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56화 (56/74)

56화

“허락을 받았대?”

“응.”

“진짜?”

정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연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안주인은 사람을 편견 없이 대하는 사람이었지만, 태준의 아버지 그러니까 서 원장은 차별과 무시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안주인이 있어서 다행히 부딪힐 일이 별로 없었지만, 자신을 하대하는 태도나 무시하는 눈빛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서 원장의 성품을 알고 있었기에 정은은 태준과의 만남을 무작정 찬성하지 못했다. 그 성격에 괜히 내 딸까지 무시당할까 봐.

그런데 허락을 받았다니. 선뜻 믿기지 않았다.

“별장 관리인 딸이라고 얘기했는데도 허락했대?”

“그렇다니까.”

“아이고. 이게 웬일이야.”

“태준 씨 다시 와서 인사드린다는데, 언제 오라고 할까?”

다연이 묻자, 정은이 허둥거리며 말했다.

“아냐. 뭘 와. 안 와도 돼.”

“그래도 꼭 와서 허락받고 싶다고 하던데?”

“아냐. 엄마 허락했어. 엄마 이제 됐으니까 안 와도 돼. 진짜야.”

사실 정은은 태준이 마음에 꼭 들었다. 다만, 그의 집에서 다연을 반대할까 봐 괜히 으름장을 놓은 것이었다. 괜히 없는 집에서 딸을 넙죽 주는 모양새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그리고 저쪽 집에서 정 반대하면 그땐 자기라도 찾아가 왜 반대하냐고 따지기라도 할 작정이었다. 우리 딸이 뭐가 모자라서 반대하는 거냐고! 당신 아들만 귀한 거 아니라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올 작정이었다.

정은은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락을 해주다니.

표현은 하지 못했지만 뛸 듯이 기뻤다. 못난 부모 만나 고생한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토록 좋을 수가 없었다.

모녀는 나란히 잠자리에 누웠다. 검은 방안에서 천장만 쳐다보던 정은이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인사드리러 언제 간다고?”

“이번 주 토요일에.”

“미용실 들러서 예쁘게 하고 가. 백화점 가서 옷도 한 벌 사 입고. 엄마가 사줄게.”

“됐어. 있는 거 입고 가면 돼.”

“처음으로 인사드리러 가는데 깔끔하게 입고 가면 좋잖아.”

“괜찮다니까.”

“아냐. 그러는 거 아니야. 예쁜 옷 한 벌 사자.”

다연은 괜찮다고 했지만, 정은은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결국, 엄마를 이길 수 없었던 다연은 토요일 오전에 미용실과 백화점에 들른 후,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했다.

“근데 왜 이렇게 걱정이 되냐. 내 딸이 있는 집에 시집가면 좋은데, 네가 너무 기우는 거 아닐까 걱정돼.”

다연도 겁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태준의 집안은 일반인이 상상할 만한 스케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연은 괜히 겁먹기는 싫었다. 일단 가서 만나보고 그때 겁을 먹어도 먹기로 했다. 물론 떨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울기는 내가 왜 기울어? 엄마는 엄마 딸이 그렇게 못 미더운가 봐?”

“아니, 그게 아니고.”

“치. 엄마 딸 이 정도면 한 미모해, 직장도 좋아, 회사에서는 꽤 잘 나가는 편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셔.”

다연은 엄마를 안심시키고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맡는 엄마의 냄새가 너무 푸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

박 여사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병원 사모들의 정기 모임에 가는 날에는 항상 시무룩했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매번 자식들 결혼 소식에 기죽고, 손주 자랑에 입을 다물던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은 할 말이 한 가득이었다.

이번 주에 예비 며느리가 인사하러 오고, 곧 상견례를 하고 날짜를 잡겠지. 남들 다 하는 결혼식을 올리고 손주를 낳으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절로 좋았다.

차에서 내린 박 여사는 모임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머! 아줌마, 안녕하세요.”

막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다가와 살갑게 인사했다. 다름 아닌 예원이었다.

“어머, 예원이 아니니?”

“오랜만에 봬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모임이 있어서. 넌?”

“저도 잠깐 볼 일 있어서 들렀다가 회사에 들어가는 길이에요.”

“으음. 그렇구나.”

박 여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예원을 불렀다.

“예원아. 시간 되면 잠깐 얘기 좀 할까?”

“네. 그러세요.”

박 여사는 몰랐다. 얘기하자고 불러 세운 건 자신이었지만, 우연을 가장해 자연스러운 대화의 기회를 만든 건 예원이었다는 것을.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박 여사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태준이한테 물어보니까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 것도 제대로 안 알아보고 불쑥 소개해서 미안해.”

어쨌든 박 여사로서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아들에게 만나는 여자가 없는 줄 알고 예원을 소개해줬으니, 예원으로서는 당혹스러울 것이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엄마끼리 친한 사이인데, 나중에 이야기가 퍼지기 전에 예원에게 사과해야 하는 게 바르다고 판단했다. 언제 한 번 따로 만나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났으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그녀를 붙잡은 것이었다.

