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55화 (55/74)

55화

점심 식사를 마친 다연은 유미와 함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주은을 비롯해 그녀와 함께 몰려다니는 직원들이 다연의 옆 테이블에 앉아 큰 소리로 떠들었다.

“내가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못 볼 장면을 봤지 뭐야.”

주은은 마치 다연에게 들으라는 듯 힐끔거리며 말했지만,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저 매번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도발하는 주은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

“뭘 봤는데?”

“아니 글쎄 우리 회사 주차장에서 웬 남녀가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

그제야 다연은 주은이 왜 이 넓고 넓은 카페테리아에서 굳이 제 옆 테이블에 앉아 저런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태준과 자신이 키스하는 장면을 주은이 목격한 것이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하필 봐도 왜 쟤가 본 건지.

“어머, 대박! 회사 주차장에서? 간도 크다.”

“그렇다니까. 나도 어찌나 놀랐는지.”

“누군지 얼굴도 봤어?”

“보긴 봤는데, 그걸 말해도 되나 몰라?”

주은은 이제 아예 몸을 돌려 다연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회사 사람이었어?”

“누군데? 궁금해 죽겠네.”

“그래. 그만 뜸 들이고 말해 봐.”

주변에서 어서 말해달라고 조르자, 주은이 다연에게 물었다.

“연 대리. 연 대리는 어떻게 생각해? 말을 했으면 좋겠어, 안 했음 좋겠어?”

“야. 그걸 왜 다연이한테 묻냐?”

유미가 옆에서 톡 쏘아붙이자, 주은이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물을 만하니까 묻지. 본인 일도 아닌데, 좀 빠져주시지?”

“야!”

유미가 버럭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연이 그녀를 말리며 주은에게 말했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

“말하면 큰일 날 텐데? 얼굴 들고 회사 다닐 수 있나 몰라.”

“상관없으니까 말하라고.”

“세게 나오기는. 너, 내가 입만 벙긋하면 회사에서 바로 아웃이야. 알아? 아웃!”

주은은 손으로 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하며 위협했지만, 다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서태준 대표님이랑 키스한 게 알려지면 왜 아웃이야?”

다연의 폭탄 발언에 유미는 놀랐고, 주은은 그녀를 비웃었고, 주변에 몰려 있던 직원들을 웅성대기 시작했다.

“대박! 주차장에서 키스했다는 사람이 연 대리였어?”

“게다가 상대가 작은 대표님이라고?”

“근데 연 대리는 큰 대표님이랑 뭐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야. 작은 대표님이랑 썸 타는 것 같았는데.”

“연 대리, 두 분 중에 누구랑 사귀는 거야?”

주은은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걸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경합 때 다연의 뒤만 쫓아다니는 두 남자를 보고, 주은은 은근히 소문을 퍼뜨렸다. 다연과 태준, 다연과 태훈의 관계가 묘한 것 같다며 말이다.

직원들에게 소문을 내긴 했지만, 상대가 대표이다 보니 막상 어떻게 터뜨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터였다.

사촌 형제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다연을 어떻게 골탕 먹일까 고민하던 차에 오늘 아주 딱 걸린 것이었다.

“연 대리, 대답 안 해? 다들 궁금해 하잖아.”

두 남자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주은은 다연을 몰아붙였다.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자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온 다른 직원들까지 몰려들었고, 그들은 모두 다연을 주시했다.

“왜 대답 못 해? 작은 대표님이야, 큰 대표님이야?”

주은이 손가락으로 다연의 어깨를 밀치며 다그치는 그때.

“건드리지는 말지.”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주은의 손을 막았다. 놀란 주은은 고개를 들었고, 손의 주인을 확인한 그녀의 눈은 커다래지고 말았다.

“자, 작은 대표님.”

“궁금해 하는 건 알겠는데, 내 여자 몸에 손대는 건 기분 나빠서 말이야.”

‘내 여자’라는 말에 다시금 주변이 시끄러워졌고, 주은의 눈은 더욱더 커졌다.

