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밖으로 나온 다연은 정처 없이 걸었다.
길을 걷는 사람들과 마구 부딪혔지만,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걷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렸고,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소리치기도 했지만, 그 또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연의 귓가에는 태준의 어머니가 했던 말만 맴돌았다.
“아가씨! 아가씨도 알고 있었지? 아가씨 때문에 우리 태준이가 죽을 뻔한 거?”
“두 달 넘게 깨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듯 살았던 게 다 저 여자 때문이라면서!”
“양심이 있으면 우리 태준이랑 결혼하는 건 아니지! 내 아들이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내 아들 꿈이 당신 때문에 무너졌는데! 이렇게 뻔뻔하게 찾아오는 건 아니지!”
어느새 다연은 13년 전 그 장소로 옮겨졌다.
자신을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태준, 그 반대편에서 태준을 반기며 뛰어가는 어린 다연.
“안 돼. 가지 마!”
현실의 다연이 말렸지만, 어린 다연과 태준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서로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좁은 찻길을 미친 듯이 달려오는 대형 트럭이 보였다.
빵빵! 빵빵빵!
고막을 찌르는 클랙슨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댔지만, 이미 찻길 위에 선 어린 다연은 바짝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때, 어린 다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태준이 트럭에 치일 뻔한 자신을 밀치고 대신 차에 치였다.
“안 돼!!!”
그의 몸이 붕 뜨며 풀숲에 쓰러진 어린 다연과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의 눈빛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었는지 어린 다연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현실의 다연이 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어린 다연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우리 꼭 다시 만나자. 다연아.
“으아아아악!”
가슴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미친 듯이 아팠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에서 꺽꺽 하고 고통스러운 소리만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왜! 왜 난 몰랐을까. 별 사고 아니었다는 그의 말을 왜 순진하게 믿어버렸을까. 그렇게 큰 트럭이, 트럭 위에 쌓였던 철근이 그의 몸 위로 쏟아져버렸는데, 왜 난 별거 아니었다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을까.
날카롭고 무거운 철근에 깔려, 온몸이 찢기고 손이 짓눌렸을 그를 생각하니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리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남자가 나를 대신해 죽을 뻔했다니, 내가 그 남자를 위험하게 했다니!
그래. 지금은 둘 다 멀쩡하니까, 건강하니까, 모두 지난 일로 치부한다고 해도…… 내가 그 남자의 꿈을 꺾었다니! 내가 그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다니!
그 생각을 하니 죽을 듯이 괴로웠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는 다연이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의 꿈을 그렇게 짓밟았다니.
“아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잔기침을 토해내고, 폐부 가득 공기를 들이마셔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내 숨은 그가 되었는데, 그가 곁에 없다는 생각에 숨부터 막혀왔다.
다연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내려와 앉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검은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꽤 많은 양의 눈이었다.
온 세상이 행복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젊은 연인들이 올해의 첫눈을 맞으며 정답게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다연은 이번에도 그와 함께 첫눈을 맞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
노심초사 딸을 기다리던 정은은 퀭한 얼굴로 들어오는 다연을 보고는 그녀를 붙잡았다.
“얼굴이 왜 이래? 울었어? 얼굴에 상처는 왜 생긴 거야?”
“…….”
“왜? 그 집에서 뭐라고 해?”
“엄마…….”
“내 그럴 줄 알았어. 감히 내 딸을 불러놓고 면전에서 독한 소리를 해?”
정은이 이를 아득 갈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막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달려가 인터폰 화면을 확인한 정은은 욕을 지껄였다.
“저 썩을 놈. 제 부모님 설득도 못 시켜놓고 내 딸을 울려?”
정은이 나가 문을 열려고 하자, 다연이 그녀를 말렸다.
“엄마. 내가 나갈게.”
“넌 여기 있어! 엄마가 가서 한소리 해야겠으니까.”
막 문고리에 손을 얹으려고 하자, 다연이 그녀를 막았다.
딸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파랗게 얼어붙은 손에 놀란 정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연이 핏기 없는 얼굴로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나갈게. 내가…….”
꼭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한 다연을 보고 정은은 더 말리지 못했다. 그녀는 태준과 다연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다연이 문을 열자, 다급한 얼굴의 태준이 보였다.
급하게 뛰어온 모양인지,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꼭 참으며 냉랭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다연아.”
갑자기 듣게 된 이야기에 얼마나 놀랐을까. 우리 부모님의 반응에 얼마나 상처 받았을까.
파리하게 떠는 그녀의 여린 몸을 보자 안쓰러웠던 태준이 다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아주고 싶었다. 따뜻하게 그녀를 품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연은 뒷걸음질 치며 그의 손을 피했다. 갈 곳을 잃은 그의 손이 허공을 헤매고 있을 때, 다연이 메마른 두 입술을 떼며 말했다.
“왜 말 안 했어요?”
“…….”
“말할 기회 많았잖아요. 양평에서 태준 씨가 별장 오빠라는 거 알게 됐을 때도, 내가 왜 의대 포기했는지 물었을 때도, 아니면 우리가 함께 있던 시간 아무 때나. 말할 기회는 많았잖아요!”
원망하는 목소리였지만, 다연의 눈에는 아픔이 가득했다.