“괜찮아요. 그러실 수도 있죠.”

다행히 예원은 그녀를 이해해 주었고, 상황은 잘 마무리되었다.

박 여사는 예원의 이런 시원시원한 면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소개를 해주려고 했던 거였고. 하지만 세상에 인연은 따로 있는 모양이다. 10여 년 전부터 알던 그 아이와 연이 닿았을 줄이야.

안부나 좀 묻고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정리하려고 할 때, 예원이 말을 걸어왔다.

“근데 아줌마.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돼요?”

박 여사는 뭐든 말해주겠다는 듯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궁금한데?”

“태준 씨말이에요.”

“우리 태준이가 왜?”

다시금 아들이 언급되자 박 여사는 뭘 물을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예원을 바라보았다.

“대학교는 왜 자퇴한 거예요?”

“아…….”

박 여사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지만, 예원은 모른 척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한국대 의대면 남들은 못 가서 안달인데, 왜 포기했는지 궁금해서요.”

“어…… 그게…….”

박 여사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제야 예원은 약간의 연기를 시작했다.

“어머! 제가 곤란한 질문을 드렸나 봐요. 워낙 좋은 대학을 포기했길래 무슨 이유가 있나 궁금했거든요.”

모른 척 은근히 말끝을 흐리자, 박 여사가 고민을 끝내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예원이 너만 알고 있어.”

“그럼요. 저 어디 가서 막 소문내는 그런 애 아니에요.”

예원이 안심을 시키자, 그제야 박 여사가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사실 태준이가 수능 끝나고 나서 사고를 좀 당했어.”

“사고요?”

처음 듣는 얘기에 예원은 좀 놀랐다. 엄마들끼리도 꽤 친한 사이여서 이런저런 속 얘기를 털어놓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예원은 자신의 엄마에게도 태준의 사고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물론 뒷조사를 시켰던 김 실장도 몰랐던 이야기였고.

“교통사고였어. 건축 자재 옮기는 화물 트럭이었는데, 그 차에 치이고 말았지.”

박 여사는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예원은 앞에 있는 물컵을 내밀며 그녀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마음이 좀 진정된 박 여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차가 쓰러지면서 태준이 손이 깔려버렸어.”

“어머나!”

“손목 신경이 모두 끊어지고 너덜너덜해졌지. 국내 의료기술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될 정도로 말이야.”

사고 후 곧장 병원으로 옮겼지만,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다가 그 당시 서 원장은 자신의 형을 견제하고 있던 때라, 어떻게든 태준의 사고를 숨기려고 했다. 손목을 다친 사실을 알게 되면 태준이 의사가 된 후에 문제 삼을 수도 있다며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미국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고, 다행히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었다.

“그 사고 때문에 학교는 포기하게 됐어.”

“이해가 잘 안 가는데, 회복은 잘 됐다면서요? 근데 왜 학교를 자퇴해요?”

“태준이는 흉부외과에 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그런 손으로는 메스를 잡을 수 없었어.”

“아…….”

그제야 예원은 태준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의사의 손이 멀쩡하지 않으면 누가 그를 믿고 자신의 목숨을 맡기겠는가.

“애 아빠는 다른 과로 가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태준이가 끝내 싫다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뜬금없이 요리를 시작한 거야.”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 대신, 사람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요리사의 길을 택했던 태준.

그의 속사정을 알게 된 예원은 어쩐지 그가 더 갖고 싶어졌다. 성공을 위해 좋아하는 여자를 버리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는데, 절망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찾는 그 과단성도 꽤 매력적이었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예원아, 아줌마 이제 일어나봐야겠다. 모임 시간이 다 됐어.”

“아, 그러시구나. 같이 일어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이 인사하고 헤어지려고 하는 그때. 예원의 머릿속에 하나의 궁금증이 스쳐 지나갔다.

“저기 아줌마. 저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응. 그래.”“혹시 태준 씨가 사고 난 곳이 양평 별장인가요?”

“어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아, 태준 씨가 수능 끝나고 별장에서 지냈다는 얘기를 얼핏 한 것 같아서요.”

“거기서 아마 한 달 남짓 지냈지?”

“아. 그랬군요. 제가 너무 시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야, 괜찮아. 다음에 엄마랑 같이 보자.”

“네. 들어가세요.”

박 여사와 헤어진 예원은 그녀와의 대화에서 얻은 퍼즐 조각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첫째. 연다연과 서태준은 성인이 돼서 처음 만난 게 아니다. 어렸을 때, 별장에서 이미 만난 사이다.

둘째. 서태준은 13년 전 별장에서 큰 사고를 당했고 그 때문에 학교를 자퇴하게 됐다.

셋째. 서태준과 연다연은 성인이 돼서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됐다.

“뭔가 있어. 뭔가…….”

예원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님. 13년 전 양평 별장 근처에서 있었던 교통사고를 자세히 조사해봐요. 정확히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났었는지 아주 샅샅이 말이에요. 그리고 사고당한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어쩐지 예원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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