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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62화 (62/74)

62화

‘아빠? 아빠라니. 그럼 저 아이가……!’

아이는 서원의 품에 안겨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서원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기도 하고, 아부부부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두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는…… 서원과 똑 닮아 있었다.

두꺼운 눈썹과 축 처진 눈매 그리고 동글동글한 콧방울과 올라간 입꼬리. 딱 봐도 진서원 주니어였다.

‘아니야. 설마…… 아닐 거야.’

태준은 부정하고 싶었다. 3년 만에 다시 만난 다연의 곁에 다른 남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건가?

어쨌든 태준은 애써 아닐 거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아이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전까지는.

“아빠아, 엄마아. 타랑해요.”

아이는 짧은 팔을 머리 위로 들어 하트 모양을 만들며 애교를 부렸다.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다연과 서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척이나 화목해 보였다.

태준은 다연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딱 저런 모습을 꿈꿨었다. 다연과 자신을 꼭 닮은 아이와 함께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 그런 미래를 꿈꿨는데…….

맥이 탁 풀려버린 태준은 망설임 끝에 발걸음을 돌려버렸다.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버렸는데…… 한 아이의 엄마가 됐는데…… 이제 와서 내가 뭘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너를 어떻게 만나겠는가.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던 태준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

“왜? 뭐 있어?”

“누가 있는 것 같아서.”

다연이 숲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하자, 서원이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 이상하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고양이라도 있었나 보지. 들어가자. 춥다.”

“그래.”

아이를 안은 서원과 다연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한가운데에는 난로가 놓여 있어 안을 훈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다연은 장갑을 끼고는 난로 위에 올려놓은 고구마 껍질을 깠다. 그러자 잘 익은 고구마가 속살을 드러냈고 달콤한 향을 풍겼다. 다연은 고구마를 호호 불어 아이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근데 너 요 녀석. 왜 자꾸 나더러 엄마래?”

“엄마아. 엄마아.”

“이것 봐. 또 그런다? 누구 혼삿길 막을 일 있나.”

다연은 입으로는 툴툴거렸지만, 아이가 사랑스러운지 눈은 웃고 있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우리 도윤이가 머리카락 길면 엄마, 짧으면 아빠, 그런다니까.”

“야, 나한테 작업 걸려던 남자가 얘가 나한테 엄마라고 부르는 장면을 봤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다, 끔찍해.”

다연이 피식 웃으며 농담을 하자, 서원이 물었다.

“남자 만날 생각은 있고?”

“그럼. 난 뭐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냐?”

서원은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다연을 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녀의 마음에는 한 남자뿐이었다.

새로운 남자 만나서 새로운 인생 살겠다고 말을 하곤 했지만, 다연의 행동을 보면 그 말이 전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니. 그럼 소개팅 할래요?”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도윤 엄마가 나섰다. 서원은 도윤 엄마에게 다가가 커피 내리는 것을 도우며 거들었다.

“전에 그 사람 말하는 거지? 선배라던?”

“응. 언니. 저 아는 선배가 변호사인데, 돈도 잘 잘 벌고 되게 잘 생겼어요.”

“그래. 그 사람 잘생겼더라. 나보다는 못하지만.”

“뭐래.”

“뭐야? 그럼 나보다 잘 생겼다는 거야?”

“뭐, 그건 양심에 맡겨야 하지 않겠어?”

부부는 투덕거리면서도 자신들의 본분은 잊지 않았다.

“언니. 암튼 그 선배 성격도 좋은데, 언제 한 번 날 잡을까요?”

도윤 엄마의 재촉에 다연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날 좀 풀리면.”

“또요? 날 풀리면 또 딴소리할 거면서. 봄맞이 대청소를 해야 한다는 둥, 봄이라 손님이 많다는 둥. 그러지 말고 크리스마스에 소개팅 어때요?”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말 나온 김에 날짜 잡아.”

서원이 옆에서 부추겼지만, 다연은 단호했다.

“안 돼. 날 더 추워지기 전에 식당 손도 좀 봐야 하고, 날 추워지면 식당 못 비워. 작년에도 수도 다 얼어서 얼마나 고생했다고.”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남자 얘기만 나오면 ‘나도 이제 남자 만나야지.’라는 말을 하는 다연이었다. 하지만 막상 소개팅 등의 자리를 주선하면 이런 식으로 거절을 하곤 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도 이미 여럿이었다. 그 많은 남자들을 거절하기에 아예 마음이 없나 싶다가도, 도윤에게 누구 혼삿길 막을 일 있냐는 등의 말을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그녀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너 확실히 해. 진짜 남자 만날 생각 있어?”

서원이 다시 한 번 확인하자, 다연은 힐끔 밖을 내다보더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언제까지 혼자 살아. 죽기 전에 결혼은 해봐야지.”

“얘 말은 뭐가 진심인지 모르겠다니까.”

서원은 큰소리 떵떵 치는 다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밖에 있던 정은은 딸의 대답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딸의 가슴에 한 남자가 콱 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데, 남들이 옆에서 떠든다고 뭐가 바뀌겠는가. 다만 엄마가 걱정할까 싶어 괜한 말을 하는 거겠지.

