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어느새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가녀린 나뭇가지 위에도,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식당 지붕 위에도, 두 사람의 옷 위에도.
다연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며 태준의 옷에 쌓인 눈을 털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태준이 그녀의 손을 막았다.
“털어내지 마.”
“왜요?”
“너와 같이 첫눈 맞은 흔적을 금세 없애버리고 싶지 않아.”
3년 전. 태준은 다연이 떠나고 난 뒤,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첫눈을 맞으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대요.”
3년 전에도, 16년 전에도, 다연과 함께 첫눈 맞을 기회를 놓쳐버렸던 태준은 그녀의 말을 그냥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어렵게 함께 맞은 첫눈인데 그냥 털어낼 순 없잖아?”
“안에 들어가면 눈이 다 녹을 텐데요.”
날씨는 꽤 추웠고,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다.
함께 맞은 첫눈이 녹아버리는 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이 추위에 마냥 밖에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잠깐만.”
태준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더니 식당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에 걸어두고는 다시 다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눈 내릴 동안만 저기에 걸어둘래.”
“옷이 젖을 텐데요?”
“상관없어. 들어가자.”
“잠깐만요.”
다연은 한참 동안 나무에 걸린 태준의 옷을 쳐다보더니,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 그의 외투 옆에 걸어놓았다.
“한 사람 옷만 있으면 아무 소용없을 것 같아서요.”
그 모습에 태준은 다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춥다. 이제 들어가자.”
빙긋 웃던 태준은 다연을 품에 안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공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눈이 내려서 그런지 아침인데도 어두컴컴했고, 이 숲속을 밝히는 건 다연의 식당이 전부였다.
“이거 마셔요.”
다연은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옥수수수염차를 태준에게 내밀었다. 구수한 향과 함께 따뜻한 기운이 안으로 들어오자, 온몸이 훈훈해졌다.
“아직 밥 안 먹었죠?”
“응.”
“잠깐 앉아 있어요.”
“아냐. 네가 앉아 있어. 오늘은 내가 해줄게.”
요 며칠 동안 손님으로 오면서 다연의 요리를 먹었던 태준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그가 그녀에게 요리해주고 싶었다. 예전처럼.
“싫은데. 내가 해주고 싶은데.”
하지만 다연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거절당할 줄 몰랐던 태준이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자, 다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 요리할 때 제일 예쁘다면서요. 태준 씨한테 예쁜 모습 보여주고 싶어요.”
다연이 앞치마를 두르며 눈을 찡끗거리자, 태준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이 요리 말고 다른 요리할 때가 더 예쁜데.”
엉큼한 그의 농담에 다연이 작은 주먹으로 그의 팔을 때리자, 태준이 그녀에게 도망쳤다.
주방에서 벗어난 태준은 천천히 식당을 둘러보았다. 며칠 동안 매일같이 찾아온 곳이었지만, 다연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기에 식당 안을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고급스럽거나 값비싼 자재로 꾸민 식당은 아니었지만,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공간이었다. 마치 다연처럼.
“다 됐어요. 와요.”
다연은 따뜻한 성게 죽을 끓여왔고, 태준은 입맛을 다시며 식탁 앞에 앉았다.
그는 맛깔스러운 요리를 눈에 담고, 코로 향기를 들이켰다. 시각과 후각이 동시에 허기를 불러왔다.
“맛있겠다. 넌 안 먹어?”
“난 아까 먹었어요. 식기 전에 어서 먹어요.”
“잘 먹을게.”
태준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서둘러 죽을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죽이 입안에 들어오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다연은 그 모습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예전에 태준이 해준 요리를 먹기만 했을 땐 몰랐다. 요리해준 사람의 즐거움이 이렇게 크다는 걸.
전에는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는 행복만 알았는데, 그를 만나고 난 후로는 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꽤 크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태준은 아마 그 즐거움을 아주 옛날부터 알았던 것 같다. 그가 해준 요리를 먹는 자신을 바라볼 때, 그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내 요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요리재료를 사 오고 다듬는 수고스러운 일들이 전혀 고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이 기쁨이고 즐거움으로 다가오지.
다연은 그걸 태준을 통해 배웠다. 그가 해준 요리를 통해서 말이다.
“맛있다. 오늘따라 더 맛있네.”
어느새 죽 한 대접을 뚝딱 해치운 태준이 빈 그릇을 보여주며 미소를 지었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요.”
“내가 더 고맙지. 이렇게 맛있는 요리 해줘서.”
지난 3년간. 서로의 소중함을 사무치게 느꼈기 때문일까. 작은 것 하나도 감사하고 고마웠다.
“커피 한잔할래요?”
“좋지. 원두 갈아야 해?”
“네. 갈아줄래요?”
다연이 핸드밀을 내밀자, 태준은 그녀 옆에 서서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며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서걱서걱 원두 가는 소리가 두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예전에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친 후 꼭 커피를 내려 마셨는데, 마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구수하고 향긋한 커피 향이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그거 알아?”
