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오늘도 다연은 새벽 일찍 일어나 식당으로 출근했다. 평소에도 부지런한 딸이었지만, 요 며칠 출근이 한두 시간 더 빨라졌다.
처음에는 월동 준비하느라 일이 많은가 싶다가도 식당에 가보면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속이 시끄러워서 일찍 나가서 요리 연습을 하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정은은 평소에도 집안 정리를 한 뒤 다연보다 두어 시간 정도 늦게 출근했기에 태준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딸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녀석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나 몰래 만나고 있을 줄이야!
“어쩐지 이상했어!”
갑작스러운 정은의 등장에 놀란 다연의 눈이 커다래졌고, 태준은 그새 마음의 준비를 한 듯 굳센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정은은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태준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태준의 곁에 서 있던 자신의 딸을 확 밀쳐냈다.
“어, 엄마……!”
놀란 다연이 소리쳤지만, 정은은 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태준에게 달려들었다. 다연이 말릴 사이도, 태준이 피할 사이도 없이 날쌔게 움직인 정은은 태준을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
“어, 어머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태준에게 달려들 때는 언제고, 정은의 표정은 어느새 온화하게 변해 있었다. 마치 그가 무척이나 반가운 듯 말이다.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왜 이제야 왔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다연과 태준은 휘둥그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황과 당혹, 그 사이쯤 어딘가에서 태준과 다연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을 때, 정은이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내가…….”
다연에게 차마 말은 못 했지만, 정은은 태준이 자신의 딸을 찾아오길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야위어가는 딸이 못내 안쓰러워 다연의 핸드폰을 몰래 뒤져 태준에게 연락해보려고도 했다. 그런데 이 모질고 독한 것이 핸드폰에 있는 연락처는 물론 태준과 관련된 것을 싹 다 지워버린 게 아닌가.
“회사에 전화해볼까 하다가 괜히 직원들 앞에서 자네 난처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싶고, 조용히 집으로 찾아가려니 주소도 모르고. 내가 얼마나 답답했는데.”
그래서 정은은 손님들이 식당 사진을 SNS에 올린다고 할 때마다 은근히 카메라 앞을 서성거리곤 했다. 혹시나 태준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말이다.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혹시나 마음이 변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닐까. 매일 밤 가슴을 졸였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 눈앞에 보이자 왜 이렇게 반갑고 좋은지.
“어머니. 절 받으세요.”
“아냐, 아냐.”
정은은 제게 절을 하겠다는 태준을 한사코 말리며 난로 옆 가장 따뜻한 자리에 그를 앉혔다. 그녀는 쪼글쪼글한 손으로 태준의 손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이 조금은 낯설고 어색했지만, 태준은 손을 빼지 않았다. 낯설고 어색한 그녀의 행동에서 따뜻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태준은 의아한 얼굴로 정은과 다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반갑다거나 기다렸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별안간 고맙다니? 뭐가?
“내가 자네한테 절하고 싶은 심정이야.”
“예? 그게 무슨……?”
사실 정은이 태준을 기다린 건 백 퍼센트 다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이별이 가슴 찢어지게 아프고 죽을 만큼 힘들어도 시간이 흐르면 잊히고 희미해지기 마련이었다. 세월을 더 살아본 정은의 관점에서 사랑은 그런 거였다.
하지만 엄마로서, 어미 된 사람으로서, 태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고맙네. 내 딸 구해줘서, 내 딸 살려줘서 정말 고마워.”
태준이 자신의 딸을 살려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정은은 그에게 너무도 고마운 심정뿐이었다.
사고 당시 도로 위는 끔찍할 정도로 엉망이었고 밤새도록 내린 하얀 눈밭은 온통 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광경을 모두 봤던 정은은 태준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내 딸 때문이었다니. 그 덕에 내 딸이 무사할 수 있었다니.
“고맙네. 자네 덕에 우리 다연이가 살 수 있었어. 자네 덕에…….”
정은은 오래도록 태준의 손을 놓지 않았고, 태준은 어색했던 그녀의 손길이 점점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
“닭을 키웠어야 했는데. 토종닭을 키웠어야 했어.”
정은은 아까부터 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귀한 손님이 왔는데 성의 없는 음식은 내놓을 수 없다면서, 태준과 다연이 말리는데도 이 눈길을 뚫고 부랴부랴 시장까지 다녀와 싱싱한 닭 한 마리를 잡아 왔다.
잘 손질한 닭과 전복 그리고 낙지에 산삼까지 압력솥에 넣고 푹 삶고 있는데도 정은은 계속 씨암탉 타령을 하고 있었다.
“엄마. 그만해. 그것도 맛있겠구만.”
결국, 보다 못한 다연이 한 소리하자, 정은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딸을 나무랐다.
“모르는 소리. 원래 귀한 손님이 오면 귀한 음식을 내놓는 게 당연한 거지. 게다가 3년 만에 서울에서 여기까지 물어물어 겨우 찾아온 손님인데, 그만하긴 뭘 그만해?”
“그렇다고 없는 씨암탉을 어디서 훔쳐 올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아쉬워하잖아.”
“이 정도면 훌륭하니까 그만 아쉬워하시라고.”
그건 그랬다. 아쉬운 마음에 계속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다연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그래도 정은은 태준에게 맛있는 음식,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 내 딸이 사랑하는 남자이자, 내 딸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니까.
“다 됐다. 서 서방, 이리 와서 앉아.”
‘서 서방’이라는 말에 다연은 폴짝 뛰며 정은에게 달려가 속삭였다.
