에 안았던 그 감촉이 아직 심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남의 아기를 안아도 그렇게 예쁘고 가슴이 뭉클한데. 내 아기라니, 우리의 아기라니.
“아직 확인된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지 말아요.”
다연은 눈가가 촉촉해진 태준을 다독이며 말했다. 일할 땐 그 누구보다 냉철한 사람이 이렇게 흥분한 것을 보니 낯설기 그지없었다.
크게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어서 그런지 다연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양가 어머니께도 아닐 거라고 얘기하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온 거였고.
“알았어. 진정할게. 룸에 들어가 있어. 약국은 내가 다녀올 테니까.”
“네.”
***
결혼식 날 이게 무슨 일인지. 다연은 제 몸에 무심했던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바보. 한 달 동안 생리를 안 했는데, 그걸 몰랐다니.”
지난 5개월 동안 다연은 미친 듯이 바빴다. 결혼 준비에 호텔 오픈까지 겹치는 바람에 정말 쉬지 않고 일했다.
제 몸에 무관심한 사이 아이가 찾아왔을까 봐 걱정되었다.
“별일 없겠지?”
두 손으로 배를 꼭 감싸고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태준을 기다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그가 들어왔다. 상기된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전속력으로 약국까지 뛰어갔다 온 모양이었다.
“여기.”
“화장실 다녀올게요.”
테스트기를 받은 다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던 다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태준 씨.”
“응?”
숨을 돌리며 의자에 앉으려던 태준은 엉거주춤한 상태로 대답했다.
“임신 아니어도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혼자 있는 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걱정을 했는지, 다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태준은 다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내가 왜 실망해. 우리 오늘 결혼했어. 급하게 생각하지 마.”
잠깐이었지만 혼자 있는 사이 다연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무심한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몸 관리하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던 것, 생리를 안 한 줄도 모르고 한 달이나 지나쳤던 것 등. 하지만 태준의 위로에 금세 마음이 풀렸다.
“고마워요. 나 들어갔다 올게요.”
태준에게 힘을 얻은 다연은 화장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태준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버렸다.
“우리한테 아기라니. 내가 아빠가 된다니.”
다연의 앞에서는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이미 아까부터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약국 가는 내내 다연을 꼭 닮은 딸을 품에 안을 생각에 두근거렸고, 앞으로 아이와 함께할 미래를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살면서 꽤 여러 종류의 행복을 느꼈던 것 같은데, 이런 종류의 행복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행복으로 가득 찬 듯 팽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연을 기다리고 있을 때, 화장실 문이 열렸다.
태준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찼던 표정을 지우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연에게 다가갔다. 하얀색 막대기를 들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아니, 실망이 가득 들어찼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우리에게 아기는 오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우린 오늘 겨우 결혼식을 올린 부부였으니까.
태준은 다연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실망하지 마. 그리고 내 몸은 항상 너한테 이끌리니까 앞으로 기회는 많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에 품에 안긴 다연의 몸이 잘게 흔들렸다. 좋은 향기를 풍기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자꾸만 하느작거렸고, 두 손으로 가린 작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태준은 당황했지만, 지금은 다연을 다독여줄 때였다.
“울어? 좀 전까지 씩씩한 척했던 거였어?”
“…….”
“울지 마. 괜찮다니까.”
“…….”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난 언제든지 준비돼 있어. 그러니까 아무 때나 말만 해. 내가 널 요리해줄 테니까.”
다연을 위로하기 위해 다시 농담을 던졌지만, 그녀의 몸은 더욱 흔들릴 뿐이었다. 무슨 말로 달래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크큭’ 하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연아? 지금 우는 거야, 웃는 거야?”
태준이 자신의 품에서 다연을 떼어내면서 묻자, 그녀가 하얀색 테스터기를 보여주며 말했다.
“아쉽지만, 당분간 태준 씨는 날 요리하지 못할 것 같은데요?”
“뭐? 그게 무슨……?”
태준은 서둘러 그녀의 손에 들린 테스터기를 보았다. 보긴 봤지만,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지는 못했다.
“두 줄이면…… 뭐야?”
태준의 눈에 두 개의 빨간색 선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태준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지나쳤다.
저 선은 무슨 의미일까? 다연이 웃었으니까 혹시 임신? 하지만 아니면 어떡하지? 내가 실망한 모습을 보이면 다연이 상처받을 텐데…….
두 줄의 의미가 무엇일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태준 씨 아빠 된대요.”
“뭐? 진짜?”
“우리가 부모가 된대요!”
무척이나 기쁜 소식에 태준은 다연을 와락 끌어안았다가 놀란 듯 다시 풀어주었다.
“놀랐지? 내가 너무 세게 끌어안았지?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고?”
“괜찮아요. 이 정도로 다치긴.”
새하얗게 질린 태준의 모습에 다연은 피식 웃었다. 원래도 ‘다연 바보’였던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심하게 자신을 애지중지할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자신도 몰랐던 임신 사실을 그의 ‘입덧’으로 알게 됐으니 말 다 했지.
“아빠가 된 소감이 어때요?”
“떨리고 두근거려. 넌?”
“나도요. 서태준, 연다연의 주니어는 어떨까 궁금해 미치겠어요.”
딸인지 아들인지, 어떻게 생긴 아이일지, 또 앞으로 어떤 아이가 될지. 모든 것이 다 궁금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태준 씨.”
“응?”
밖에서 애타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정은과 박 여사가 있었으니까.
“우리 축하 한 번 더 받으러 가요.”
“그래. 가자.”
태준이 문을 열자, 다연은 하얀 드레스를 펄럭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파란 하늘과 푸른 잔디 그리고 예쁘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 사이를 걸었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처럼.
