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다음 날.
다연은 평소보다 더 일찍 식당에 출근했다.
어제저녁 그가 다녀간 후로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모로 누워도 바로 누워도 태준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몸을 괴롭히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그에 관한 생각을 떨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말이다.
밥을 잘 안 먹고 다니는지, 얼굴은 수척했고 몸은 말라보였다. 얼굴이 퀭하고 다크서클이 내려온 게 잠도 잘 못 자는 것 같았다.
“하아. 나 없다고 또 못 자는 거 아니야?”
자신을 찾아 헤맬 때 수면제를 아예 달고 살았다고 했다. 하루라도 약을 안 먹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다연은 그에 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쨌든 이제 그를 잊어야 한다. 자신은 벌써 3년 전에 말도 없이 그를 떠났고, 3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으니까.
“하긴 진절머리 났겠지.”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난 모질고 독한 내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 거다. 그러니까 속 시끄럽게 고민하지 말자. 지금처럼 식당 열심히 운영하면서 잘 살면 되지.
“그래. 잘 살 수 있어. 잘 살 수 있어.”
다연은 마치 주문이라도 하듯 ‘잘 살 수 있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고는 일을 시작했다.
홀과 주방을 청소하고, 새벽 장에서 사 온 재료를 손질하고, 장사 준비를 대충 다 끝내고 잠시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식당 문이 열리며 문에 달린 종이 예쁜 소리를 냈다.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다. 어제 그렇게 가버렸던 태준이 다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온 걸까? 왜 다신 온 걸까? 혹시…… 설마……?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심장이 몹시도 뛰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고, 긴장되었다.
다연이 우물쭈물하며 가만히 서 있자, 태준은 어제 앉았던 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밥이 너무 맛있어서 또 왔어.”
“아…….”
기대하거나 예상했던 말이 아니었던지라, 다연은 조금 실망했다.
메뉴판을 갖다 주자, 태준은 몇 개 되지 않는 메뉴를 아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어제 그 메뉴를 다 먹어놓고 뭘 저렇게 보는지.
“아침엔 죽이 낫겠다. 성게알 죽 좀 해줘.”
“네.”
다연은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시작했다. 물을 끓여 육수를 내고, 팬에 참기름을 살짝 두르고 불려놓은 찹쌀을 달달달 볶았다. 그러자 작은 식당 안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 냄새에 태준은 슬슬 배가 고파졌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든든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요리를 끝낸 다연은 밑반찬과 함께 죽을 내어갔다.
나무 트레이 위에는 맛깔스러운 죽 한 그릇과 참기름과 참깨를 솔솔 뿌린 명란젓 그리고 소고기 장조림이 놓여 있었다.
태준은 잘 조리된 요리의 향을 폐부 가득 넣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을게.”
“네.”
한 숟가락 듬뿍 뜬 그는 죽을 후후 불어 입안에 가득 넣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죽을 후후 부는 그의 입김 소리, 맛있게 음식물을 씹는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어쩐지 그는 어제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아니, 많이.
침울했던 어제와는 달리 뭔가 활기차 보이기도 했고, 힘이 넘치는 것 같기도 했다. 하루 사이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뭐가 저 남자를 기분 좋게 만들었을까? 식당을 나가기 전까지 우울해 보였는데…… 누가 저 사람을 기쁘게 한 걸까?
다연은 미친 듯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13년을 헤매고 헤매 겨우 자신을 찾은 그를 말도 없이 버린 건 자신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친 태준은 계산하기 위해 다연에게 다가왔다.
“저기…….”
말끝을 흐리는 그의 부름에 다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왜 날 부르는 걸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네.”
기대감을 가득 품고 그의 부름에 대답하자, 태준이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테이블에 냅킨이 없어.”
“네? 아, 예.”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태준은 오늘도 아무런 말 없이 식당을 나갔고, 다연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
다음 날.
다연은 여느 때와 같이 식당 문을 열었고,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잠시 쉬던 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곗바늘은 이제 막 9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제 태준 씨가 몇 시에 왔었더라?’
생각에 잠겨 있던 다연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태준 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러고 보니 어제는 말없이 그냥 가버리는 태준을 붙잡지 않았다. 뒤늦게 쫓아나가 휑하니 빈 거리를 보며 울지도 않았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오늘도 올 거라는 사실을.
달랑달랑!
그때, 식당 문이 열렸고 태준이 들어왔다. 그는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았고, 다연은 그에게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한 번만 봐도 다 외울 만큼 메뉴는 단출했지만, 다연은 꼬박꼬박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지금이 그의 곁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으니까.
“술을 마셔서 그런가. 오늘은 해장국이 먹고 싶네.”
“아니, 몸도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술을…….”
순간 놀란 다연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저도 모르게 잔소리가 튀어 나가버렸다. 이젠 그가 술을 먹든 떡을 먹든 아무런 상관도 없는 관계인데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다연은 고개 숙여 사과한 뒤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차피 오픈 키친이라 안이 다 보이는데, 너무 정신이 없어 그런 것도 잊고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태준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다연은 해장국을 끓이는 동안에도 계속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누구랑 무슨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아침부터 해장국을 찾을까? 무슨 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셨기에 저렇게 표정이 밝아진 걸까?
가만히 보아하니 그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았다. 혼자 앉아 피식 웃는 것도 그렇고, 눈빛이 반짝이는 것도 그렇고.
