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엄마! 나 아직 다 먹지도 못했는데, 왜 그래?”
다훈은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툴툴거렸다. 오랜만에 잘 차려진 진수성찬을 안주 삼아 태준과 함께 술 한잔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이렇게 방해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누나랑 같이 산 뒤로는 통 내 자취방에 오지도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같이 잔다는 건데, 왜?”
“심심하면 나랑 놀아.”
“엄마랑 뭐 하고 놀아?”
“너 옛날에 <나 홀로 집에> 좋아했잖아. 오늘도 할 거니까 그거 보면 되겠네.”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왜? 옛날에 원, 투, 쓰리 다 보고 싶다고 생떼 부렸잖아.”
“어머니. 소자 나이가 이제 스물하고도 여덟입니다. 여덟 살이 아니고!”
다훈이 큰소리치자, 정은이 쫙 펼친 손바닥으로 아들의 등짝을 찰지게 내려쳤다.
“아야! 왜 때려!”
“그래. 나이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 좀 하자. 넌 스물여덟씩이나 먹고도 우리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 피곤하다며. 그래서 나온 거 아니야?”
“으이그!”
정은이 다시 손을 펼치자, 다훈이 자동으로 몸을 움츠렸다.
“쟤들 3년 만에 다시 만났어. 지금 얼마나 서로 애틋할 거야? 둘이 하고 싶은 얘긴 얼마나 많을 거고, 또 둘이…… 흐흠. 암튼.”
정은의 말에 그제야 눈치를 챈 다훈이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럼 아까 장어 꼬리랑 복분자주가……?”
“그래! 엄마 내년에는 꼭 네 조카 볼 거니까 그렇게 알아!”
“우와. 우리 엄마 개방적이시네. 아주 그냥 현대적이야. 엄마, 나도 여자친구 데리고 오면 장어 꼬리에 복분자주 줄 거야?”
정은은 깐족거리는 아들을 노려보고는 목도리를 꽁꽁 싸매고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훈이 강아지처럼 정은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응? 엄마? 나도 해줄 거냐고.”
“네 장모님한테 해달라고 그래.”
“그럼 엄마가 내 색시한테 장어 꼬리랑 복분자주 주면 안 돼?”
“오냐. 다 해줄 테니까 제발 좀 데리고 와라!”
“와. 누가 될지 내 색시는 좋겠네. 시어머니가 장어도 구워주고.”
다훈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는 정은의 손을 빼서 제 팔에 끼웠다. 아들의 팔에 팔짱을 낀 정은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엄만 손자가 좋아, 손녀가 좋아?”
“난 상관없어. 사위 닮은 손자도 좋고, 내 딸 닮은 손녀도 좋고.”
“조카 생기면 진짜 예쁘겠다. 그렇지?”
“말해 뭐해. 예뻐 죽지.”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로 팔짱을 끼고 걷는 엄마와 아들의 발자국이 사이좋게 그려졌다.
***
“춥죠? 잠깐 기다려요.”
식당을 정리하고 태준과 함께 집으로 온 다연은 서둘러 보일러를 틀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집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여기가 네 방이야?”
태준은 허리를 반쯤 접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좁죠? 천장도 낮고.”
다연의 집은 전형적인 시골집을 리모델링한 곳이었다. 작은 마당을 지나 툇마루를 오르면 아기자기한 거실이 있었고, 툇마루 끝에는 다연의 방이 있었다.
“그러네. 천장이 되게 낮아.”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태준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엄마랑 둘이 있을 땐 몰랐는데, 태준 씨가 오니까 더 낮아 보이네.”
160cm가 조금 넘는 여자 두 명이 서 있을 땐 좁거나 낮아 보이지 않던 집이었는데, 태준의 등장으로 스머프 집이 된 것만 같았다.
“근데 왜 그러고 서 있어?”
“예?”
아까부터 태준은 바닥에 앉아 있는데, 다연은 방구석에 서 있었다. 그것도 아주 뻘쭘한 자세로.
“누가 보면 내가 집주인인 줄 알겠네. 앉아.”
태준이 자신의 옆에 와 앉으라는 듯 바닥을 톡톡 치며 말했지만, 다연은 고개만 까딱거릴 뿐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사실 아까 식당에서 그와의 키스는 꽤 깊었다. 낮에 식당 앞에서도 키스를 나누긴 했지만, 그땐 딱 키스만이었다. 하지만 식당 안에서는 조금 달랐다.
입술이 거칠게 맞닿았고, 그의 혀가 입안을 침범했고, 그의 손이 다연의 가슴 위에 머물렀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오려는 그를 겨우 말리고 온 곳이 바로 집이었다.
집에는 둘 뿐이었고, 겨울밤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또 여름의 낮만큼 길었다. 그래서 다연은 두려웠다.
“왜? 내가 덮칠까 봐 무서워?”
태준이 묻자, 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왜 그렇게 서 있어?”
3년 만에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오랜만에 만나서 할 말 없는 친척도 아니고, 왜 이렇게 데면데면 어색하게 구는 건지. 태준이 좀 서운해하려는 그때.
“있잖아요, 나…….”
다연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응. 말해.”
“…….”
태준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다연이 말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그러자 한참 망설이던 다연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아까 복분자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응?”
“아…… 엄마는 왜 하필 복분자주를 꺼내셔서…….”