아픔을, 그 괴로움을, 왜 혼자 감당했느냐고 묻고 있었다.
“왜 당신 꿈까지 포기하면서 날 구했느냐고요!”
“네가 없으면 내 꿈이 다 무슨 소용인데!”
“……!”
“네가 없으면 난 살 수가 없는데! 숨조차 쉴 수가 없는데! 꿈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않으려고 그토록 입술을 꽉 깨물었는데,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는 아픔을 견디며 주먹을 쥐고 있었는데, 결국 눈물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의사가 되는 건 내 꿈이 아니었어.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있었으면 했던 아버지 꿈이었고, 아버지 꿈을 이뤄 화목한 가정을 이뤘으면 했던 어머니 꿈이었어. 그러니까 가책 따위 느끼지 마.”
당신은 가책을 느끼지 말라고 했지만, 어떻게 그래.
당신은 날 구하고 두 달 동안 사경을 헤맸고, 손목 신경이 나갔어.
나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당신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당신 부모님은? 아들이 죽을까 봐 마음 졸였던 부모님 생각은 안 해? 날 볼 때마다 그때를 떠올릴 부모님 생각은 안 하냐고!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다시 설득할게. 그러니까 다연아…….”
“아뇨.”
싸늘한 말투에 놀란 태준이 다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닦았고, 처연한 표정을 지웠으며, 슬픔을 감춘 얼굴 위에 냉정함을 씌웠다.
“내가 감당 못할 것 같아요.”
“!”
“난 당신 부모님께 영원히 아들 죽일 뻔한 여자일 테고, 아들 꿈을 꺾은 원망스러운 여자일 테니까요. 아까 날 바라보던 그 차가운 눈빛, 나 그거 못 견뎌요. 내가 굳이 왜? 내가 뭐가 아쉬워서 마음 불편하게 살아요? 싫어요. 나 그렇게 불편하게 살기 싫어요.”
“다연아…….”
“미안해요. 나 그 불편함 참고 살 만큼 태준 씨 사랑하지 않아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말하는 내내 거짓말이라고, 당신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진심을 말하고 싶어 심장이 울었다. 하지만 다연은 끝끝내 치밀어 오르는 진심을 꾹 밀어 넣고 거짓을 전했다.
“……우리 이만 헤어져요.”
“연다연!”
“나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어요. 당신 보면 죄책감만 든다고요!”
“!”
태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의 말간 눈을 보고 있으면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할 것 같아, 다연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요.”
“나 보고 얘기해! 진심 아니지? 내 눈 똑똑히 보고 얘기하라고!”
다연이 문을 닫으려고 하자, 태준이 문을 잡으며 소리쳤다.
다연은 울컥 치솟는 눈물을 겨우 가라앉히고,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이제…… 그만 끝내요.”
순간 문을 잡고 있던 태준의 손에 힘이 빠졌다.
문이 닫히자, 다연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빠졌고,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놀란 정은이 다가와 그녀를 붙잡자, 다연은 엄마의 품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
“아아악. 엄마. 엄마아…….”
“그래. 엄마 여기 있어. 왜 그래, 왜 그러는 거야?”
정은은 서럽게 우는 다연을 보고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엄마, 태준 씨가 나 때문에 아팠대…….”
“아파? 어디가 아파? 왜?”
“13년 전에 날 구하고 차에 치였대. 그때 사경을 헤맸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다연의 말에 정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린 다연은 기억 못 할지 몰라도 정은은 모든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날. 그해 첫눈이 내리던 크리스마스 날. 태준의 별장에서는 파티 준비에 한창이었다. 정은과 박 여사는 이른 아침부터 음식 준비에 정신이 없었고, 서 원장은 수능 만점을 받은 아들을 자랑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별장 바로 앞에서 교통사고가 난 것을 알았고, 그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었다. 서 원장 부부는 서둘러 서울로 떠났고, 정은은 늦도록 오지 않는 딸을 걱정했다.
정은은 해가 지고 뒤늦게 딸을 찾아 나섰다. 그날 눈이 하도 많이 내려 다연을 찾을 때, 꽤 애를 먹었다. 눈에 파묻혀 있던 다연을 겨운 찾은 곳은 교통사고가 난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그때 다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피에 젖어 있었고, 애는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제 딸을 구하기 위해 태준이 그렇게 다친 거였다니.
정은은 다연을 꼭 끌어안았다.
“엄마. 나 태준 씨랑 헤어질래. 미안해서…… 태준 씨만 보면 자꾸만 죄책감이 들어서…… 다 나 때문인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
“그래…… 그래.”
모녀는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꽤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
며칠이 지났지만, 다연은 방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연차를 내고 출근도 하지 않았고, 밥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죽을 것 같아 정은은 다연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도 무슨 소리만 나면 후다닥 달려와 다연을 살피곤 했다.
미음에 가까운 죽을 쑤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어쩐 일인지 다연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 먹고 기운 차려야지.”
정은이 다가가 침대에 앉자, 다연이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엄마.”
“그래. 말해.”
“나 회사 그만둘래.”
정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신에 어떻게 그와 같은 회사에 다니겠는가.
“집도 이사 갈래.”
“그래. 그러자.”
다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태준의 차가 보였다.
그날 이후. 매일 매일. 그는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