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공금,갠소, IMHA]
차에서 내린 다연은 태준의 앞에서 빙그르르 돌아보았다.
“나 어때요?”
“예뻐.”
“에이. 성의 없이 말하지 말고. 정말 괜찮아요?”
다연이 다시 묻자, 태준이 성의 있게 대답했다.
“화장은 아주 잘 먹었고, 의상은 단정하고 심플한 게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갈 때 딱 알맞고, 헤어는 너무 튀지도 않고…….”
“아! 됐어요. 성의있게 봐달라고 그랬지 누가 그렇게 평가하래요?”
다연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태준이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넣고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너 지금 완벽해. 그러니까 긴장 풀어.”
“정말요?”
“그래. 완벽하게 예뻐. 아까부터 안아주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고.”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던졌던 태준은 결국 제 진심을 말해버렸다.
다연을 태우러 갔을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보며 해맑게 웃는 그녀를 본 순간 태준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원래도 예쁜 그녀였지만, 오늘따라 더 예뻤다. 특별히 신경 쓴 옷차림 때문인지, 하늘에서 휘날리는 눈 때문인지, 그녀는 마치 화보 속 모델 같았다.
한편 안아주고 싶어서 미치겠다는 태준의 말에 다연의 심장은 더 뛰기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심쿵까지 시키다니.
머리 위로 와닿는 부드러운 촉감에 다연은 그에게 폭 안겨버렸다.
“눈이 그쳐 버렸어요.”
“그러게. 우리 다연이랑 첫눈 같이 맞아야 하는데.”
다연이 아쉬워하자, 태준이 그녀를 꼭 감싸 안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결심했어요.”
“무슨 결심?”
“첫눈을 같이 안 맞아도 헤어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태준은 부모님과의 약속만 아니었다면 당장 다연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이 귀여운 모습을 보고 또 보고 싶어서.
“들어가자.”
“네.”
태준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연의 손을 꼭 잡았다.
다연은 준비해온 선물을 들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곧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서 원장과 박 여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 여자친구예요.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연다연이라고 합니다.”
다연은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밝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어 앞에 계시는 어른들을 본 순간, 다연의 얼굴 가득 머금었던 미소가 한순간 사라져버렸다.
어른들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아니, 자신을 반기지 않는 게 얼굴에서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내가 싫다는 것을 감추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게다가 들어오라는 말도, 반갑다는 말도 없이 다연을 현관 앞에 세워두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고, 그걸 감지한 태준은 부모님의 표정을 살피며 다연을 챙겼다.
“손님 왔는데 그냥 세워두실 거예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다연을 빤히 보던 박 여사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요.”
냉담한 그녀의 반응에 다연은 물론 태준도 놀랐다. 아버지야 원래 반대했던 만남이었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어머니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사랑을 응원해줬고, 다연의 가족사를 다 듣고도 반겼던 어머니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렇게 냉담하게 구시는 거지?
예상치 못한 위압적인 분위기에 바짝 얼은 다연은 소파 끝에 떨어질 듯 엉덩이를 겨우 걸치고 앉았다.
그러자 박 여사가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다연을 살피는 박 여사의 표정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또 금세 눈물을 쏟을 듯 슬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갈무리 된 표정은 굳고 단호한 얼굴이었다.
“예전에 우리 양평 별장에서 지낸 적이 있지요?”
박 여사의 첫 질문에 다연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1년 정도 지냈습니다.”
“그랬죠. 한 1년 정도 지냈던 것 같네요.”
박 여사는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묘한 분위기에 태준이 나서려고 하자, 박 여사가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며 조용히 하라는 뜻을 전했다.
태준은 뭔가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불쑥 끼어들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혹시 그때 교통사고를 당한 적 있었나요?”
“그걸 어떻게…….”
“하아. 설마 했는데 맞군요.”
다연의 말에 박 여사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이만 돌아가요. 난 아가씨와 우리 아들의 결혼을 허락해 줄 수가 없네요.”
예상치 못한 싸늘한 말에 다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두 분 모두 태준과의 만남을 허락하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연은 아침부터 꽃길을 걸었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허락해 줄 수가 없다니.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태준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재차 묻자, 박 여사가 아들을 보며 물었다.
“서태준. 너 바른 대로 대답해.”
“뭘요?”
“13년 전에 네가 사고 난 게, 저 아가씨 때문이었니?”
박 여사의 말에 태준은 놀랐고, 다연은 충격을 받은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13년 전, 저 아가씨 살리려고 네가 그 트럭에 치인 거냐고!”