“엄마. 서 서방이 뭐야.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불러?”
“그럼 뭐라고 불러? 내가 내 사위더러 서 서방이라고 부르는데, 누가 뭐라고 해? 안 그래, 서 서방?”
엄마의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태준에게 ‘서 서방’이라니. 닭살 돋아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태준이 한술 더 떴다.
“그럼요. 장모님.”
“장모님?”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준을 쳐다보자,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왜? 내가 내 장모님께 장모님이라고 부르겠다는데, 무슨 문제 있어?”
어머, 이 남자까지 왜 이럴까?
묘하게 왕따 당하는 기분이 든 다연은 두 눈을 치켜뜨며 왜 그러냐는 듯 눈짓했지만, 태준은 모른 척하며 정은에게 다가가 살갑게 물었다.
“장모님, 밥 풀까요?”
“아이고, 아니야. 그냥 앉아 있어. 손님인데.”
“손님은요. 저 손님 아니에요.”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데, 내가 일을 막 시킬 수 있나. 앉아 있어.”
정은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를 자리에 앉히려고 하자, 태준이 그만의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모님.”
“응?”
“저 백년손님 말고, 장모님 가족 하고 싶습니다.”
정은은 처음 보는 태준의 표정에 할 말을 잃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정은은 태준이 훤칠하니 아주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 몸가짐이 아주 어른스럽고 행동이 점잖은 것이 믿음직스럽다고도 느꼈는데, 지금은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뭐랄까? 좀 귀엽달까?
“가족?”
“네. 가족이요. 가족끼리는 손님 대하듯 어려워하지 않잖아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뽀송뽀송한 얼굴로 해맑은 미소를 짓는 걸 보니,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으면서도 서 서방한테 저런 면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아들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대해주세요. 예? 장모니임.”
거기에 말끝을 길게 늘이며 은근히 눈웃음을 치며 애교까지 부리니, 어쩐지 정은의 마음이 다 설레는 것 같았다.
내게 이런 사위가 생기다니, 우리 딸을 이런 남자가 사랑한다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아이고, 내가 이 나이에 아들이 다 생길 줄이야.”
“좋으세요, 장모님?”
“좋지. 좋아 죽겠네. 맨날 속만 썩이는 아들만 보다가 이렇게 잘 생기고 내 딸한테도 잘해주는 아들이 생기니 좋네. 아주 좋아.”
다연은 웃음꽃을 터트리는 엄마와 태준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은 고부 갈등보다 장서 갈등이 많다던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누구보다 태준을 위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태준. 3년 만에 만난 태준 덕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무척이나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말이다.
“다연아, 너도 와서 앉아.”
정은의 부름에 식탁 앞으로 다가간 다연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잠깐 사이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우와. 이걸 엄마 혼자 다 차린 거야?”
“우리 서 서방이랑 같이 한 거지, 뭐.”
전복과 낙지를 넣어 함께 푹 삶은 토종닭과 알맞게 잘 익은 맛깔스러운 김치 그리고 장어구이까지. 후다닥 차린 것 치고는 아주 훌륭한 밥상이었다.
“그릇.”
다연이 그릇을 내밀자, 정은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후후 불어가며 오동통한 닭 다리를 뜯어 그릇 위에 올렸다.
다연은 먹음직스러운 닭 다리를 태준에게 주고는 또 다른 그릇을 내밀었다. 그러자 정은이 남은 다리 한쪽을 뜯더니, 또다시 태준의 그릇에 얹어주는 게 아닌가?
“우리 서 서방. 닭 다리 두 개 다 먹어.”
“엄마! 나는?”
“넌 닭가슴살이나 먹어.”
“와. 나 왜 갑자기 찬밥 신세 된 건데?”
“너 원래 찬밥이었어.”
“엄마!”
“조용히 하고 밥이나 드셔. 우리 서 서방 밥 먹는데 시끄럽게 하지 말고. 서 서방, 이것도 먹어.”
찬밥 신세가 된 것도 서러운데, 정은의 차별은 닭 다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전복과 낙지는 물론 아끼고 아끼던 산삼까지 싹 다 태준에게 주는 게 아닌가.
“엄마. 차별 너무 심하다.”
“왜? 내가 장모님께 사랑받으니까 질투 나?”
“질투 나지, 그럼. 나만 보던 엄마가 하루아침에 저렇게 변했는데. 엄마는 태준 씨가 그렇게 좋아?”
다연이 툴툴거리며 묻자, 정은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애물단지를 평생 끼고 살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서 서방이 데리고 간다니 얼마나 좋아?”
“치. 엄마한테 난 치우고 싶은 애물단지였어?”
다연이 물었지만, 정은은 태준에게 음식을 챙겨주느라 그녀의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아니, 못 들은 척하는 건가?
대놓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지만, 다연은 싫지 않았다. ‘서 서방’하고 엄마가 부르면, ‘네, 장모님’하고 대답하는 태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어쩜 이게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척이나.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다훈이었다.
“으. 되게 춥네. 하늘에 구멍 났나 봐. 눈이 미친 듯이 내리는데?”
머리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고 안으로 들어온 다훈은 태준을 발견하고는 눈이 커다래졌다.
“어? 저 사람은……?”
갑작스러운 다훈의 등장에 놀란 다연과 정은은 태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연이 3년 전에 헤어져 죽을 만큼 힘들어했던 원인 제공자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누나가 만나고 있는 남자라고 소개해야 하나?
두 여자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매형!”
다훈이 소리쳤고, 다연과 정은이 동시에 소리쳤다.
“매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