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청명한 5월.
파란 하늘에는 솜사탕을 흩뿌려놓은 듯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고, 호텔 정원에는 보랏빛 라일락꽃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달콤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다연은 폭신폭신한 잔디를 밟으며 결혼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태준과 찍은 사진을 테이블 위에 진열하고 장식 꽃을 정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결혼식 전에 신부 보면 안 되는 것도 몰라요?”
“저 끝에서 보는데, 여기서 뭔가가 반짝반짝 예쁜 게 빛나고 있는 거야. 너무 예쁜 게 저 끝까지 보이니까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치. 말이라도 못하면.”
다연이 몸을 돌리자, 근사한 턱시도를 입은 태준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정말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다.
“근데 아무리 이런 곳에서 결혼하는 게 내 로망이라고 해도 이건 좀 과한 거 아니에요?”
“뭐가 과해? 오늘따라 내 미모가 너무 과한가?”
장난스러운 태준의 대답에 다연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야외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 언제 호텔을 지어달라고 했어요?”
“그럼 어떡해? 호텔은 이미 몇 년 전에 공사가 시작됐고, 우리 결혼식 전에 때마침 공사가 끝났는데?”
다연이 에 근무하고 있을 때, 태준은 사업을 넓히며 호텔을 짓고 있었다. 호텔 안에는 에서 출시한 모든 브랜드가 입점하여 있었고, 다연의 레시피로 만든 식당인 도 오픈할 예정이었다.
지금 호텔은 아직 오픈 전이었고, 그 전에 다연과 태준의 결혼식이 열리는 것이었다.
“꿈 같아요.”
“뭐가? 나랑 결혼하는 게, 아니면 이 호텔이 네 것이라는 게?”
태준이 짓궂게 묻자, 다연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당연히 이 호텔이 내 거라는 게 꿈 같죠.”
“뭐라고?”
태준이 다연을 와락 끌어안자, 두 사람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잔디 위에 솟아 있는 호텔을 바라보았다.
“운영 잘해.”
태준은 생일 선물로 호텔을 다연에게 맡겼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모든 식당은 물론, 호텔 경영까지.
처음에는 거절했다. 에 입사해 다연이 했던 일은 레시피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호텔 운영이라니. 능력 밖이라고 생각했고, 선물로 받기에는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준의 생각은 굳건했다. 그는 다연의 요리 실력을 믿었고, 경영 수완까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관광지도 아닌 시골에서 그 많은 손님을 만들어 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와줄 거죠?”
“당연하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이렇게 예쁜 호텔을 짓고, 직접 운영하게 되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이 우리의 결혼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제 손님 맞으러 가볼까요, 신랑님?”
“그럴까요, 신부님?”
태준이 팔을 내밀자, 다연이 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이라도 하듯 하늘은 몹시도 예뻤다. 하얀색 도화지에 파란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 그림처럼 예쁜 하늘과 우수수 쏟아지는 보랏빛 라일락 꽃잎. 그리고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많은 사람.
정말 꿈 같은 하루가 이제 막 시작됐다.
***
“야! 이 나쁜 년아!”
찰진 욕으로 다연의 결혼을 축하한 건 다름 아닌 유미였다.
3년 전. 아니, 해가 지났으니 4년 전, 다연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후 그녀를 찾아 헤맨 건 비단 태준뿐만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다연을 걱정하고 보고 싶어 했던 건 바로 유미였다.
“어떻게 그동안 연락 한 번을 안 해! 이 나쁜 년! 독한 년!”
유미는 안고 있는 아기의 주먹으로 다연을 찰싹찰싹 때렸지만, 아프기는커녕 더 맞고 싶은 지경이었다.
“꺅! 얘가 박유미 주니어야? 너무 예쁘다.”
다연은 들고 있던 부케를 유미에게 던지듯 주고는 아이를 대신 안았다. 이제 막 백 일이 지난 아이는 유미를 쏙 빼닮았다.