3년 전. 엄마의 집으로 들어간 다연은 힘겹게 마음을 추스른 후, 취직할 곳을 알아보았다. 엄마는 더 쉬라고 말했지만,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고, 무엇보다 입에 풀칠하고 살려면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때, 식당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게 바로 엄마였다. 그럴 돈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 다연의 말에 엄마는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다연의 결혼 자금으로 모아둔 돈이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세를 얻고 주방과 홀을 꾸밀 정도의 돈은 되었다. 거기에 취직한 다훈이 다연에게 빌린 돈을 매달 조금씩 갚고 있어, 식당 오픈할 때 도움이 되었다.

다연은 가족들의 말에 용기를 내어 그녀가 꿈꾸던 식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외진 곳이긴 했지만, 그녀의 음식 솜씨에 단골손님이 꽤 늘었다. 특히 SNS로 유명해져 성수기 때에는 여행객들이 줄 서서 먹는 식당이 되었다.

“반찬 싸놨어. 갈 때 갖고 가.”

정은이 들어오며 식탁 위에 반찬 통을 올려놓자, 서원이 미안해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감사해요. 매번 올 때마다 반찬 싸주셔서.”

“감사하긴. 너도 올 때마다 바리바리 싸 들고 오면서.”

정은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그나마 옆에 서원이 있어서 다연이 식당 열기가 수월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주었고, 정은은 그게 두고두고 고마웠다.

“지금 올라가게?”

“네. 길 막히기 전에 가봐야죠.”

“그래. 조심히 가고.”

정은은 서원 몰래 도윤의 옷 사이에 돈을 찔러주었고, 다연은 서원의 가족을 배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조심해서 올라가.”

“그래. 너도 잘 지내고. 날 더 추워지기 전에 수도관에 보온재 씌워두고.”

“응. 그럴게.”

먼저 차에 올라탄 도윤 엄마가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언니. 다음에 또 봐요.”

“그래. 도윤이 잘 키우고.”

“소개팅 하고 싶으면 연락해요. 아니다. 서울 올라오면 바로 전화해요.”

“알았어.”

인사를 끝내자 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원 부부는 떠났고, 다연과 정은은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아이구, 허리야.”

“엄마 허리 아파? 그럼 먼저 들어가.”

“넌?”

“난 저녁 장사해야지.”

“날도 추워서 손님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그냥 들어가자.”

정은은 빨리 장사 접고 쉬자며 딸을 유혹했지만, 다연은 단호했다.

“안 돼. 점심 저녁으로 영업한다고 SNS에 올렸는데, 말없이 쉬는 건 약속을 어기는 거지.”

“네가 올렸냐? SNS 그거 죄다 손님들이 올린 거잖아.”

“영업시간 물어봤을 때 그렇게 대답했으니 올렸지. 엄마 먼저 들어가.”

“나 혼자?”

정은은 혼자 장사를 하고 있을 딸이 안타까워 망설였지만, 오늘따라 허리가 너무 아팠다.

“그냥 가자. 개인 사정 있다고 써놓으면 되잖아.”

“엄마 먼저 가라니까. 나 어차피 오늘 수도관에 스티로폼 씌우고 가려고 했거든.”

“나중에 다훈이랑 같이 하자니까.”

“그럼 늦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진즉부터 같이 하자니까. 나중에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는.”

“그땐 하기 싫었고. 근데 날 추운 거 보니까 겁나서 오늘은 해야 할 것 같아.”

그렇긴 했다. 날이 제법 쌀쌀한 게 새벽에는 기온이 뚝 떨어질 것 같았다. 작년에도 수도가 어는 바람에 고생했던 터라 정은은 더 이상 다연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빨리하고 들어와.”

“응. 조심히 들어가요.”

정은이 가방을 챙겨 식당을 나서자, 다연은 본격적으로 월동 준비를 시작했다.

수도관을 감쌀 스티로폼과 창문에 붙일 뽁뽁이 그리고 외풍을 막을 문풍지까지 꺼내 놓으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다행히 난로를 미리 설치해둔 덕에 식당 안은 따뜻한 편이었다.

다연은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라디오에서는 은은한 음악이 끝나고 듣기 좋은 DJ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후면 벌써 크리스마스네요. 거리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어 있어서 보는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데요. 올 크리스마스는 유독 기다려져요. 왜냐고요? 올 크리스마스 때 첫눈이 내린다고 해요. 혹시 그거 아세요? 사랑하는 사람과 첫눈을 함께 맞으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는 것. 여러분들은 올 크리스마스를 누구와 함께 보내기로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맞이하는 건 어떨까요? 노래 나갑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꽤 오래된 크리스마스캐럴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DJ의 말처럼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다연은 자연스럽게 태준에게 프러포즈 받았던 그때가 떠오르곤 했다.

그에게 받은 반지는 상자에 들어가 주인의 예쁨도 못 받고 있지만,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다연은 반지를 꺼내 보곤 했다. 평소에도 태준이 보고 싶지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그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더 바쁘게 일을 하곤 했다. 남들이 다 놀고 즐길 때, 다연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정신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손님이 없어 한가해지면 없는 일도 만들어내서 몸을 혹사했다. 꼭 지금처럼 묵혀두었던 늦은 월동 준비를 하거나, 식당 대청소를 하면, 잠시라도 그를 잊을 수 있었다.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고, 문틈 사이사이 문풍지를 끼워 넣자, 식당 안이 더욱 따뜻해진 것 같았다.

“가만 보자. 이제 수도관만 정리하면 되나?”

다연이 수도관을 감쌀 스티로폼을 들고 주방으로 향할 때였다. 식당 문에 걸어둔 종이 딸랑하고 울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

손님을 향해 인사하던 다연은 흠칫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 위로 태준의 인영이 가득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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