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이 진동했다.
잠시 눈을 붙였던 태준은 깜짝 놀라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나 다연일까 기대에 찼던 그의 눈동자에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여보세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태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태준! 너 무슨 일 있었어?
“아침부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다연 씨 말이야.
다연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태준은 침대에서 튕기듯이 일어났다.
덥수룩한 수염, 헝클어진 머리카락, 퀭한 두 눈에 살이 쏙 빠진 얼굴. 태준은 그날 이후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다.
회사 일을 끝내고 나면 곧장 다연의 집으로 향했고, 불 켜진 그녀의 방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떤 날에는 아예 다연의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거기서 잘 때도 많았다.
벌써 2주가 넘도록 그녀를 보지 못했던 태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다연이가 왜?”
-다연 씨가 사표를 냈어.
“뭐?”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안 그래도 병가를 너무 길게 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무슨 일인지 자세하게 말해 봐.”
태준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오늘 일찍 나갈 일이 있어서 지금 회사에 나왔더니 다연 씨가 왔더라고.
시계를 확인하니 7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는 회사를 못 다닐 것 같다면서 사표를 주더라고. 원래는 너한테 내려고 했는데, 급히 가야 할 데가 있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다연이는?”
-갔지.
“그냥 보내면 어떡해! 잡았어야지!”
-방금 갔고 바로 너한테 전화한 거야.
그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몰랐던 태훈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어디로 갔어?”
-집에 간다던데?
“알았어. 끊어.”
태준은 곧장 다연의 집으로 향했다.
오피스텔에 도착한 태준은 다연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다연아! 연다연!”
하지만 아무리 벨을 누르고 그녀를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쾅쾅쾅! 태준은 문을 두드리며 다시 다연을 불렀다.
“다연아! 문 좀 열어봐!”
미친 듯이 다연을 불렀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옆집 사람이 문을 벌컥 열며 태준을 향해 소리쳤다.
“거참 시끄러워서 못 살겠네! 아침부터 왜 빈 집을 그렇게 두드려요?”
빈 집이라는 말에 태준은 옆집 남자에게 다가가 다급하게 물었다.
“빈 집이라뇨? 여기 살던 사람 어디 갔나요?”
“새벽 일찍 이사 가던데요.”
“이사요? 어디로요?”
“그건 나도 모르죠. 암튼 저 집에 사람 없으니까 시끄럽게 굴지 말아요!”
남자는 태준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기회를 잡아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화가 누그러들 때까지 빌고 사정하고 애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회사에 사표까지 내고, 이사를 하다니.
어딜 갔을까? 이사를 하였으면 간다고 누구한테 말하고 가진 않았을까?
“아, 맞다!”
태준은 뭔가가 떠오른 듯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진식당이었다. 식당 사장과 친구라고 했으니 그는 뭔가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새벽 장을 보고 온 서원이 물건 정리를 하고 있었다.
“진서원 씨.”
태준이 부르자, 서원은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부른 사람이 태준임을 알아본 서원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다연은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는 서원을 찾아왔다.
매일같이 가게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하거나 간단한 안주에 맥주 한잔을 마시고 가던 그녀였다. 하지만 요즘 발길이 뜸하기에 남자친구가 생겼나,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찾아온 다연이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찾아오자, 서원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연은 바짝 마른 입술을 겨우 떼어내며 당부했다.
“아마 태준 씨가 널 찾아올 거야. 이사 가고 자리 잡으면 너한테는 연락하겠지만, 태준 씨한테는 안 할 거야. 만약 너 찾아오면 모른다고 해줘. 미안해. 이런 부탁해서.”
“왜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 건데?”
서원의 질문에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살려고.”
“뭐?”
“그 남자 없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나 여기 있으면 계속 찾아올 텐데,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그 추운 차 안에 앉아 우리 집만 지킬 텐데, 그럼 나 너무 힘들 것 같아. 더 이상 그 남자 아파하는 것도 못 보겠어. 나 때문에 아팠을 거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아.”
자신이 사라지면 태준은 그녀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찾아다닐 거다. 뒤늦게 사라진 걸 알게 되면 놀랄 게 뻔 하니 미리 서원이에게는 말하고 떠난 것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서원이 모른 척 묻자, 태준이 다가와 물었다.
“혹시 다연이 못 봤습니까?”
“다연이요? 집에 있겠죠. 아니면 출근하는 길이거나.”
“정말 모릅니까?”
“뭘 말입니까?”
“다연이 이사 갔습니다. 사라졌다고요! 가장 친한 친구라면서 그것도 몰랐습니까?”
태준이 크게 소리치자, 서원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애인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
“연락처나 남겨두고 돌아가시죠. 혹시 연락 오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태준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서원에게 명함 한 장 내밀고 밖으로 나오는 것밖에.
태준은 온종일 다연이 가볼 만한 곳을 돌아다녔다. 다연과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어디 갔는지, 갈만한 곳이 어딘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다 헛수고였다.
