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다연은 어제 백화점에 가서 엄마가 사주신 옷을 입었다.
크림색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A라인 치마를 입고 거울 앞에 선 다연은 연한 색 립스틱을 발랐다. 평소에도 튀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단정하게 꾸몄다.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한쪽 팔에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정은이 기다렸다는 듯 딸을 반겼다.
“아이고, 우리 딸 곱기도 하지.”
“어때, 엄마? 괜찮아?”
“응. 예쁘다. 참 예쁘네.”
정은은 딸을 보며 예쁘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다연은 아주 예뻤다.
화장이 잘 먹은 뽀얀 얼굴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거기에 자신이 사준 옷까지. 정은은 살면서 다연이 오늘 최고로 예쁜 것 같았다.
“혼자 가?”
“아니. 큰길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래. 조심히 가고. 가서 인사 잘하고.”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가려던 다연은 다시 집으로 들어와 부드럽게 정은을 끌어안았다.
“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잘하고 올 테니까.”
“그래. 잘하고 와. 운전 조심하라고 하고.”
“응.”
“늦어지면 전화하고.”
“네.”
다연이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자, 정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하필 그런 꿈을 꿀 줄이야. 일부러 다연에게는 꿈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영 신경 쓰여 죽을 맛이었다.
간밤에 정은은 다연의 화장대 거울이 와장창 깨지는 꿈을 꾸었다. 거울 파편이 튀어 다연의 얼굴에 상처까지 나는 꿈.
기분이 찝찝해서 가지 말라고 말할까도 싶었지만, 한껏 들 떠 있는 다연을 보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별일 없겠지? 그래. 개꿈이야, 개꿈.”
정은은 간밤의 꿈을 개꿈으로 치부하며 불안한 마음을 떨쳤다.
***
밖에는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다연이 손을 뻗자, 손바닥 위로 눈이 떨어졌다가 사르륵 녹아버렸다.
고개를 들어 점점 많아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태준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다연은 빙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안 추워? 어서 타. 자리 데워놨어.”
그의 말처럼 조수석에 올라타자 엉덩이가 따뜻해지면서 살짝 얼었던 다연의 몸이 사르륵 녹았다.
“눈이 오네요?”
“첫눈인가?”
“첫눈이래요. 근데 난 항상 그게 궁금하더라.”
“뭐가?”
태준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자, 다연이 옆에 앉아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요. 지금이 12월인데, 올해 첫눈이라고 하기에는 올 1월에도 2월에도 눈은 왔었잖아요. 근데 왜 지금 오는 눈을 올해 첫눈이라고 할까요?”
다연이 꽤 진지하게 말하자, 태준은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기다리던 눈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기다리던 눈?”
“1월이나 2월에는 눈이 슬슬 지겨워지잖아. 근데 12월 정도에 눈 내리면 반갑잖아.”
“그런가?”
다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이따 내려서 조금 걷다가 들어가요.”
“왜?”
“사랑하는 사람과 첫눈 같이 맞으면 영원히 안 헤어진대요.”
“뭐야. 그런 유치한 미신을 믿는 거야?”
태준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신 따위는 안 믿을 것 같은 다연이 저런 말을 하니 무척이나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미신 아니에요. 내 친구는 남친이랑 첫눈 안 맞아서 그해 크리스마스 때 헤어졌어요.”
“오구. 그랬어요?”
“우씨. 놀리고 있어!”
태준이 장난치자, 다연이 작게 말아 쥔 손으로 그의 팔을 살짝 때렸다.
밖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그들이 탄 차 안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자신을 생각해서 미리 틀어놓은 시트 열선도 따뜻했고, 자신의 손을 꼬옥 잡은 태준의 손도 따뜻했다.
다연은 꼭 오늘처럼만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집에 인사드리러 가는 이 떨림.
아마 오늘 이후로 우린 연인에서 부부가 되겠지. 내년 5월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고, 우리 둘이 알콩달콩 깨를 볶으며 살 거야.
아침이면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모닝 키스로 그를 깨우고 같이 출근하고 돌아오면 또다시 둘만의 파티가 시작되는 거지. 태준 씨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해줄 거고,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끝내면 뜨거운 밤을 보내겠지?
다연은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유미가 결혼은 전쟁이라고 겁을 줬어도 지금 다연에게 결혼은 꽃길 같았다. 다른 건 다 상관없었다. 결혼식이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 예쁜 집이 아니어도 좋다. 태준과 함께라면 말이다.
다연은 태준이 좋았다. 첫 만남은 감추고 싶을 정도로 도발적이었지만, 그는 잔잔한 인생을 살아왔던 연다연을 도발하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다정했다. 그리고 그가 별장 오빠라니. 첫사랑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오빠 운전하는데 때리면 되겠어, 안 되겠어?”
“풋! 오빠라고 그러니까 되게 어색하다.”“왜? 예전에는 오빠라고 잘 불렀잖아.”
“그땐 어렸고. 지금은 이미 태준 씨라는 호칭도 익숙하고.”
“예전에 네가 별장 오빠하고 부르며 기분 좋았는데.”
“왜요? 듣고 싶어? 불러줄까?”
“싫어.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태준이 거절하자, 다연이 그의 팔에 기대었다. 운전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 살짝. 정말 살짝 그의 팔을 만졌을 뿐인데, 옷 안쪽으로 딱딱한 근육이 만져졌다. 평소에 운동도 꾸준히 하는 것 같지만, 칼질하면서 만들어진 근육 같았다.
