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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61화 (61/74)

61화

1231. 비밀번호를 누르고 태준의 집에 들어온 인경은 자연스럽게 그의 방으로 향했다. 암막 커튼이 쳐져 있는 방안은 아주 어두웠다.

인경은 커튼을 젖히는 대신 불을 켰다. 불이 켜지자 태준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인경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어?”

“방금. 와! 근데 선배 사극 찍어도 되겠다. 수염이랑 머리 엄청나게 길었네? 대역죄인 같아. 아, 아니다. 망나니 같다!”

인경이 자신의 몰골을 보며 까르륵댔지만, 태준은 침대에서 일어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약은?”

“여기.”

“약 좀 세게 지어줘. 잠이 잘 안 와.”

“어제도 술 마셨지? 술을 그렇게 물 마시듯 퍼마시니까 그렇지.”

“자꾸 바가지 긁을 거야?”

“술 마시고 약 먹으면 속 다 버려.”

“잔소리할 거면 가.”

“쳇. 알뜰하게 부려먹으면서 잔소리도 못하게 하냐?”

“가라.”

태준은 인경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듯,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약이 없으면 한 시간도 눈을 붙이지도 못하면서 잔소리는 듣기 싫은 모양이었다.

인경은 침대에 누운 태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180cm가 넘는 그가 60kg도 안 될 것 같았다. 어쩜 저렇게 말랐는지, 허리와 팔다리가 너무도 가늘어졌다.

인경은 조금 전, 박 여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우리 아들이랑 친한가요? 엄마가 돼서 아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네요.”

박 여사는 조금 민망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인경은 뭐 그럴 수도 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고등학교 후배예요. 선배랑은 일주일에 한두 번 보고 있고요.”

“일주일에 한두 번이나요?”

박 여사의 눈이 번쩍였다. 혹시 둘이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새롭게 만나는 사이이거나 뭐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인경은 괜한 오해는 피하고 싶어 솔직하게 말했다.

“태준 선배, 주치의예요.”

“주치의?”

“의료법상 자세히는 설명 못 드려요. 잘 아시잖아요.”

“아…… 그렇죠. 잘 알죠.”

박 여사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인경이 무슨 과 의사인지, 태준이 어디가 아픈지.

그래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이렇게 찾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우리 태준이 잘 부탁해요.”

“네. 안 그래도 잘 보살피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박 여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고, 인경은 그런 박 여사를 보고는 마음이 흔들렸다. 본래 오지랖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쓸쓸한 박 여사의 모습을 보니 오늘은 오지랖 좀 부려야 할 것 같았다. 저러다가 태준이 아니라 박 여사가 먼저 쓰러질 것만 같아서 말이다.

“저기, 어머니!”

인경의 부름에 박 여사가 몸을 돌렸다.

“태준 선배가 아픈 이유는 아시죠?”

그녀의 질문에 박 여사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 아닌 것도 아시나요?”

“처음이 아니라뇨?”

박 여사가 놀라 묻자, 인경은 그간의 일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13년 전 태준이 사고를 당하고 나서 외국을 전전한 이유, 하루에 한 시간도 잠을 자지 못해 몸이 망가졌던 것, 다연을 다시 만나고 나서 건강을 완벽하게 회복한 것 등등.

인경의 이야기를 들은 박 여사는 눈물을 흘렸다.

“몰랐어요. 전혀 몰랐어요.”

“선배한테 다연 씨는 생명과 같은 존재였어요. 선배를 숨 쉬게 했고, 잠들 수 있게 했고, 웃게 했거든요. 다연 씨를 만나고 나서 선배가 웃는데, 전 선배가 그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 처음 알았어요.”

그런 애한테 다연을 뺏다니.

박 여사는 그제야 자신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살고 싶다는 아들한테서 목숨을 빼앗고, 숨을 쉬고 싶다는 아들한테서 공기를 빼앗았다. 잘 먹고 잘 웃는 아들에게서 먹을 것과 웃음을 빼앗은 것이었다. 살고 싶다는 아들의 처절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도 이겨냈으니까 이번에도 이겨낼 거예요.”

인경이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박 여사가 너무 안쓰러워 보여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러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인경이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이번엔 박 여사가 그녀를 불렀다.

“저기……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박 여사가 했던 말을 떠올리던 인경은 태준이 덮고 있는 이불을 확 들쳐버렸다.

“뭐야?”

“선배. 내가 생각해 봤는데.”

“생각하지 마. 머리 아파.”

“답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아. 그리고 방법은 의외로 쉽다?”

“무슨 소리야?”

인경은 태준의 손을 잡더니 그를 확 끌어당겼다. 얼마나 몸이 가벼운지, 그녀가 잡아당기니 그를 금방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왜 이래? 귀찮아.”

“자자. 밖을 좀 봐봐. 벌써 봄이 왔어.”

인경은 그를 세워둔 채 커튼을 젖혔다. 그러자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봉오리와 푸릇한 작은 새싹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뿐. 태준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귀찮게 하려면 가.”

“이렇게 일어나서 걸음만 조금 옮겨봐.”

“뭐 하는 거야?”