“뭐요?”
“이 식당, 예전에 네가 말한 그대로야. 구불구불한 숲속을 지나 찾기 힘든 곳에 숨어 있는 것도 그렇고, 네가 말한 메뉴도 그렇고.”
그래서 태준은 이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이상한 메뉴 설정에 손님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말이다.
“그거 알아요?”
“뭐?”
“이 식당이 이렇게 꼭꼭 숨어 있는데, 왜 장사가 잘되는지?”
그건 태준도 몹시 궁금했다. 다연의 식당이 있는 곳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인기 관광지도 아니었고, 손님들이 찾기 편한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장사가 꽤 잘 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맛있어서?”
“빙고. 근데 맛있는 이유가 따로 있는데.”
“이유?”
태준이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다연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메뉴들 다 태준 씨 레시피예요.”
“응?”
그녀의 말에 태준은 식당 메뉴를 떠올려보았다. 성게 죽에 식빵 피자 그리고 양평 해장국까지. 성게 죽과 식빵 피자는 그가 종종 해주었던 메뉴였고, 양평 해장국은 함께 먹었을 때 이런저런 레시피를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진짜 만들어 팔고 있을 줄이야.
“와. 레시피 도둑이 여기 있었네?”
태준은 손에 들고 있던 핸드밀을 내려놓고 다연의 허리를 부드럽게 휘감았다.
“레시피 도둑 검거 성공.”
“한 번만 봐주세요.”
“어쩌지? 현행범은 봐주지 않는 게 원칙이라서. 심문 있겠습니다. 어쩌자고 레시피를 훔친 거죠?”
장난스러운 그의 질문에 다연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하자, 태준이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도둑이라도 잡은 것처럼 다연의 두 손까지 결박하면서 말이다.
다연은 그의 장단에 맞춰주며 말했다.
“태준 씨가 보고 싶어서?”
“내가 보고 싶어서 레시피를 훔쳤다고?”
뜬금없는 대답에 태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응. 태준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와 헤어진 후, 다연은 몇 날 며칠 그를 그리워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와 함께 보냈던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게 일상이 되었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을 때도, 정신 좀 차리라며 다훈이 값비싼 요리를 사 줄 때도, 다연은 태준만 그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틀어놓은 TV의 먹방 프로그램에서 피자 먹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때, 태준이 떠올랐다.
“태준 씨가 해준 식빵 피자가 너무 먹고 싶은 거 있죠.”
몇 주 동안 물만 겨우 먹던 다연은 곧장 주방으로 달려가 피자를 만들었다. 태준이 만들어주었던 레시피 그대로, 식빵에 토마토케첩을 펴 바르고 그 위에 소시지와 모차렐라 치즈를 뿌리고 마지막에 깻잎을 살짝 올린, 서태준만의 식빵 피자를 말이다.
“태준 씨가 보고 싶을 때마다 태준 씨가 나한테 해줬던 요리를 해 먹었어요.”
입안에 가시가 잔뜩 끼인 것처럼 입맛도 없고 아무것도 목구멍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때, 그가 해줬던 요리를 하고 있으면 입맛이 돌았다. 허기가 졌다.
아플 때마다 죽을 만들어주었던 그가, 기분 좋을 때 식빵 피자를 구워주었던 그가, 헛헛한 배를 채워주던 그가 떠올랐다.
여전히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리웠지만, 그가 해줬던 요리를 하고 있으면 그래도 살 것 같았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태준 씨가 꼭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현실에는 그가 곁에 없었지만, 그가 해준 요리를 하며 그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럼 마치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검게 어둠이 내려앉았던 다연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걸렸고, 꾹 다물고 있던 입이 다시금 조잘거리기 시작했고, 한동안 사라졌던 생기가 다시 돌았다. 모든 게 그의 요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주 많이.”
어느새 다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지냈는지, 날 얼마나 그리워했을지.
태준은 자신의 넓은 가슴에 다연을 품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날마다 지옥이었어.”
“막연히 그런 생각 한 적 있어요. 태준 씨 없으면 못 살 거라고. 근데 그게 현실이 되니까…… 정말 죽을 것 같더라고요.”
생각보다 더 아프고, 예상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이젠 헤어지지 말자.”
“이젠 안 헤어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도망가고 싶으면 지금 가. 마지막 기회야.”
태준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자, 다연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저었다.
“태준 씨야말로 도망가고 싶으면 지금 가요. 평생 안 놓을 테니까.”
“제발 그래 줬으면 좋겠네.”
다시 한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힘을 주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이제 두 사람의 앞길에 거리낄 건 없었다. 아니, 그 어떤 장애물이 자신들의 길을 막아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높고 단단한 장애물이 와도 말이다.
서로를 끌어안고 미래를 다짐하고 있을 때, 딸랑 소리와 함께 식당 문이 열렸다. 문이 열고 닫히며 싸늘한 바람이 다연과 태준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뭔 놈의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냐…….”
그리고 서로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정은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