다연은 기분 좋게 그의 팔뚝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오늘 크리스마스네.”
“갔다 와서 둘이 파티 할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식빵 피자?”
“식빵 피자가 그렇게 좋아?”
“그럼요. 별장 오빠가 날 위해 처음으로 해준 요리인데.”
“나 그때까지 라면도 내 손으로 끓여본 적 없었어.”
태준이 으스대며 말하자, 다연이 빙긋 웃었다.
안다. 그래서 더 다연의 마음에 남았다. 라면도 한 번 안 끓여 본 귀한 집 도련님께서 날 위해 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한답시고 끙끙대고 있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워 보였는지.
투박하게 올린 토마토소스도, 폭탄처럼 뿌려댄 모차렐라 치즈도, 가위로 숭덩숭덩 자른 소시지도, 구색 맞추기 위해 올린 깻잎까지.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요리였지만, 그땐 그게 천상의 맛처럼 느껴졌다.
“아마 식빵 피자는 내 평생 소울푸드일 거예요.”
“그 정도야?”
“그럼요. 정말 맛있었다니까요.”
“지금 해주는 다른 요리보다?”
“다른 요리보다 더 맛있어요.”
“자존심 상해야 하는 건가?”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해두죠. 오늘 저녁에 식빵 피자랑 스테이크랑 관자 버터구이랑 파스타랑. 음. 맞다. 과카몰리도 해줘요.”
“그걸 다 먹을 수 있겠어?”
“1박 2일로 노는 거 아니었어요? 오늘부터 내일까지?”
다연은 이번엔 작정하고 태준과 파티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영화도 보고 수다도 떨기로. 크리스마스와 주말이 붙은 황금연휴였으니까.
“내일은 양평 해장국으로 속 풀어주고. 어때요?”
“좋아. 네가 좋으면 난 다 좋아.”
뭐든 좋다는 태준을 보며 다연은 빙긋 웃었다.
아마도 이런 게 행복인 것 같았다. 나를 보며 웃는 그, 그를 보며 웃는 나.
다연은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게 사랑이라는 걸 오늘 처음 깨달았다. 오늘 같은 날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고 또 바랐다.
***
박 여사는 온종일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시긴 하지만, 처음 맞이하는 태준의 여자친구에게 자신이 한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
아침 일찍 도우미 아주머니와 함께 장을 봐오고, 국부터 밥까지 모두 박 여사의 손끝에서 음식이 완성됐다.
알록달록한 구절판과 신선로, 한우 갈비와 잡채, 제철인 방어회와 굴전 그리고 맛깔스럽게 구운 전복구이까지. 한 상 거나하게 차려놓긴 했지만, 예비 며느리의 입맛에 맞을지 걱정스러웠다.
“가만있어 보자.”
식탁 위에 차려놓은 음식을 보며 빠진 게 없나 꼼꼼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흐으음!”
헛기침 소리와 함께 서 원장이 다가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침부터 그렇게 유난을 떨더니 상이 이게 뭐야?”
“왜요? 별로예요?”
“먹을 게 없잖아.”
“먹을 게 없다고요? 상다리가 휘도록 차렸는데?”
괜한 타박에 박 여사는 서운해졌다. 아침부터 음식 준비하느라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잔소리나 퍼붓다니. 안 되겠다 싶어 한소리 하려는 찰나, 서 원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새아기가 뭘 좋아하는지는 물어보고 차린 거야?”
‘새아기’라는 말에 깜짝 놀란 박 여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원장을 바라보았다. 집안과 직업을 들먹거리며 그렇게 반대하던 남편의 입에서 ‘새아기’라는 말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박 여사도 아직 어색해서 ‘새아기’니 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저 다연이라고 이름을 불러야 하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을 뿐. 그런데 ‘새아기’라니. 거기에.
“어머! 당신 미용실은 언제 다녀왔어요?”
서 원장을 유심히 보던 박 여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전에는 염색하라고 할 때마다 남자가 무슨 염색이냐며 유별나게 굴지 말라는 둥 그렇게 화를 내더니 언제 다녀왔는지 이발에 염색까지 깔끔하게 한 게 아닌가?
“그 옷은 또 언제 입었대?”
거기에 이탈리아에서 사 왔다며 아끼고 아끼던 셔츠까지 차려입은 게 아닌가?
박 여사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서 원장이 머쓱해졌는지 ‘흐흐흠!’하고 크게 헛기침을 하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남편을 보며 박 여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표현은 못해도 아들이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게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남편이 더 다연을 반길 것 같았다.
그렇게 웃으며 주방을 정리하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박 여사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시계를 보았다. 약속한 시각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일찍 도착한 것 같았다.
박 여사는 얼른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인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그녀 앞에 서 있는 건, 태준이나 다연이 아닌, 예원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예의가 아닌 걸 알면서도 불쑥 찾아왔어요.”
“미안하지만 오늘 손님이 오기로 했거든. 얘기는 다음에, 약속 정해서 하자.”
박 여사는 조금 난감했지만, 예원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잘 말하고 그녀를 돌려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예원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꼭 들으셔야 할 이야기예요.”
“무슨 얘기길래 그러니?”
박 여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묻자, 예원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태준 씨에 관한 얘기예요. 아주 중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