다연은 몹시도 궁금해졌다. 첫날엔 얼굴도 우중충해 보이고 표정도 영 안 좋더니, 며칠 사이에 얼굴이 피었다.
‘누굴까? 저 남자를 저렇게 웃게 만든 사람이…….’
다연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은근한 질투가 피어올랐다.
***
그다음 날.
태준은 똑같은 시간에 식당에 와서 피자를 주문해 먹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다시 성게 죽을, 그다음 날에는 해장국을, 또 그다음 날에는 피자를 먹고 갔다.
그는 매번 똑같은 자리에 앉았고, 한참 동안 메뉴판을 보고 고민을 했으며, 음식을 남김없이 다 먹고는, 계산하고 나갔다.
둘 사이에는 여전히 대화가 없었다. 하지만 다연은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오늘도 여전히 이른 아침에 식당에 나온 다연은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잠시 쉬던 다연은 습관적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말은 곧 태준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다연은 난로 위에 올려둔 주전자에서 따뜻한 옥수수수염 차를 컵에 따라놓고 그를 기다렸다.
9시 10분이 지나고, 긴 바늘이 숫자 4를 지났고, 6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똑딱, 똑딱. 오늘따라 시곗바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무슨 일 있나?”
다연은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말도 안 돼.”
창밖을 보던 다연은 곧장 식당 밖으로 나가보았다.
하늘에서 솜뭉치처럼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그것도 화이트 크리스마스.
남들에게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기분 좋은 날일지 몰라도 다연에게는 너무도 가슴 아픈 날이었다. 눈이 내렸던 크리스마스에 한 남자와 두 번의 이별을 했던 그녀였으니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를 덮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처라도 물어볼걸. 어디서 지내고 있느냐고 숙소라도 물어볼걸.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말 이대로 끝인 건가? 사랑하는 사람과 첫눈을 함께 맞지 않으면 영원히 함께하지 못한다는 말이, 유치한 그 미신이 정말로 맞는 건가?
다연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머리 위로 눈이 쌓였고, 두 손이 빨갛게 얼어버렸다. 바닥에 끌린 치마 끝에 눈이 내려앉아 치마가 젖었지만, 다연은 개의치 않고 울고 또 울었다.
이따위 첫눈 따위 너무 싫었다. 왜 하필 오늘 첫눈이 와서는, 왜 하필 오늘 그 남자는 오지 않아서…….
“그러니까 왜 마음은 흔들려서…… 왜 등신처럼 보기만 해도 좋아해. 그 남자는 나 따위 신경도 안 쓰는데…… 왜 바보처럼…….”
“누가 그래? 내가 신경 안 쓴다고?”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던 다연은 태준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태준 씨……?”
그였다. 이제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그 남자가 바로 제 앞에 서 있었다.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그의 숨은 꽤 거칠었다.
“나한테 마음 흔들렸어?”
다연은 이제 거짓말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벌은 이미 받았으니, 이젠 그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네. 흔들렸어요.”
“보기만 해도 좋아? 내가?”
“네. 좋아 미치겠어요.”
너무도 솔직한 대답에 태준은 한쪽 팔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나도 네가 좋아 죽을 것 같아.”
“태준 씨…….”
“그러니까 내 곁에서 떠나지 마. 이번에도 떠나면 진짜 죽어버릴 거니까.”
“안 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제 절대 안 떨어질 거야.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나 죽을 때까지 태준 씨 옆에 붙어 있을 거야.”
태준은 그녀를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정말요.”
“어른들이 반대해도?”
“안 헤어져요. 태준 씨 없이 사는 게 더 힘들어.”
“이제야 마음에 드는 소리 하네.”
태준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다연의 입술을 집어 삼켜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두 입술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탐했다. 더 깊고, 더 끈질기게. 얽히고설킨 두 속살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마무리되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요.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요?”
“기다렸어?”
“당연하죠.”
“눈이 와서. 길이 막혔어.”
“뛰어왔어요?”
“응. 첫눈이 오잖아.”
“첫눈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첫눈을 맞아야지 영원히 함께한대.”
“치. 미신이라면서요?”
“두 번이나 같은 일이 일어나면 믿을 수밖에.”
“그래서 뛰어왔어요? 나랑 첫눈 맞으려고?”
“눈이 멈출 수도 있으니까.”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다연은 태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말랐어요? 몸 좋던 내 남친 어디 간 거야?”
“무슨 소리야. 살이 좀 빠지긴 했지만, 난 그대론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와. 이렇게 도발하는 거야?”
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다연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손사래를 쳤다.
“도발은 내가 무슨 도발을 했다고.”
태준은 다연을 사랑스럽게 내려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요 며칠 계속 지켜봤는데, 역시 넌 요리할 때가 제일 예쁘더라.”
갑작스러운 칭찬에 다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정말요?”
“응. 그래서 말인데.”
“네. 말해 봐요.”
매일 이 시각에 와서 식사했으니, 배가 고플 거였다.
다연은 어떤 맛있는 음식을 해줄까 생각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요리해줘.”
하지만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그와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아주 가슴 떨리고, 설레고, 야릇하고, 야한 언어.
당신과 나만의 밀어.
“대답해. 나를 요리해준다고.”
그를 다시 만난 오늘 다연은 결심한 게 하나 있었다. 뭐든 그가 원하는 건 해주기로.
“좋아요. 요리해줄게요.”
아주 맛있게.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태준은 다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위로 하얀 눈이 끝도 없이 내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