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연말이라서 그런지 늦은 시각임에도 밖은 꽤 떠들썩했다. 거리 곳곳에는 크리스마스의 여운이 길게 남아있었고,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차가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연은 태준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여유롭게 산책을 즐겼다. 겨울이지만 날이 그렇게 춥지 않아 산책하는 데 별 무리는 없었다.
“우리 결혼식, 언제 할까?”
태준의 질문에 다연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결혼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은 해봤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뭔가 이상했다.
강아지풀로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배를 타고 파도를 맞이한 것 같기도 했다. ‘결혼’이라는 단어 하나만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간질간질하고 막 울렁울렁거리다니.
“태준 씨는요?”
“난 네가 원할 때면 언제든 상관없어. 다만…….”
“다만?”
“너무 늦진 않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태준은 지금 당장에라도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다. 양가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진 마당에, 다연과 자신의 마음이 확실한 이상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연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을 다연을 배려해주고 싶었다.
“나 어렸을 때 영화를 한 편 봤는데, 화관을 쓴 신부가 푸릇한 잔디를 밟으면서 결혼식을 하는데, 너무 예쁜 거 있죠?”
잠자코 다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준의 표정에 묘한 균열이 생겼다. 뭐든 다연의 뜻에 맞출 생각이긴 했지만…….
“봄에 하자고?”
“나 그 영화 보고 나서부터 5월의 신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누구 말려 죽일 생각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식 올리고, 혼인신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5월이라니?
“왜요? 태준 씨는 싫어요?”
“아, 아니. 싫은 건 아니고.”
“에이. 표정 보니까 싫은데? 말해봐요. 태준 씨는 언제 하고 싶어요? 솔직히 말해줘요.”
다연이 보채자 태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지.”
안다. 그래서 답답하고, 그래서 더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결혼 전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른 건 몰라도 상견례는 꼭 해야 하고요.”
이 또한 다연의 말이 맞았다. 과정을 최대한 줄인다고 해도 양가 식구들이 서로 인사할 시간은 필요했다.
“네가 원할 때 하자. 대신…….”
“대신?”
“그때까지 같이 살아.”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결혼식을 5월에 하든 6월에 하든 뭐든 다연의 뜻에 맞출 수 있었지만, 그녀와 떨어져 지내기는 싫었다. 단 1초도.
“응? 그렇게 해줄 수 있어?”
태준은 어느새 거절할 수 없는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다연을 공격하고 있었다. 거절은 거절한다는 눈빛을 발사하면서 말이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어차피 다연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식당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다연도 태준과 단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럼 결혼식은 어디서 하고 싶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야외 결혼식 하고 싶어요.”
태준은 조금 전 다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상상했다.
햇살이 아주 좋은 날, 푸릇푸릇한 잔디가 깔린 곳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다연과 자신이 사랑을 맹세하는 모습을.
“좋은 곳이 떠올랐어. 가자.”
태준은 다연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
웅장한 건물 앞에 도착한 다연은 떡 벌어진 입을 닫지 못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건물은 무척이나 고급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여기가 어디예요? 호텔인가?”
“어때? 마음에 들어?”
“네. 너무 예뻐요.”
“그래?”
“근데 아직 오픈 전인가 봐요. 불도 안 켜져있고, 사람도 없고.”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긴 했지만, 영업하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썰렁했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조차 없는 걸 보면.
“들어가 볼까?”
“그래도 돼요? 영업 안 하는 것 같은데.”
“뭐 어때. 나가라고 하면 나가면 되지.”
태준의 말에 다연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호텔에 오니 옛날 생각이 났다. 태준과 처음 만난 날 만취한 상태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 비싼 객실에서 묵으면서도 즐기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기억이 있었다.
“와. 예쁘다.”
금잔디가 펼쳐진 정원에 들어서자 굴곡이 너무도 멋스러운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주변에는 새빨간 동백꽃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져 있었고,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연못이 정겹게 다연을 반기고 있었다.
“겨울에 이 정도면 봄에는 더 예쁠 것 같아요.”
금잔디가 초록색으로 바뀌고 동백꽃 대신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면 너무도 아름다울 것 같았다.
“정말 그렇게 예뻐?”
“응. 정말. 너무 예뻐요.”
“그럼 우리, 여기서 결혼할까?”
갑작스러운 태준의 말에 다연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돌아보았다.
“여기서요?”
“응. 여기서.”
확신에 찬 태준의 대답에 다연은 뛸 듯이 기뻤다. 비록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컴컴한 밤에, 봄도 아닌 겨울에 본 곳이었지만, 다연은 이곳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마치 예전부터 알았던 곳인 것처럼.
“좋아요. 너무 좋아요.”
좋다는 허락에 태준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놀란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고, 태준은 미리 준비해온 반지를 꺼냈다.
