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이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안 거죠?”
뒷걸음질 치는 인경은 문득 다연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꼈다. 순하게 생긴 얼굴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저 광기와 독기! 태준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드러내는 맹수 같은 모습!
순식간에 돌변해버린 다연을 보며 인경은 확신했다. 책이나 영화에서만 봤던 다중인격자가 확실하다고!
정신학적으로 해리성 장애는 어렸을 때 심한 학대나 정신적 외상의 충격을 당했을 때 시작된다. 그러니까 지금 다연은 평소 그녀의 인격이 아닌 또 다른 폭력적 인격이 튀어…… 나오기는 개뿔!
남자친구 집에 말도 없이 와 있어서 열 받은 거지! 전문 용어로 빡쳤다! 그것도 완전히!
“저, 저기…… 다연 씨? 릴렉스, 릴렉스 하자고.”
인경은 다연을 안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잘못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아, 그동안 너무 설쳤다. 선배 핸드폰에 ‘토요일의 여자’로 저장한 거, 비밀번호 안다고 집주인 허락도 없이 드나든 거, 막무가내로 회사에 쳐들어간 거, 그리고 주치의의 탈을 쓰고…….
“악! 우리 말로 해요. 말로. 조금 진정하고, 앉아서…… 히익!”
인경이 속으로 그동안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을 때, 다연이 확 달려들어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그리고 뜻밖의 말이 다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도 비밀번호 좀 알려주면 안 돼요?”
“예에? 지금 뭐라고 했어요?”
잔뜩 졸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인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나도 태준 씨 집 비밀번호 알고 싶어요. 알려주시면 안 돼요, 언니?”
“언……니?”
다연의 반응도 놀라웠지만, 언니라니? 호칭마저도 신선했다. 아니, 그보다.
“이 집 비밀번호 몰라요?”
그게 더 의외였다. 태준은 아주 오랫동안 하나의 비밀번호를 사용해왔다. 집은 물론 핸드폰 비밀번호와 이메일 패스워드에도 이 숫자를 썼다.
그런데 그걸 다연이 모르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서태준이 사랑해 마지 못하는 연다연이?
“그동안 이 집에 안 와봤어요?”
인경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다연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와보긴 했는데, 비밀번호는 모르거든요. 태준 씨가 먼저 알려주면 모를까 알려달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태준 씨도 사생활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오고 싶으면 같이 오면 되지’라고 생각했기에 굳이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도 자신의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묻지 않았고 말이다.
그런데 인경이 그의 집에 와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는 걸 인경이 알고 있는 게 서운하기도 했다. 서운하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보다 더 큰 게 있었다.
‘나도 인경 언니처럼 몰래 와서 서프라이즈 해보고 싶다.’
다연은 아까 집에 들어왔을 때 인경을 보고 생각했다. ‘태준 씨 몰래 집에 와서 맛있는 음식을 해놓으면 깜짝 놀라겠지?’라고.
그래서 강력하게 알고 싶어졌다. 이 집의 비밀번호를!
“선배한테 물어보지 그랬어요? 당연히 알려줬을 텐데.”
다연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자신한테도 오픈된 비밀번호를 그녀에게 숨길 리가 없었다.
“여태 안 알려준 걸 보면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해서요.”
다연은 서프라이즈 얘기는 굳이 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 그러자 인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부끄러워서 말 안 했나 보다.”
“부끄러워서요?”
비밀번호에 부끄럽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지?
다연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자, 인경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1231. 이 집 비밀번호예요.”
1231? 네 자리 숫자를 들은 순간, 다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태준 선배의 모든 패스워드에는 1231이라는 숫자가 들어가요. 집 비밀번호도, 핸드폰 비밀번호도, 그리고 이메일 패스워드에도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고?
“12월 31일. 다연 씨 생일이죠?”
인경의 질문에 다연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챙겨주고 싶었대요. 만약 죽을 때까지 다시 다연 씨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기억하고 싶었대요.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태어난 날을.”
16년 전. 사고로 다연과 헤어진 날이 크리스마스였다. 며칠 후면 다연의 생일이었지만, 챙겨 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멀리 떨어진 상태였고, 태준은 의식조차 없었으니까.
태준은 다연의 생일을 잊지 않기 위해 모든 비밀번호를 그녀의 생일로 지정했다.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그녀를 떠올리기 위해서.
“내가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데도 바꾸지 않은 이유는 그거 하나일 거예요. 다연 씨 생일을 못 챙겨줘서.”
3년 전 다시 만났을 때도 태준은 다연의 생일을 챙겨주지 못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신의 질투인지, 두 사람은 또 크리스마스에 이별해야 했고, 긴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다.
“선배는 아마 다연 씨 생일 챙겨준 다음에 얄짤 없이 비밀번호 바꿀걸요? 나 못 오게.”
인경의 말에 눈물이 핑 돌고, 코끝이 찡해졌다. 인경만 앞에 있지 않았으면 왈칵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향한 서태준의 사랑이 보통 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뭐 이렇게 멋있어…….”