다연은 태준이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꼭꼭 숨어버렸다. 아주 꼭꼭.
***
5개월 후.
박 여사가 커다란 암막 커튼을 젖히자, 밝은 빛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자르지 않아 길어버린 머리카락과 수염, 먹지 않아 홀쭉해진 얼굴과 몸, 퀭하게 내려앉은 눈과 사람인지 뱀파이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핏기 없는 얼굴색까지.
과거 깔끔했던 서태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왜 또 오셨어요.”
“너 이러고 있을까 봐 왔지.”
박 여사는 바닥을 뒹굴고 있는 술병과 재떨이를 치웠다.
다연이 떠난 후, 태준은 그야말로 폐인이 되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았고, 멍하니 앉아 다연을 불렀다. 부르고 또 불러도 대답이 없으면 술을 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마치 알코올로 머리를 소독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미친 듯이 술만 마셨다. 저러다 죽으면 어쩌나 싶을 만큼 마시고 또 마셨다.
“뭐라도 챙겨 먹으면서 술을 마셔야지. 그러다가 속 다 버려.”
박 여사는 냉장고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해다 준 반찬은 다 말라 비틀어졌고, 허옇게 곰팡이가 핀 것도 있었다.
박 여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태준을 찾아왔다. 올 때마다 원망 가득한 태준의 눈빛과 마주해야 했지만, 아들이 너무 걱정돼서 안 찾아올 수가 없었다.
저러다가 혹시 나쁜 마음먹는 건 아닐까, 저러다가 혹시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닐까, 저러다가 혹시 내 아들 죽는 건 아닐까…… 미친 듯이 걱정되어서.
내가 그때 괜한 소리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때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주었더라면…… 내가 그때 그냥 모른 척 지나갔더라면…….
박 여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녀는 태준이 다연을 구하다 다쳐 병원에 누워 있었던 지난 1년보다, 태준이 다연을 잃고 폐인처럼 사는 최근 5개월이 더 괴로웠다.
그땐 그래도 희망이라도 보였지만, 지금은 암흑이었다.
암막 커튼을 닫아놓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태준의 집처럼, 태준의 마음 또한 성능 좋은 암막 커튼이 닫혀 있었다.
박 여사가 아무리 열려고 해도 절대 열리지 않는 암막 커튼이 말이다.
“죽 좀 쒀왔으니까 먹어.”
“가져가세요.”
박 여사는 하얀 미음과 백김치를 담은 트레이를 들고 태준에게 다가갔다.
“엄마 성의를 봐서라도 조금만 먹어.”
“…….”
“한 술만. 응? 딱 한 술만 떠봐.”
아들의 손에 억지로 숟가락을 쥐어주었지만, 태준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제발. 엄마 소원이다. 응?”
대답 없이 소파에 누워 몸을 돌려버리는 태준을 보자, 박 여사는 울컥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데! 밥도 안 먹고 매일 술만 마시고, 어디까지 망가질 거냐고!”
“…….”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못 했어. 그러니까 밥 좀 먹자, 응? 제발.”
박 여사가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칠 그때, 태준이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싶어요.”
“응? 뭐라고?”
“저도 살고 싶다고요. 저도…… 저도…… 살고 싶다고요.”
간절한 목소리였다. 아들은 그 누구보다 살고 싶다며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나 좀 여기서 꺼내 달라고, 제발 나 좀 여기서 구해달라고, 태준은 사정하고 있었다.
“근데 어머니 전 다연이 없이는 못 살아요.”
“…….”
“다연이가 제 숨이고, 제 심장이에요.”
“하아…….”
태준은 그 말을 남기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박 여사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는 바람에 테이블에 올려둔 트레이가 엎어지며 그 위에 놓여 있던 죽과 백김치가 바닥에 와르르 쏟아져버렸다.
박 여사는 바닥에 쏟아진 음식들이 마치 자신처럼 느껴졌다. 아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던 자신의 노력이 바닥에 곤두박질쳐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얼마나 사랑하는 아들인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박 여사는 더럽혀진 집을 치우고, 세탁기를 돌린 후, 냉장고를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모두 마친 후에야 아들의 집에서 나왔다.
도우미 아주머니를 보내도 되는 일이었지만, 박 여사는 제 손으로 하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태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오는데, 누군가 대문을 열고 마당을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들의 집에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오는 건 처음인지라 박 여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누구세요?”
뒤늦게 박 여사를 발견한 여자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태준 선배 어머니시죠?”
“그런데 누구……?”
“전 후배 김인경이라고 합니다.”
“후배? 아……. 어쩐 일로?”
박 여사는 태준에게 여자 후배가 있는 것도 게다가 집을 들락거리는 것도 몰랐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연이 떠난 후, 태준을 찾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태준 선배 괜찮은지 보러 왔어요.”
“아…… 그래요?”
“선배 안에 있죠?”
“네.”
“그럼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경이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박 여사가 그녀를 불렀다.
“저기…… 혹시 우리 태준이랑 친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