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며칠 후.
“조심히 잘 다녀와.”
정은은 다연의 옷깃을 여며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연과 태준이 다시 만난 건 너무도 축하할 일이고, 행복한 일이었지만, 무작정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아직 태준의 부모님이란 큰 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까.
“어른들께 잘 말씀드려. 어쨌든 네 목숨 구해주느라 아팠던 사람이야. 어느 부모가 그런 여자를 무작정 좋아할 수 있겠어.”
정은은 태준의 부모님이 자신의 집안과 배경만 보고, 제 딸을 무작정 반대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나서 태준의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자기 같아도 싫어했을 거다. 만약 다연이나 다훈이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가 1년 넘도록 사경을 헤맸더라면, 그 사람 꼴도 보기 싫었을 거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었을까.
그래도 욕심이 있다면, 염치없지만 간곡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태준의 부모님이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내 딸이 아주 큰 신세를 졌지만, 그래서 사무치도록 고맙고 또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쪽 아들과 내 딸의 결혼을 허락해주신다면, 내 평생 무슨 짓을 해서든 그 신세 갚겠다고. 정은은 매일 밤 그렇게 빌고 또 기도했다.
“무슨 말씀하셔도 참고 들어. 네가 죄인은 아니지만, 큰 신세를 진 건 맞잖아.”
“알았어,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 잘할게.”
“응. 그래.”
다연은 제 걱정이 한가득한 엄마를 안고 다독여주었다.
서울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후, 엄마는 항상 제 걱정뿐이었다. 엄마에게 자신은 언제나 똑 부러지는 성격에 똘똘한 장녀였다. 믿음직스럽고 어떨 때는 친구처럼 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태준과 헤어진 후로 엄마는 자신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다연은 그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매일 밤 자신을 위해 비는 엄마를 보면 가슴 미어지게 아팠다. 그래서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절대로.
다연과 정은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태준과 다훈도 못다 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매형. 우리 누나 잘 부탁해요.”
“그래. 처남도 잘 지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누나 끝까지 데리고 살아야 해요.”
“당연하지. 뭘 그런 걸 걱정해.”
“부부 싸움해도 둘이 잘 해결해요. 절대 친정에 보내지 말고. 누나만 오면 내 평화가 사라진다니까요.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게임도 못 하게 하고 잔소리, 잔소리.”
“왜? 난 다연이랑 온종일 붙어 있으면 좋던데.”
태준의 말에 다훈은 콧방귀를 뀌었다. 아마도 누나는 매형 앞에서 다른 얼굴을 하고 사나 보다. 아니면 매형 눈에 콩깍지가 씌었든지.
“매형은 천사예요. 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응원합니다!”
“고마워, 처남.”
다훈과 인사를 끝낸 태준은 다연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할까?”
***
서울에 도착한 다연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모든 게 다 낯설게 느껴졌다. 지겹게 보던 높은 건물들도, 바쁘게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도. 그녀가 3년간 지냈던 곳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태준씨 집 오랜만이네.”
“좀 지저분하지? 오랫동안 집을 비웠더니 엉망이네.”
마당에 들어선 다연은 전과는 다른 풍경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예전에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곧잘 마당을 꾸미던 태준이었다. 푸릇한 잔디가 폭신하게 깔려 있었고 예쁜 꽃과 연못이 그녀를 반겨주었던 집이었다.
그런데 잔디는 다 죽어 있었고, 가지가 꺾인 나무들이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겨울이고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고 해도 마당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마치 지난 3년의 태준의 마음처럼.
내가 없는 지난 3년 동안 서태준이란 남자의 삶이 이토록 삭막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태준 씨.”
“응?”
“봄 되면 마당에 꽃 심어도 돼요?”
다연이 묻자, 태준은 뭐가 문제냐는 듯 대답했다.
“당연하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이제 네 집이니까.”
‘네 집’이라는 말에 다연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내 집은 무슨. 태준 씨 집이지.”
다연이 선을 긋자, 계단을 오르던 태준이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거는 다 네 거야.”
“왜요?”
“내가 네 거니까.”
진지함 반 스푼에 애교 반 스푼을 섞은 태준의 말투에 다연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쩜 이 남자는 이렇게 멋있으면서 귀여울 수가 있지? 멋있으면서 귀엽기도 힘든데.
몹시도 추웠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과 그의 목소리를 듣는 귀 그리고 그의 사랑을 느끼는 마음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태준 씨, 무슨 꽃 좋아해요?”
“네가 좋아하는 꽃.”
뭘 물어도 태준은 그런 식이었다. 좋아하는 음식도, 좋아하는 음악도, 좋아하는 옷 스타일도 모두 ‘다연이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태준은 뭐든 다연에게 맞췄다.
“그러지 말고, 태준 씨가 좋아하는 꽃 좀 얘기해줘요.”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묻자, 태준이 잠시 생각하더니 곧 대답했다.
“라일락.”
“라일락이요?”
장미나 벚꽃 같은 흔한 꽃을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라일락이 왜 좋아요?”
“향기가 좋잖아. 우리 고등학교에 라일락이 있었는데, 창가에 앉아 수업을 들을 때 라일락 향기가 피어오르더라고. 나중에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되면 라일락 심어야지, 그런 생각을 했는데 여태 못 심었네.”
