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63화 (63/74)

63화

손님은 다름 아닌 태준이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에 다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할 것 같았지만, 꾹 닫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만 어지럽게 뒤엉켰을 뿐.

다연은 애꿎은 스티로폼만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녀가 당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태준이 꽤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네.”

“네…….”

“맛집이라고 소문나서 찾아와봤어.”

“아…….”

그제야 다연은 태준이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13년 전에도 그는 자신을 찾기 위해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고 했으니까.

“배고픈데.”

“예?”

“메뉴판 안 줄 거야?”

“아…….”

태준은 오픈 키친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고, 다연은 허둥대며 메뉴판을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태준은 손글씨로 적혀 있는 메뉴판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깻잎 듬뿍 피자와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양평 해장국 거기에 성게 죽까지. 자신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메뉴판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식당을 하나 차리는 거예요. 수풀을 헤치고 어렵게 어렵게 들어가야 하는 곳이죠. 그 식당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메뉴를 파는 거예요. 깻잎 올린 식빵 피자랑, 성게알 죽이랑, 양평 해장국이랑.”

3년 전 이맘때쯤 제 품에 안겨 재잘대던 다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세 가지 요리, 다 해줄 수 있어?”

태준이 묻자, 다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픈 키친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는 다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던 남자였지만,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얼핏 봐도 그는 수척해 보였고,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게 꼭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다연은 마음이 불편했다.

한편. 태준은 음식을 기다리며 조리대 앞에 서 있는 다연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예쁜 그녀는, 이제 한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걸까?

나 떠나고 다른 남자 만났으면, 그렇게 예쁜 아이를 가졌으면 행복이라도 할 것이지, 왜 저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태준은 슬픈 눈으로 다연을 바라보았다.

꽤 오랫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다만 도마 위를 두드리는 칼 소리와 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가 휑한 두 사람 사이를 채웠을 뿐.

“성게알 죽 먼저 나왔습니다.”

다연은 정성껏 끓인 죽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명란젓과 소고기 장조림이 밑반찬으로 함께 나오는 정갈한 밥상이었다.

태준은 숟가락을 들어 성게알 죽을 맛봤다. 예전에 자신이 그녀에게 끓여준 그 맛 그대로였다. 밥을 먹지 못해 기력이 쇠한 다연을 위해 정성껏 끓여주었던 죽 한 그릇.

지금 태준이 먹는 죽에도 자신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죽을 먹고 있자, 뒤이어 피자와 해장국도 나왔다. 꽤 많은 양이었고, 다연이 떠난 후로 하루에 겨우 한 끼나 먹는 그였지만, 오늘은 어쩐 일로 몹시도 허기가 졌다. 뱃속에서는 밥을 달라 요동을 쳤고, 배가 고파서 아플 지경이었다.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허겁지겁 식탁 위에 놓은 음식을 해치웠다. 오랜만에 먹는 배부른 식사였다. 포만감이 들었고, 몸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텅 빈 그릇과 접시를 보자, 갑자기 씁쓸해졌다. 이젠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으니까.

태준은 미적거리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다연에게 다가갔다.

“맛있네. 잘 먹었어.”

계산을 마친 그는 별다른 말 없이 그대로 밖으로 나와버렸다. 안 그러면 그녀를 붙잡고 놔주지 않을 것만 같아서. 지금이라도 매달리고 싶어서.

하지만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독하게 몸을 돌렸다.

그런데 망할 놈의 몸이 다시금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빌어먹을 눈이 자꾸만 그녀를 보려고 하고, 미친 심장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반응했다.

“젠장.”

태준은 평소 하지도 않는 욕을 지껄이고는 단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불어 낙엽이 휘날렸다. 어디선가 끼익 끼익하고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고, 건조한 공기가 식당 주변을 에워쌌다.

그때. 식당 안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밖으로 나온 다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게 나 있는 길의 어귀까지 나가봤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잘 있으라는 인사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렸다.

“왜 여기까지 와서 드럽게 바쁜 척이야…….”

눈가가 시큰해지더니 곧 눈물이 흘러버렸다.

“바보 같은 년. 넌 또 왜 흔들려? 얼굴 한 번 본 거 가지고 왜 흔들리냐고.”

다연은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며 두 손이 빨갛게 얼 때까지 텅 빈 길을 바라보았다.

***

식당에서 나온 태준은 서울로 가기 위해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연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저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으로 식당에 간 것뿐이었다. 얼굴이라도 보고 오면 완전히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왜 저렇게 핼쑥해진 거야. 누가 보면 피죽 한 그릇도 못 먹고 사는 줄 알겠네. 식당 하면서 잘 좀 챙겨 먹지.”

다연의 얼굴을 보고 난 후로 태준의 머릿속은 완전히 그녀로 가득 차버렸다.

예전에는 봄에 핀 꽃처럼 활짝 폈던 얼굴이 왜 그렇게 푸석해진 건지, 잘 먹여서 보기 좋게 만들었던 몸은 왜 그렇게 말라버린 것인지, 식당 일은 힘들게 왜 혼자 하는 건지, 애 보느라 식당 일하느라 몸은 안 힘든지…….

온통 다연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남편이 잘 안 해주나? 망할 자식. 어디 갔는지 모른다더니. 하아.”

이제 와 욕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쨌든 다연이 힘들 때 곁에 있어 준 사람일 텐데.

잘 살고 있는 그녀를 굳이 흔들 필요는 없다. 잘 살고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그걸로.

“서울 한 장이요.”

차표를 끊은 태준은 커피를 한 잔 마시기 위해 편의점으로 향했다. 따뜻한 캔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을 때, 웬 시끄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야! 다연 씨한테 말 좀 잘 해줘.”

다연이……?