다연이 울먹이며 중얼거리자, 인경이 다리 스무 개 달린 벌레라도 본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연 씨. 설마 우리가 조금 친해졌다고 내 앞에서 남친 자랑하는 건 아니죠?”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있죠? 세상에 그런 남자가 어딨어.”
“와. 세상에 이런 여자는 또 어딨어. 솔로 가슴에 불을 지펴도 유분수지. 내 앞에서 남친 자랑하는 거예요?”
인경이 버럭 화를 냈지만, 다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서태준 생각뿐이었으니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자, 첫사랑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뒤진 남자. 나를 잊지 않기 위해 내 생일을 매일같이 기억하는 남자.
그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멋있고 기특한데.
“우리 태준 씨 진짜 멋있다. 언니가 봐도 그렇죠?”
“안 멋있어요.”
“왜요, 엄청나게 멋있지 않아요?”
“강요하지 말아요. 내가 선배한테 어떤 마음 품었는지 알면 그런 말 못 할 테니까.”
“예? 뭐라고 그랬어요?”
“못 들었으면 됐어요. 암튼 두 사람 다시 만난 거 축하해요.”
태준에게 다연이 첫사랑이었다면, 인경에게는 태준이 첫사랑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픔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그의 행복이 내 일처럼 기뻤다. 물론 눈앞에서 닭살 짓 하는 건 죽어도 보기 싫지만.
“선배는 다연 씨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연 씨 사랑해요.”
인경은 그의 옆에서 모든 걸 다 지켜보았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던 태준이었지만, 다연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를 잃었을 땐 미친 듯이 괴로워했고, 그녀를 찾았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를 존경하던 후배이자, 누구보다 그의 건강을 빌던 주치의이자, 그를 열렬히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인경은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이제 두 사람 앞에 꽃길만 있길 바랄게요. 행복해요.”
“고마워요, 언니. 언니 덕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다연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태준에게 들었다. 인경의 응원 덕에 기운 낼 수 있었고,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고. 다연은 알게 모르게 힘써준 인경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나 이만 갈래요.”
“왜요? 태준 씨 오면 케이크 먹고 가요.”
“오랜만에 만난 커플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방해 아니에요. 바쁜 거 아니면 더 놀다 가요.”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거든요.”
인경은 못내 아쉬워하는 다연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만나요. 그리고 이제 무단침입 안 할게요. 선배가 하도 연락도 없이 왔다 바람처럼 사라지곤 해서 혹시나 하고 들른 거예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다연도 더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태준이 없는 사이 인사도 못 하고 가는 게 아쉬웠지만, 다음에 다시 만날 수밖에.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언니.”
“선배 통해서 연락할게요. 언제 같이 식사해요.”
인사를 마치고 나온 인경은 삭막한 마당을 둘러보았다.
땅값 비싼 동네에 대궐처럼 지은 집이 지금은 꼭 귀신이 나올 것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처럼 휑하기만 했던 곳. 하지만 이제 이곳에도 따뜻한 온기가 넘치겠지.
“이제 정말 끝이구나.”
고등학생 때부터 품었던 마음을 이제 완전히 버려야 할 때가 왔다.
지겨웠다, 짝사랑. 지긋지긋했다, 서태준. 지루했다, 내 인생. 이제 다시는 짝사랑 따위 하지 말아야지.
“날씨도 그지 같은데, 선이나 보러 갈까?”
맞선 보라고 달달 볶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쳐 갔던 곳은 항상 태준의 집이었다. 진료 핑계를 대긴 했지만, 그가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였다.
하지만 이젠 완전히 끝내야지. 아무리 서태준이 멋있고 탐나도, 임자 있는 남자 건드리는 건 반칙이니까.
“안녕. 서태준.”
쿨하게 인사를 전한 인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빠져나왔다.
한편, 혼자 남은 다연은 굳게 닫힌 현관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집 비밀번호를 굳이 묻지 않은 건,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집주인이 말해주지 않는데, 먼저 묻는 것도 웃기고.
그런데 그의 모든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었다니. 16년 동안 단 한 번도 함께하지 못한 날을 매일같이 곱씹고 있었다니.
별장에서 제게 식빵 피자를 만들어 줄 때도, 3년 전 그에게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연다연. 남자 한번 진짜 잘 만났네.”
이토록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니. 신이 내 인생의 축복은 서태준이라는 남자로 내린 것 같았다.
“후우. 슬슬 정리 좀 해볼까?”
다연은 집 정리를 하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였다. 누군가 와서 간간이 청소하는 모양인지 더럽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집안이 어둡게 느껴졌다.
“으. 추워.”
다연은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부터 시켰다. 그리고 커튼과 러그를 밝은색으로 바꾸기 위해 수납장으로 향했다.
제 키보다 큰 러그를 끙끙거리며 들고나올 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1231. 내 생일을 누르고 있을 태준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다연은 들고 손에 들고 있던 러그를 한쪽 벽에 세워놓고 태준을 반기기 위해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태준 씨, 이제 왔어요? 인경 언니는…….”
문이 열리는 순간, 다연의 눈동자가 경직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머님…….”
“다연 씨가 어떻게 여길……?”
3년 만에 다시 만난 다연과 박 여사는 서로를 보며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