***
시원한 바람이 불자, 마당에 핀 라일락 꽃잎이 흔들렸다. 작은 움직임에 꽃향기가 창문 안으로 들어섰고, 창가 옆 침대에 누워 있는 태준의 코끝을 스쳤다.
결혼 후 다연은 열심히 정원을 가꾸었다. 망가진 정원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쓸쓸해진다면서 꽃과 나무를 심었다. 그 덕에 매해 봄이 되면 태준은 자신이 좋아하는 라일락 꽃향기를 마음껏 맡을 수 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부드러운 커튼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밤샘 회의로 이제 겨우 침대에 누운 태준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태준의 머리 위로 인영이 드리워졌다. 인영은 한참 동안 태준의 곁을 서성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어딜 가려고.”
그때, 태준이 손을 뻗어 가는 다연의 손목을 잡았다.
“안 잤어요?”
“자려고 하는데, 네가 들어왔어.”
“내가 깨웠구나. 어서 자요. 피곤할 텐데.”
다연이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태준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잠깐만 있다가 가. 잠들 때까지만.”
“이럴 때 보면 애들 같다니까. 우리 쌍둥이들이 꼭 당신 닮았어.”
“당연하지. 서태준 주니어들인데.”
결혼식 당일 임신 소식을 알렸던 다연과 태준 커플은 이듬해에 두 사람을 똑 닮은 딸과 아들을 얻었다. 몇 초 차이로 세상에 태어난 남매는 무럭무럭 자라 지금은 무척이나 말 안 듣는 네 살 개구쟁이들이 되어 있었다.
그 덕에 다연과 태준은 아이들의 몫이 되어버렸고, 둘만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물론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애틋했지만, 태준은 항상 다연에 목말라 있었다.
태준이 자신의 팔을 톡톡 두드리자, 다연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흐음. 좋다. 자기 냄새.”
태준이 다연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시간이었다. 쌍둥이 둘이 동시에 잠드는 경우가 드문데, 오늘은 엄마, 아빠의 휴식을 위해 빨리 꿈나라로 여행을 간 모양이었다.
“오늘 피곤했지? 녀석들이 안 괴롭혔어?”
“지난주 내내 태준 씨 혼자 애들 맡았잖아요. 고작 하루 본 건데요, 뭘.”
각자 과 호텔을 운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시간 나는 사람이 돌아가면서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바빴던 두 사람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내일 아이들과 나들이 갈 계획이었다.
“내일 도시락 싸갈까요?”
“좋지. 그건 내가 준비할게.”
“아뇨. 당신은 좀 쉬어요. 내가 준비할 테니까.”
다연은 밤새워 일하고 온 태준 대신 도시락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나밖에 모르는 이 남자가 쉽게 허락을 해주지 않는다.
태준은 이불 속에 감춰진 다연의 부드러운 속살을 매만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도시락은 내가 쌀게. 당신은 날 요리해야지.”
“애들 잔다고 고새를 못 참고 유혹하는 거예요?”
요리해달라는 말만 들으면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지. 다연은 태준과 자신이 결혼 5년 차 부부가 아닌 알콩달콩 밀당하는 연인처럼 느껴졌다.
치마 속으로 들어온 태준의 손길이 다연의 민감한 곳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온몸이 짜릿해지며 모든 감각이 한 곳에 몰려버렸다.
다연은 고개를 돌려 태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기다렸다는 듯 태준은 그녀의 입술을 잡아 삼켰고, 그의 혀가 다연의 입안 곳곳을 훑었다.
은밀하고 촉촉한 숨결과 살결이 서로 맞부딪히고 있을 때였다.
“엄마아.”
“아빠아.”
어디선가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다연과 태준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와 옷을 수습했다.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신없이 정리하고 있을 때, 문이 빼꼼 열리며 개구쟁이 둘이 뛰어와 엄마와 아빠의 품에 안겼다.
“엄마, 여기서 뭐 하고 이떠떠?”
“응? 엄마. 아빠랑 얘기하고 있었지.”
다연은 대충 둘러대며 말을 돌렸다.
“근데 우리 서준이는 왜 벌써 일어났어요?”
“나 배고파.”
서준이가 작은 손으로 자신의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태준과 꼭 닮은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다연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빠. 서유니도 배고파요.”
가만히 보고 있던 딸 서윤도 거들자, 이번에는 딸바보 태준이 한여름 아스팔트 위의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으며 딸아이를 넓은 품에 안았다.
두 아이는 몹시도 배가 고팠는지 다연을 향해 말했다.
“엄마. 서주니 요리해주세요.”
“엄마아. 서유니도 꼬마 김밥 요리해주세요.”
며칠 전 다연이 해준 꼬마 김밥이 맛있었는지, 서준과 서윤이 보채기 시작했다.
“그래요. 엄마가 우리 서윤이, 서준이 맛있는 요리 해줄게요.”
다연이 두 아이의 통통한 볼에 입술을 맞추고 주방으로 발길을 돌리려고 하자, 누군가 그녀의 치마를 붙잡았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린 다연은 자신의 치마를 잡은 사람이 아이들이 아닌 태준임을 알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퉁하게 솟은 입술을 보아하니 뭔가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요?”
왜 저러는지 전혀 예측도 안 된 다연이 묻자, 태준이 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요리해줘.”
다연은 애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는 듯 눈빛으로 그를 타박하고는 피식 웃으며 두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행히 쌍둥이는 서로 손장난하며 정신없이 놀고 있었다. 하긴 엄마와 아빠만이 알고 있는 요리해달라는 말의 뜻을 아이들이 알 리가 없을 테니까.
그제야 안심이 된 다연이 태준을 향해 눈을 흘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이따 요리해줄게요. 애들 재우고.”
아주 화끈하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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