태준은 빙긋 웃으며 집 비밀번호를 눌렀고, 다연은 머릿속으로 라일락을 떠올려보았다. 봄에 피는 보라색 꽃, 싱그러운 향기가 사람의 기분 좋게 만드는 그런 꽃.
봄이 오면 꼭 라일락을 심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태준의 뒤를 따르는데, 현관문을 연 그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뭐해요? 안 들어가고?”
다연이 의아해하며 태준을 올려다보자, 그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뭔가 싶어 안을 들여다보자, 웬 여자 구두가 보였다. 구두만 봤을 뿐인데, 구두 주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교양 있으면서도 애교스러운 여자의 목소리.
“김인경!”
태준이 소리치자, 집안 어디선가 후다다닥하고 그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컴 백 홈이야? 아니면…… 어머, 어머머머머머머!”
태준을 반기던 인경은 뒤에 서 있는 다연을 발견하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게 웬일이야! 다연 씨! 보고 싶었어!”
그녀는 제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더니, 다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게 몇 년 만이야.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아니, 잘 지냈을 리가 없지. 얼굴은 왜 이렇게 상했어요? 다연 씨도 태준 선배가 보고 싶었구나? 나도 다연 씨 어떻게 지내는지 얼마나 궁금했는지 몰라.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요? 연락 좀 하지 그랬어요. 다연 씨 없는 동안 서태준 저 인간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요? 아주 폐인이 따로 없었다니까. 밥도 안 먹고 매일 술에 담배에. 말도 한마디 안 하지, 아마 입속에 거미 몇 마리 살고 있었을 거야. 완전 사람이 아니었다니까요…….”
“김인경.”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인경의 수다에 태준은 낮은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왜?”
“수다는 다음에 떨면 안 될까?”
“아차차. 그렇지. 다연 씨 들어와요.”
만약 그가 말리지 않았다면 인경은 쉬지 않고 열흘 밤낮으로 떠들 태세였다.
“주인도 없는 빈집에는 왜 와있는 거야?”
“응? 그냥. 근처 지나가다가 선배 왔나 해서.”
태준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다연의 눈치를 살폈다. 예전에도 인경 때문에 이상한 오해를 했던 다연이었고, 지금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인경이 와 있는 거였으니까.
다연이 이해하게끔 상황을 설명하려는 그때.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다연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의외의 행동에 태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연을 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다연 씨도 나 보고 싶었구나? 앉아요. 우리 그동안 못다 한 수다 좀 떨자고.”
인경은 다연의 손을 이끌며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는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뒤졌다. 그 모습을 본 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네.”
그리고 곧 그의 시선이 다연에게 닿았다. 태준과 눈이 마주친 다연은 괜찮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불안해하는 그의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선배!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다연을 찾아 헤매는 3년 동안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냉장고가 텅텅 빈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와. 다연 씨 왔는데, 마실 게 하나도 없어.”
냉장고를 거쳐 찬장까지 다 뒤진 인경이 툴툴거렸다.
“인경아.”
툴툴거리는 인경을 향해 태준이 자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응, 선배. 난 뭐가 먹고 싶냐면…….”
“난 그냥 네가 갔으면 좋겠어.”
“아냐, 아냐. 선배 나한테 이러는 거 아냐.”
“아까 오면서 보니까 네가 좋아하는 베이커리 문 열었더라.”
“와! 그럼 선배가 사 오면 되겠네. 난 민트 초코케이크랑…….”
“집에 가는 길에 사 먹어. 우린 알아서 먹을 테니까.”
어느새 인경의 코트까지 든 태준이 그녀의 등을 떠밀며 집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자, 인경이 낮은 소리로 그를 협박했다.
“서태준 폐인 모드를 단계별로 기록해 놨는데, 다연 씨가 궁금해하겠지? 선배 수염 엄청나게 길러서 망나니 얼굴하고 있던 거 찍어놨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 있더라?”
“너 설마 환자의 개인 정보를 유출할 셈은 아니지? 그거 불법이다?”
“그럴 리가. 난 그저 친한 선배의 흑역사를 대방출하려는 것뿐이야.”
태준은 결국, 속눈썹을 팔랑거리는 인경에게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경은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감추고 싶은 자신의 흑역사까지.
“뭐 먹고 싶은데?”
“말했잖아. 민트 초코케이크.”
“식성하고는. 그냥 치약을 짜 먹지 그래.”
“요리하는 사람이 이렇게 선입견이 심해서 되겠어?”
태준은 인경을 지나쳐 다연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난 따뜻한 아메리카노랑 바닐라 민트 케이크?”
“으. 민트 성애자들.”
다연까지 민트를 고르자, 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자, 집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쨌든 다연과 인경이 둘만 만난 건 처음이었으니까.
“다연 씨, 아쉬운 대로 물이라도…… 크헙!”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다연에게 다가가던 인경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김인경 씨!”
“다, 다연 씨……?”
태준이 있을 때와 달리 다연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180도 싹 바뀐 다연의 표정에 겁먹은 인경은 뒷걸음질 쳤다.
사실 3년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다연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다연은 그 생각뿐이었다.
“이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안 거죠?”
자신도 모르는 태준의 집 비밀번호를 인경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오늘은 꼭 알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