“살면서 같은 여자한테 청혼을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다연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두 번의 청혼을 하기까지 태준이 얼마나 힘든 길을 걸었는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
태준은 가늘고 긴 다연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
“나와 결혼해줄래?”
진심이 가득 담기 태준의 프러포즈에 어느새 다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의 말처럼 다연도 같은 남자에게 두 번의 프러포즈를 받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미 한 번 프러포즈를 받았으니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프러포즈를 해주니 놀랍고 기쁠 따름이었다.
“네. 태준 씨와 결혼할래요.”
다연이 대답하자,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들어왔고, 다연은 그의 숨결을 받아들이며 차갑게 식은 입술을 훑었다. 야들한 속살을 살짝 깨물던 태준이 입술을 놓아주자 달콤한 향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웠다.
태준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다연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다연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머리 위에 있던 조명이 밝게 빛을 냈다.
“어머, 호텔에 사람이 있나 봐요?”
의아해하고 있을 때, 길게 늘어선 가로등이 차례로 불을 밝혔고, 가로등을 시작으로 정원과 호텔 건물의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불이 환하게 켜지자 드넓게 펼쳐진 호텔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호텔 본건물은 물론 다연이 서 있는 한옥 건물까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거기에 분수대의 물까지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태준과 다연의 사랑을 축복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설마 이거, 태준 씨가 다 준비한 거예요?”
자신을 호텔로 이끈 것 하며, 청혼과 함께 캄캄했던 호텔에 아름다운 조명이 켜진 것까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태준이 준비한 이벤트가 분명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다마다요. 너무 마음에 들어서 눈물 날 것 같아요.”
3년 전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받은 청혼도 무척이나 감격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서프라이즈 이벤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멀고 험한 길을 돌고 돌아온 이 남자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 나를 향한 이 남자의 직진이 너무도 멋지고, 감사했다.
이 남자가 정말 내 남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나밖에 모르는 이 바보 같은 남자가,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아끼는 미련한 이 남자가 내 남자가 된다니, 눈물 날 정도로 가슴이 벅차고 행복했다.
“이제 정말 우리 결혼하는 거죠?”
“응. 정말 결혼하는 거야.”
“이제 정말 태준 씨 내 남자죠?”
“넌 이제 평생 내 여자고.”
“좋다. 너무 좋다.”
어느새 다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까부터 샘솟는 눈물을 겨우 참았는데, 이제는 못 버틸 것 같았다. 화장이 지워지든 말든 이제 신경 쓰지 말고 펑펑 울어야지.
“아직 울긴 이른데?”
다연이 훌쩍거리자, 태준이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네? 뭐가요?”
이르다는 말은 뭔가가 또 있다는 건데, 이 이상의 서프라이즈는 예상할 수 없었다.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뭐가 더 남아있는지 궁금했던 다연이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지만, 태준은 말이 없었다. 다만 한참 동안 손목시계를 보고 있더니 갑자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55, 56, 57, 58, 59, 땡! 생일 축하해.”
12시가 되자마자 태준은 다연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아, 맞다. 오늘 내 생일지.”
“생일 한 번 챙겨주기 되게 힘들다. 이번 생일만큼은 내가 가장 먼저 축하해주고 싶었어.”
지난 16년 동안 단 하루도 잊지 않았던 날이자 꼭 챙겨주고 싶었던 날. 12월 31일은 태준에게 고마운 게 너무도 많은 날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마워. 이 세상에 태어나 수많은 남자 중에 나를 만나줘서 고맙고, 날 사랑해줘서 고맙고 또 앞으로 나와 함께 해준다니 더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다연은 제 존재가 더 값지고 귀하게 느껴졌다. 고맙다는 말이 이토록 듣기 좋은 말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고마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결국, 다연의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생일 선물도 있는데. 선물 받고 더 우는 거 아니야? 울보는 싫은데.”
“치. 뭔데 그렇게 자신만만해요?”
다연이 눈을 흘기며 묻자, 태준이 그녀의 뒤로 가서 어깨를 붙잡고 호텔을 향해 그녀의 몸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웅장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호텔이 다연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아까는 호텔에 반짝반짝 불이 들어오는 이벤트였으니 이번에는 혹시 불꽃놀이 같은 걸까?
그렇게 예상하며 한참 동안 눈 앞에 펼쳐질 불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저게 네 생일 선물이야.”
“저게 내 선물이라고요?”
“응.”
눈앞에 있는 거라고는 거대한 호텔 건물과 아름다운 정원뿐이었다. 그런데 뭘 가리키며 생일 선물이라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저기에는 호텔밖에 없는데?”
끝내 다연이 묻자, 태준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게 네 생일 선물이라고.”
이게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은 다연은 몸을 돌려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저게 내 생일 선물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 호텔, 내가 준비한 네 생일 선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