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태준은 제 앞을 가로막는 빨간색 스포츠카 때문에 걸음을 멈췄다. 운전석 창문이 열리지 않았지만, 차 주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린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창문이 내려가며 인경이 고개를 내밀었다.
“심부름시켜놓고 어디 가?”
“나도 비위라는 게 있거든.”
태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인경이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 사이에 껴서 꽁냥거리는 거 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인경이 말에 피식 웃던 태준은 그녀가 주문한 케이크를 내밀었다.
“민트 초코케이크. 제일 큰 거로 샀어.”
“선배.”
“왜?”
“내가 왜 민트 초코를 좋아했는지 알아?”
인경의 질문에 태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다연이면 몰라도 인경의 취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민트를 먹고 있으면 내가 괜히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거든.”
“뭐?”
“양치질하는 기분이랄까? 민트를 먹으면 내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낸 기분이 들었어.”
태준에게 민트는 불호였다. 민트 초코를 좋아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데, 좋아하는 이유까지 이상했다. 양심을 양치질하는 기분이라고?
“그런 얘기를 왜 하는 거야?”
“이제 내 양심을 씻을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자신의 말이 이상하다는 건 인경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자 있는 그를 마음에 품을 때마다 양심이 찔렸고, 그때마다 인경은 민트 초코를 먹었다. 양심을 씻어낸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이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인경은 태준에게 그걸 알려주고 싶었다. 이제 내 마음에서 넌 영원히 아웃이라는 걸.
“케이크 필요 없어. 선배나 먹어.”
“뭐? 이거 사러 사거리까지 갔다 왔어.”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태준은 막무가내인 인경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뭐가 저렇게 제 멋대로인지.
“어서 가봐. 다연 씨 혼자 기다리겠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나 선보러 가.”
“웬일이야? 죽을 때까지 선보는 일은 없을 거라더니.”
그땐 죽을 때까지 마음에서 서태준을 내보낼 일이 없을 줄 알았으니까.
인경은 그 말은 하지 않고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억울해서 안 되겠어. 죽기 전에 남자 한 번은 만나봐야지. 간다.”
인경은 태준이 인사도 하기 전에 액셀을 밟았다.
정말 특이한 녀석이다. 고마운 후배이기도 하고. 태준은 피식 웃고 혼자 있을 다연을 떠올리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앞에 도착한 태준은 활짝 열려 있는 차고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도 안 닫고 갔네.”
인경이 잘 치우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뭐든 쓰면 제자리에 두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차고 문을 안 닫고 간 건지.
문을 닫기 위해 차고 앞에 선 태준은 안을 보고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차고 안에 어머니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태준은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혼자 있는 다연에게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한 건 아닌지, 가슴을 후벼파는 말로 또 다연에게 상처 주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들어간 태준의 시야에 누군가가 무릎을 꿇는 모습이 보였다. 현관문과 거실 사이에 러그가 세워져 있어 그게 누군지 확실히 보이진 않았지만, 짐작은 갔다.
그동안 이해하게끔 다 설명해드렸는데, 나 없는 사이에 내 여자를 무릎 꿇리다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는 것 같았다.
“어머니!”
다시는 다연을 잃지 않을 거다. 그 누구든 그녀와 자신의 사이를 가를 순 없다. 그게 비록 어머니일지라도!
“어머니! 지금 뭐 하시는……!”
서 있는 사람에게 달려가 소리치던 태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서 있는 건 다연이었고, 무릎을 꿇고 있는 건 어머니였으니까.
태준은 떨리는 눈으로 두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박 여사를 일으켜 세우려 하고 있었고, 박 여사는 고집스럽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태준 씨, 어머님 좀 말려 봐요.”
태준을 발견한 다연이 난감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준이 박 여사에게 다가갔다. 태준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강건했다.
“일어나세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미안해요……. 다연 씨.”
예상치 못한 말에 태준의 입이 벌어졌고, 뒤에 서 있던 다연은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두 사람은 서울에 올라와 태준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을 생각이었다. 만약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다. 더 이상의 이별은 없을 거라고 약속한 두 사람의 뜻은 확고했으니까.