서울에 올라온 다연은 대략적인 것을 정리한 후에 유미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그때 유미는 만삭인 상태였다. 다연의 연락을 받자마자 울기부터 했기에 만남은 조금 미뤄둔 상태였고, 출산 후 육아에 시달리던 유미는 이제야 겨우 다연과 만난 것이었다.
“결국, 둘이 결혼을 하는구만.”
“왜? 안 할 줄 알았어?”
“너 회사 그만뒀을 때, 뭐라고 소문 돌았는지 알아?”
“나야 모르지.”
“작은 대표님한테 대차게 차이고 히키코모리가 됐다나, 생을 마감했다나.”
“누가 내 인생을 그렇게 마음대로 마감시켜?”
“누구긴 누구야? 너 그만뒀다는 말에 아주 신나서 떠들고 다니던데.”
유미는 구석에서 힐끗힐끗 눈치를 살피는 주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데 넌 참 속도 좋다. 강주은을 호텔로 데리고 오고 싶디?”
태준이 처음 호텔을 맡겼을 때, 다연은 주은을 제 밑으로 데리고 왔다. 남들은 미쳤다며 혀를 끌끌 찼지만, 다연의 생각은 달랐다. 바로 옆에 두고 자근자근 밟으며 일을 가르칠 생각이었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쟤가 너 없는 동안 얼마나 네 뒤 담화를 하고 다녔는지 알아?”
유미가 주은은 안 된다며 계속 말을 이었지만, 다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그녀만의 방법으로 눌러주면 되니까.
오랜만에 만난 유미는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지만, 다연의 눈과 귀는 아이에게 쏠려 있었다. 어쩜 이렇게 작은 손에서 저런 힘이 나는지. 제 손을 꼭 잡는 아기가 너무 신기하고 예뻤다.
“아이고, 이모 손가락 잡아떠요? 아고, 이모가 좋아요?”
“좋아 죽네, 좋아 죽어. 너, 애부터 가져야겠다.”
“그러고 싶어. 너무 예쁘다.”
“어떻게 오늘 확! 허니문 베이비 만들어. 응?”
다연이 유미 주니어를 보며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을 때, 태준은 북극 한복판에 와있는 듯 싸늘한 눈빛으로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입니다.”
태준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비꼬듯 인사한 상대는 다름 아닌 서원이었다.
사라진 다연을 찾기 위해 태준이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바로 서원이었다. 다연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었기에 희망을 안고 찾아갔지만, 그는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게다가 다연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서원의 아이를 보며 둘이 결혼한 줄로 오해하기까지.
그런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보게 되니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다연이와 연락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근데 우리 결혼하는 건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입이 꽤 무거운 편이라서요.”
“입이 무거운 게 아니고 거짓말을 잘하는 것 같은데요?”
“절실한 친구의 부탁을 그냥 지나칠 순 없어서 선의의 거짓말을 좀 했을 뿐입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이죠.”
“설마 그때 그 일로 여태까지 꽁해 있는 건 아니죠?”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태준의 다리에 부딪혔다. 고개를 숙여보니, 웬 꼬마 아이가 태준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고, 우리 도윤이 왔어요?”
서원이 상체를 숙여 아이를 안으려고 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태준에게 안아달라고 떼를 썼다.
“아빠, 아빠. 안아줘.”
“아……빠?”
“안아줘. 아빠.”
“어? 어. 그래…….”
태준은 저더러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 때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아이는 태준의 품이 편한지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 폭 안겼다.
아이의 작은 몸이 제 심장에 닿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감격스럽기도 했고,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이 작은 생명이 왜 이리도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지…….
“이 녀석. 서태준 씨가 마음에 드나 봅니다.”
“네? 제가요?”
“낯을 가리는 편인데, 이렇게 안기는 걸 보면 아주 마음에 든다는 뜻이죠.”
“아…….”