처음 들었을 땐 그저 같은 이름이겠거니 하면서 별 관심 없이 듣기 시작했다.

“다연 씨 여기 온 지 벌써 3년이야, 3년. 그 말인즉슨 내가 다연 씨한테 마음을 뺏긴 지 어언 3년이 됐다는 거야.”

“알죠. 형이 우리 누나한테 지극정성인 거.”

“알면 말 좀 잘해 달라고. 너도 내가 매형 되면 좋을 거 아니야.”

“좋죠. 형이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그렇지! 우리 다훈이 잘 아네!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어?”

남자는 신이 난 듯 다훈의 어깨를 툭 치며 으스댔고, 태준은 ‘다훈’이라는 이름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럼 오늘 다연 씨 식당에 가서 한 잔 할까? 찐하게 한 잔 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건 어떻겠어?”

남자가 까치발을 들며 다훈에게 어깨동무를 하자, 다훈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째요?”

“뭘 어째?”

“난 형이 좋은데.”

“좋은데?”

“우리 누나는 형이 별로래.”

“뭐? 진짜? 진짜 그렇게 말을 했어?”

“네. 더불어 누나는 지금 남자 만날 생각이 아예 없대요.”

커피를 마시던 태준의 손이 순간 주춤거렸다. 저 남자들의 대화를 조합해보면 그들이 말하는 ‘다연’은 태준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

3년 전에 이곳에 왔다는 것과 식당을 운영하는 것 그리고 ‘다훈’이라는 이름의 남동생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저 별 볼 것도 없는 꼴뚜기처럼 생긴 놈이 하는 말이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부녀한테 마음이 빼앗겼다는 것도 그렇고, 매형이 되겠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방금 다훈이 한 말은? 다연이가 남자 만날 생각이 없다는 건 또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럼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산대?”

“그럴걸요. 우리 누나 그 첫사랑 못 잊어요.”

그들의 대화에 태준은 저도 모르게 커피 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갑자기 온몸에 피가 막 샘솟는 것 같았다. 다연이 결혼을 안 했다니, 첫사랑을 못 잊는다니!

그렇다면 진서원, 그 새끼는 뭐지? 그 아이는?

“오늘도 서원이 형이 와서 소개팅 좀 안 해보겠냐고 옆구리 쿡쿡 찔렀다는데, 꿈쩍도 안 했대요. 그냥 말로만 설렁설렁한다고 대답하고, 결국 날짜는 안 잡더래요.”

“넌 동생이란 놈이 누나 설득 안 하고 뭐 하냐? 다연 씨도 이제 남자도 만나고 결혼도 해야지!”

“갑자기 왜 나한테 그래요?”

꼴뚜기가 화를 내자, 다훈이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다훈은 안 그래도 누나가 결혼 안 하는 게 자기 때문인 것 같아 미안했다. 철없던 시절 정신 못 차리고 사업한답시고 누나 등골을 빼먹었던 그였다.

아직도 누나에게 돈을 갚고 있기는 한데, 괜히 돈이 없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철없는 동생 뒤치다꺼리 할 생각에 결혼을 포기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 누군가 달려와 다훈에게 물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다연이가 혹시 연다연입니까?”

태준이 묻자, 꼴뚜기가 눈에 의심을 가득 품고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다훈에게 물었다.

“누군데 이래? 아는 사람이야?”

“아뇨. 모르는 사람인데?”

다훈 역시 처음 보는 태준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태준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물었다.

“너 혹시 연다훈 맞아?”

“절 아세요?”

“그래. 알지. 잘 알지. 우리 다연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우리 다연이?”

태준의 말에 다훈은 인상을 구겼고, 꼴뚜기는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누군데 우리 누나더러 우리 다연이래요?”

“그보다 다연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다훈은 태준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 근방에서 본 적이 없는 놈인데, 왜 이렇게 우리 누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건지. 미친 놈인가. 아니면 또라이?

“그쪽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3년 동안 연애도 못 하는 사람을 왜 함부로 유부녀로 만듭니까? 결혼은 무슨.”

다훈의 대답에 태준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바윗덩이가 확 날아 가버린 것 같았다.

“잠깐. 그럼 아까 그 애는 누구지? 진서원 씨한테 아빠라고 부르던데.”

“서원이 형을 알아요?”

“응. 잘 알지.”

태준이 대답하자, 다훈이 약간은 의심을 거두고 대답했다.

“서원이 형 아들이요. 어제 형수랑 놀러 왔다가 오늘 올라갔을 걸요.”

“형수? 진서원 씨랑 다연이가 결혼한 게 아니고?”

“에이. 무슨 그런 험한 소리를. 둘이 완전 찐친이에요. 그 얘기 들으면 둘 다 난리 나겠네.”

다훈의 대답에 태준은 그를 와락 껴안았다.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오해였다니! 결혼하지 않았다니! 아이가 없다니!

“하하하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살면서 이렇게 기쁜 적은 처음이었다. 13년 만에 다연을 찾았을 때보다, 3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보다, 더 기쁘고 좋았다.

“이거 완전 미친 놈이네! 안 떨어져?”

꼴뚜기가 태준과 다훈을 억지로 떼어놓으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야! 너 누군데 우리 다연 씨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

꼴뚜기가 끼어들자 태준이 자신이 누군지 설명해 주었다.

“나? 다훈이 매형 될 사람.”

“뭐? 이거 완전 또라이네! 네가 뭔데 다훈이 매형이야? 다훈이 매형은 나라고!”

“어, 그래.”

태준은 꼴뚜기의 말을 무시하고는 차표를 구겨버렸다. 이젠 차표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훈이 넌 다음에 보자.”

다훈은 빠르게 뛰어가는 태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누나…… 조만간 시집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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