술이 올라와서인지 얼굴이 빨갛게 익은 다연은 원피스 앞섶을 펄럭이며 말했다.
사실 그녀는 태준이 자신을 덮칠 게 무서웠던 게 아니고 그 반대일까 봐 무서웠다. 3년 동안 꽁꽁 쌓였던 사랑의 괴력이 폭발할까 봐.
다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던 태준은 알겠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침대 위에 눕혔다.
“엄마야!”
그리고 재빠르게 다연의 위에 올라타며 속삭였다.
“난 장모님이 왜 그러셨는지 알겠는데?”
“왜 그랬는데요?”
“아까 건배사 할 때 그러셨잖아.”
“건배사요?”
“응. 또 다른 가족의 탄생을 기대한다고.”
그의 말에 다연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그건 우리 둘이 결혼하라는 뜻 아니에요?”
“아니. 결혼은 그 전에 말씀하셨어.”
“그럼 또 다른 가족의 ‘탄생’이라는 건…… 설마?”
“설마가 맞는 것 같은데?”
“에이, 아니에요.”
“맞아. 손주 기다리시는 거.”
“엄마도 참…….”
결혼도 안 했는데 손주라니. 어쩐지 아까부터 태준에게 토종닭에 전복, 낙지 그리고 장어 꼬리까지, 남자한테 좋다는 건 다 먹이더라니.
다훈의 말대로 아끼고 아끼는 복분자주를 딸 때 알아봤어야 했다. 다연은 그저 너무 마른 태준이 걱정돼서 좋은 음식 먹이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엉큼한 뜻이 있을 줄이야.
“그래서 말인데.”
“왜, 왜요? 어딜 자꾸 올라와요?”
다연은 제 위로 조금씩 올라오는 태준을 피해 엉덩이를 뒤로 뺐다. 물론 더 빠르고 힘차게 올라오는 태준에게 곧 잡혀버렸지만.
“난 말이야. 결심한 게 있어.”
다연의 위를 완전히 정복한 태준은 그녀의 원피스 단추를 천천히 풀며 말했다.
“무슨 결심을 내 단추를 풀면서 하는 건데요?”
그의 손길에 묘한 흥분과 설렘이 다연의 가슴을 들썩이게 했다.
“장모님 말씀 잘 듣기로?”
“이거 반칙 아니에요?”
단추를 풀던 그의 손이 어느새 다연의 치마 속으로 들어갔다.
“아흣!”
오랜만에 느끼는 그의 손길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지만,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3년이나 기다렸던 손길이었으니까.
그는 여전히 부드러웠고 배려심도 넘쳤지만, 또 한편으로는 꽤 거칠었다. 속바지와 스타킹이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고, 원피스까지 벗겨지자 다연의 야들야들한 속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추워요.”
“조금만 기다려. 곧 더워질 테니까.”
그 말과 함께 태준은 다연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귀를 휘감는 그의 숨결에 다연의 몸은 거짓말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인 만큼 태준의 입맞춤은 애틋하고 정성스러웠다.
지난 3년 동안 태준은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 떨어진 것처럼 살았다. 쩍쩍 갈라진 마른 땅에서 연다연이라는 빗줄기만을 기다렸다.
태준은 다연이 목말랐다.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과 뜨거움 숨결을, 입 밖으로 퍼져 나오는 그녀의 신음을 미치도록 갈구했다. 그리고 드디어 빗줄기를 만났다. 이제야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다연의 귓가를 지나 목덜미를 훑고 내려온 태준의 입술이 그녀의 가슴 위에 닿았다. 말캉한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혀끝으로 핥자, 다연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하아.”
태준은 그녀의 오른쪽 가슴과 등을 잇고 있는 커다란 상처를 핥고 또 핥았다. 다연의 목숨을 구해줬던 그였지만, 이 상처를 볼 때마다 후회가 밀려오곤 했다.
‘내가 산에서 좀 더 빨리 내려왔더라면. 내가 널 그렇게 세게 밀지만 않았더라면. 그럼 이런 상처는 남지 않았을 텐데.’
이 상처만 보며 태준은 아직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사고 때 더 많이 다치고 아팠던 건 자신이었지만, 제 아픔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로지 다연의 아픔만 보이고 느껴질 뿐.
하지만 지난 일을 후회하느라 현재를 허비하지 않기로 했다. 네가 내 옆에 있고, 내가 네 옆에 있는 현재와 우리 둘이 함께할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널 더 안고 싶어.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태준의 속삭임에 다연은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을 휘감았다. 마음껏 들어오라는 듯, 당신만이 유일하게 내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듯.
태준이 허리에 힘을 주며 다연의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으읏!”
“아파?”
“아뇨. 괜찮아요.”
“아프면 말해.”
“정말 괜찮아요. 오랜만이라서 그래요. 흐읏.”
태준은 작은 방안을 가득 메우는 그녀의 신음이 듣기 좋았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돌고 돌아, 겨우 찾은 내 사랑과 함께 있다는 것이, 또 우리 두 사람이 하나라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부드러운 태준의 움직임에 다연의 이마 위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차갑게 식었던 방안이 후끈하게 달아올랐고, 두 사람의 몸은 촉촉하게 젖어갔다.
“다연아.”
태준의 부름에 다연은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았다.
몸은 물론 마음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사랑의 절정에 올라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더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