그런데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할 줄 알았던 어머니가 이렇게 나올 줄이야. 너무 놀랐고 얼떨떨했다.
“내가 미안했어요. 우리 태준이한테 다연 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박 여사에게 태준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였다.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닳을까 애태우고,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터질까 애끓는, 그런 사랑은 자신만이 베풀 수 있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 있었다. 10여 년 전 교통사고 후 생사를 헤매던 아들을 일으켜 세웠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다. 다연이 떠난 후 태준은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도, 관심을 쏟아도, 아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박 여사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에는 오만이 가득했다는 것을, 조건 없는 사랑은 나뿐만이 아니라 저들도 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박 여사는 3년 전, 아들의 집에서 나오며 마주쳤던 인경에게 부탁했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태준이 다연을 찾아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다연을 찾으면 아들은 다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거고, 그것만으로도 박 여사는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연이 돌아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박 여사는 기뻤다. 아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었으니까.
“다연 씨. 나 부탁이 있어요.”
박 여사가 손을 내밀자, 다연이 손을 내밀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제 우리 태준이 곁을 다연 씨가 지켜줄래요?”
진심 어린 박 여사의 말에 다연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그 어느 때보다 기뻤고,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어머님?”
다연이 묻자, 박 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가 미안해요. 정말 미안했어요.”
“아니에요. 어머님 심정 이해해요.”
엄마는 매일같이 말했다. 태준의 어머니를 미워하지 말라고. 엄마가 되면 너도 그 심정 이해하게 될 거라고. 엄마한테 그런 일이 생기면 엄마도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고. 원래 엄마들은 자식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이지만, 자식 일에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독해진다고. 그러니 태준의 어머니 너무 많이 원망하지 말라고.
그래서 다연은 박 여사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고마웠다.
“저희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님. 저희 행복하게 잘 살게요.”
“그래요. 꼭 행복해요. 꼭…….”
“말씀 놓으시고요.”
“그래도 될까?”
“그럼요.”
다연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자, 박 여사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주 가까운 길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그 길 위에서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고 또 누군가는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들의 앞에는 꽃길만이 가득할 것이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큼 아름다운 꽃길이.
***
박 여사가 돌아간 뒤, 다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소파에 앉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가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뭔가 생각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말은 없었다.
“저기 다연아…….”
“태준 씨.”
“어, 그래. 말해.”
“내 볼 좀 꼬집어 줄래요?”
“뭐?”
“나 좀 꼬집어 보라고요. 꿈인지 진짜인지 확인 좀 하게.”
모든 게 꿈만 같았다. 태준의 부모님을 만날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는데, 하늘에서 선물이 뚝 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아 태준을 향해 볼을 내밀고 있자, 아찔한 아픔 대신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태준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아이, 뭐예요? 꼬집어 달라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아까워 죽겠는데, 꼬집긴 왜 꼬집어?”
어쩜 이 남자는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그렇게 확인하고 싶으면 차라리 날 꼬집어.”
태준은 절대 다연을 꼬집지 않겠다며 대신 제 볼을 내밀었다.
사소한 일에 뭐 저렇게까지 비장한 건지.
다연은 태준의 그런 모습까지 너무도 사랑스러워 그의 볼에 입술을 갖다 댔다.
“쪽.”
“뭐야?”
“태준 씨만 아까운 줄 알아요? 나도 태준 씨 아깝거든요. 앞으로 평생 같이 살 남자인데, 아껴야지.”
다연이 태준의 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자, 태준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내 아내가 된다니. 태준도 꿈만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연아.”
“응?”
“넌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너무도 진지한 태준의 물음에 다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응? 대답해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다연은 태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태준 씨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멋있어요?”
다연의 질문에 태준은 졌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낯간지러운 질문이었지만,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렸고, 너무 기뻐서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이제 우리는 연인이 아닌 부부가 된다. 그러려면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태준은 그 첫 번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우리.”
“이 밤에 어딜요?”
“갈 데가 있어. 옷 입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