“어머니, 그만 하세요!”
태준이 말렸지만, 박 여사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뭘 그만해? 두 달 넘게 깨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듯 살았던 게 다 저 여자 때문이라면서! 깨어난 뒤에는 네 두 손이 산산이 조각나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어. 숟가락을 들지도 못했고, 그 가벼운 펜도 쥐지 못했다고! 그때 엄마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 귀한 내 새끼가 눈도 못 뜨고, 손도 움직이지 못했을 때 엄마 심정이 어땠는지 아느냐고!”
결국, 박 여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처음엔 태준이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고, 깨어난 후로는 이대로 두 손을 쓰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내 귀한 아들 좀 살려달라고 기도하기도 했고, 내 아들한테 왜 이러냐고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죄송하다고 빌고 또 빌면서 앞으로 하라는 대로 살겠으니 제발 내 아들만 살려달라고 사정하고 애걸했다.
그런데 그게 그냥 사고가 아니었다니. 저 여자를 살리려고 내 귀한 아들이 그 아픔을 겪은 것이었다니!
박 여사의 말에 다연은 발밑이 훅 꺼지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빙빙 돌았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고는 다연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태준이 별일 없다고 안심시킨 덕에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자기처럼 몇 바늘 꿰매고 퇴원한 건 줄로만 알았다. 자신 때문에 그가 생사를 오갔는지, 두 손이 박살났는지는 몰랐다.
그제야 태준에게 품고 있던 의문이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의대는 왜 포기했냐는 질문에 대충 넘겨버렸던 것도, 태훈이 거짓말할 때도 자신이 별장 오빠라는 사실을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것도!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박 여사가 다가와 다연의 여린 어깨를 잡았다.
“아가씨! 아가씨도 알고 있었어? 아가씨 때문에 우리 태준이가 죽을 뻔한 거? 응? 대답해봐!”
“어머니! 그만 하세요!”
태준이 다가와 박 여사를 뜯어말렸지만, 그녀는 끝까지 악다구니를 썼다.
“양심이 있으면 우리 태준이랑 결혼하는 건 아니지! 내 아들이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내 아들 꿈이 당신 때문에 무너졌는데! 이렇게 뻔뻔하게 찾아오는 건 아니지!”
태준이 막고 있음에도 박 여사는 다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통에 박 여사의 손톱이 다연의 얼굴을 긁었고 살점이 파이고 말았다.
하지만 다연은 아픈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13년 전 태준이 얼마나 아팠을까,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님 심정은 오죽했을까.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뺨 위로 피가 흐르는 것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다. 하지만 이미 이성의 끈을 놓은 박 여사는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난 절대 허락 못 해! 정말 내 아들을 사랑한다면 내 아들과 헤어져요! 지금 당장 헤어지란 말이야!”
박 여사의 말에 다연은 고개를 들어 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본 태준은 울부짖듯 소리쳤다.
“아니라고! 너 때문에 내가 아팠던 게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하지만 다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아들 죽일 뻔한 여자를 좋아하겠느냐 말이다.
다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다연! 하지 마!”
태준이 소리쳤지만, 다연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눈은 울고 있는데, 입술은 웃고 있는 묘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두 번 다시는 보기 싫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님 말씀,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연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나가려고 하자, 태준이 그녀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서 원장이 그를 붙잡았고, 박 여사가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비키세요!”
“절대 못 비켜!”
“다연이 이대로 못 보내요!”
“나야말로 너 못 보내! 내 아들 망친 여자한테 절대 못 보낸다고!”
순간 태준의 눈썹이 꿈틀댔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내 아들 망친 여자한테 절대 너 못 보낸다고!”
“결국, 어머니도 아버지랑 똑같으시네요.”
“뭐라고?”
“아니다 아니다 하셨지만 결국 어머니도 제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하시잖아요!”
태준의 말에 박 여사가 흠칫 놀랐다. 자신은 남편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남편처럼 저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아들을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연중에 그런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어머니. 전 어머니를 존경했어요. 어떤 사람이든 위험에 처해 있으면 구해야 하고, 어떤 생명이든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죠? 그래서 전 위험에 처해 있던 다연일 구한 것뿐이에요. 어머니 가르침대로.”
박 여사는 할 말이 없었다. 의사가 되려거든 생명의 소중함부터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그녀였다. 그런데 다연을 구했다고 결혼을 반대하다니. 자신이 너무도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박 여사는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들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