신기했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제 품에 안겼을 뿐인데,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고, 오만가지 감정이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리고 몹시도 궁금해졌다.
“진서원 씨.”
“예?”
“아빠가 되는 건 어떤 기분입니까?”
****
결혼식은 주례 없이 진행됐다. 아버지가 없는 다연은 태준과 함께 동시 입장했고, 그들이 가는 길은 서원의 아들인 도윤이 화동으로 나서주었다.
다연과 태준은 미리 준비해 온 결혼 서약서를 읽었고, 반지를 나눠 꼈으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는 정은과 박 여사가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훔쳤다.
“사돈. 우리 태준이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당연한 말씀을. 전 아들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저도 우리 다연이 딸처럼 귀하게 여기겠습니다.”
이미 큰 사건을 겪었던 터라 양쪽 집안의 어른들은 최대한 예의를 지켰고, 서로에게 상처 입힐만한 말이나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어쨌든 제 자식에게 각각 다연과 태준이 어떤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장모님. 식사는 입맛에 좀 맞으셨습니까?”
“어머님. 식사 좀 하셨어요?”
식을 모두 마친 태준과 다연이 어른들께 인사하기 위해 다가오자, 정은과 박 여사는 각자 사위와 며느리의 손을 잡으며 그들을 반겼다.
“아이고, 우리 사위. 우리 사위가 대접해 준 밥이 왜 이렇게 맛있는지, 두 그릇이나 먹었네.”
“사돈. 여기 음식은 우리 며느리가 준비한 거랍니다. 우리 며느리가 레시피 개발을 참 잘하거든요.”
“그것도 다 우리 사위가 지원을 아끼지 않아서 가능했던 거죠.”
“어머,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 며느리는 능력 덕에 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거죠.”
사위와 며느리 자랑에 민망함은 태준과 다연의 몫이 되어버렸다. 난데없는 칭찬 릴레이에 몸 둘 바를 몰랐지만, 두 사람은 무척이나 행복했다. 다른 집들은 고부갈등에 장서 갈등까지 있다는데, 여기는 장모와 사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환상의 짝꿍처럼 사이가 좋았다.
“우리 사위, 오늘 고생 많았지? 육전 맛있던데, 좀 먹어봐.”
정은이 맛깔스러운 육전을 집어 권하자, 태준이 살갑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육전이 태준의 입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우욱.”
태준이 헛구역질을 했다.
“왜 그래, 서 서방?”
“태준 씨, 속 안 좋아요?”
“오전에 과식했니?”
여자 셋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살살 속이 안 좋더니 기름 냄새나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니 역한 기운이 올라왔다. 하지만 장모님이 주는 음식을 거절할 수 없었던 태준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장모님, 육전 다시 주세요.”
“자네 약 안 먹어도 되겠어?”
정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태준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요. 사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팠거든요.”
“그래? 그럼.”
정은이 다시 육전을 집어 태준의 입에 넣어주려고 하자.
“우욱!”
다시 태준이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자 정은과 박 여사가 서로 눈빛을 나누더니, 동시에 다연을 바라보았다.
“아가. 넌 괜찮아?”
“네? 전 괜찮아요. 근데 태준 씨 먹은 것도 없는데 왜 그러지?”
“다연아, 혹시 너 그거…… 하니?”
“응? 그거? 그게 뭐지……?”
태준이 구역질을 하는데, 그걸 하냐니? 그게 무슨 말이지?
정은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다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뒤늦게 눈치채고는 피식 웃었다.
“에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둘째 문제고. 일단 해, 안 해?”
정은이 다급하게 묻자, 옆에 있던 박 여사가 기대 가득한 눈으로 다연을 바라보았다.
태준은 분명 여자들이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음에도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뭔지,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손가락을 접어 뭔가를 계산하던 다연이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몇 주나 안 했네요…….”
얼떨떨해하는 다연의 대답에 정은과 박 여사의 입가에 세상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