“그럼 다시 다연 씨 찾을 수 있을걸?”

“!”

다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자, 태준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지난 5개월간 거의 금지어가 된 이름을 인경이 겁도 없이 꺼낸 것이었다.

“로또에 당첨되고 싶으면 가장 먼저 뭘 해야 하는지 알아?”

“…….”

“좋은 꿈을 꾼다? 땡. 운수가 좋아야 한다? 땡.”

“…….”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로또를 사야 해. 로또를 사지도 않고 당첨되고 싶다는 건 완전 어불성설이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태준은 별 시답지 않은 말을 하는 인경이 귀찮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인경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연 씨 보고 싶으면 찾으러 가.”

“!”

“13년 전에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

인경이 가고 난 후, 태준은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떠난 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회사도 나가지 않았고, 레시피 개발도 하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지도 않았다. 그저 검은 집 안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고 괴로워했을 뿐.

나를 떠난 그녀를 그리워했고, 이런 상황을 만든 어머니를 원망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거지 같은 상황이 언젠가는 일어나리라는 것을.

“다연 씨 보고 싶으면 찾으러 가. 13년 전에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인경의 명쾌한 답에 태준은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김인경, 명의네.”

소파에서 일어난 그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길어버린 수염을 잘랐다. 머리카락은…… 헤어샵을 가봐야겠다.

태준은 결심했다. 오늘부터 꽤 긴 여행을 떠나기로.

***

“하아. 하아.”

태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은 높고 산들은 울긋불긋 예쁜 색을 입고 있더니, 어느새 꽤 추워졌다.

다연을 찾아 헤맨 지 벌써 3년.

이번엔 그녀를 찾기 위해 외국이 아닌, 대한민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다연은 그 무엇보다 한식을 좋아했고, 이 땅에서 자라는 것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전에 나 꿈이 있었어요. 작은 시골 마을에 식당을 하나 차리는 거예요.”

그녀가 품었던 꿈을 찾아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러면 그 길 끝에 다연이 있을 것만 같아서.

꽤 쌀쌀한 바람을 가르며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 여행객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맛있지?”

“어. 분위기도 좋고, 감성 쩔더라.”

“그렇게 외진 장소에 이렇게 맛있는 식당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까?”

“난 피자 위에 깻잎 올린 거 보고 깜놀 했는데, 의외로 되게 맛있더라.”

깻잎 피자라는 말에 태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식당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메뉴를 파는 거예요. 깻잎 올린 식빵 피자랑, 성게알 죽이랑, 양평 해장국이랑.”

“근데 메뉴가 되게 뜬금없더라. 피자 파는 데서 해장국이 웬 말이야.”

까르륵 웃는 여행객들의 말에 태준은 그들을 불렀다.

“저기요. 지금 말씀하시는 식당, 어디에 있습니까?”

질문하는 그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

식당은 꽤 찾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수풀을 가르고 굽이진 길을 걷고 또 걸어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 외에는 올 수 없도록 꼭꼭 숨겨두기라도 하듯, 식당은 정말 외진 곳에 있었다.

잘 다져놓은 땅 위에 동화 속에 나오는 오두막처럼 생긴 예쁜 식당이 보이자, 태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다연이 말한 꿈의 식당과 똑같은 곳이었다.

몇 발자국만 더 걸어가면 식당 문 앞에 다다를 텐데, 태준은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두 손이 너무 떨려서, 다연을 보면 왈칵 눈물부터 흘릴 것만 같아서.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 태준이 용기를 내어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식당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태준의 숨이 멈춰 버렸다.

단정한 원피스 위로 베이지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녀는, 다연이었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며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하얀 얼굴 위로 보석이 떨어지기라도 하듯 그녀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밝게 웃는 미소도, 호선을 긋는 눈도, 찰랑거리는 머리카락도,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게 하는 분위기도. 태준이 찾던 다연이 확실했다.

태준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걸었다.

와락 껴안고 왜 이렇게 날 미치게 만드냐고, 왜 날 아프게 했냐고, 왜 이렇게까지 독하냐고 혼이라도 낼 작정이었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엄마아.”

식당에서 웬 아이가 나오더니 다연의 품에 안겼다.

순간 태준의 걸음이 멈추었고, 아이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엄마?’

태준은 다연의 품에 안긴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이를 보는 태준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아장아장 걸으며 ‘엄마’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두 살 정도는 되어 보였다.

‘두 살이면…….’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아이가 혹시 자신의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설마 혼자 아이를 낳고 기르고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태준이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진도윤! 추운데 왜 나갔어?”

식당에서 웬 남자가 나오더니, 다연의 품에 안긴 아이를 안았다.

“다연아 넌 안 추워?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나왔어?”

태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주시했다. 누구기에 다연에게 저렇게 다정하게 구는 건지, 누군데 아이를 자연스럽게 안는 건지.

그때. 남자가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태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태준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다연의 가장 친한 친구인 진서원이었다. 얼마 전에도 그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다연에게 연락 온 건 없냐고 물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연과 만나고 있었다니.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서원의 품에서 꼼지락대던 아이가 서원을 향해 말했다.

“아빠. 아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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