“내 여자라니요. 대표님은 지금 속고 계신 거예요. 연 대리, 큰 대표님이랑…….”

“나랑…… 뭐요?”

그때 태훈이 다가왔다.

다연을 중심으로 두 남자가 양옆에 섰다. 소문의 당사자가 모두 모이자, 주은은 도리어 잘 됐다는 듯 당당하게 외쳤다.

“연다연 대리가 두 대표님을 두고 양다리를 걸쳤어요.”

그녀의 말에 직원들은 수군거렸고, 태준과 태훈의 미간에는 진한 주름이 잡혀버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태훈이 묻자, 주은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양평에서 연 대리가 큰 대표님과 손잡고 있는 걸 봤어요. 그리고 오늘 주차장에서 작은 대표님과 키스하는 걸 봤고요. 대표님들은 연 대리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라고요.”

그녀의 말에 직원들은 사실이냐는 듯 태준과 태훈을 바라보았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형제라니! 물어뜯고 씹기에 이 보다 자극적인 스캔들이 또 있으랴.

남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세 사람을 지켜보았고, 순간 서로 눈이 마주친 태준과 태훈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대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왜 웃는 건지. 거기에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다연까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주은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연 대리는 제 동생 태준이와 교제하고 있습니다.”

태훈이 사실을 말하자, 주은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그때 양평에서는 왜……?”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만났고 삐끗해서 넘어질 뻔한 연 대리를 잡아줬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네요?”

태훈이 직원들을 모두 둘러보며 말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하나같이 입을 열었다.

“누가 양다리라고 소문내고 다닌 거야?”

“난 강 대리한테 들었는데?”

“나도. 강주은 대리가 한 말만 듣고 그런 줄 알았어.”

“뭐야. 그럼 강 대리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루머를 퍼뜨리고 다닌 거야?”

날카로운 시선이 한 번에 확 꽂히자, 주은이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

“아, 아니 난……. 그저 본 걸 말한 것뿐인데……. 난 잘못이 없어. 어쨌든 큰 대표님이랑 손을 잡았고, 작은 대표님이랑 키스한 건 사실이잖아.”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주은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혀버렸으니까.

“강 대리. 임자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의 혼삿길 막지 말아요.”

태훈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눈빛으로 그녀를 짓눌렀고.

“불쾌하고 기분 참 더럽군요.”

태준은 기분 나쁘다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냈다.

어쨌든 그녀는 다연의 도덕성을 의심했고, 다연에 대한 악의성 가득한 루머를 퍼뜨리고 다녔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얼마나 불순한 생각으로 한 행동인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주은이 다연의 레시피를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태준이었으니 그녀가 고까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회사에 없는 동안 벌어진 일이라서 나서지 못하고 있을 뿐.

하지만 앞으로는 근거 없는 거짓 소문을 내고 다니는 것은 물론, 다연의 레시피를 훔치는 일 등을 했을 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주은에게 대응할 작정이었다.

“일단 오늘은 이대로 넘어가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태준이 잔뜩 날이 선 눈으로 말하고 지나치자, 주은은 공포에 질린 듯 바짝 졸아버렸다.

태준과 태훈이 모두 자리를 뜨자, 직원들은 다연에게 다가와 축하한다는 말을 했고 또 몇몇은 주은을 향해 비난의 말을 한 마디씩 하고는 흩어져버렸다.

다연과 단둘만 남게 되자, 주은이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내가 당하는 꼴 보니까 네가 이긴 것 같지? 근데 네가 잘 나서 이긴 거 아니야. 그저 남자 잘 만난 덕에 팔자 핀 것뿐이지.”

어쩜 말을 해도 끝까지 저럴까. 다연은 이제 주은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근데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난 남자 때문에 팔자가 핀 게 아니야. ”

“뭐?”

“내 실력으로 내 팔자를 핀 거지. 넌 네 욕심으로 네 팔자를 구렁텅이에 처박고 있는 거고.”

다연이 콕 집어 사실을 말하자, 주은은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주은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제가 다연을 이기려고 아등바등 죽을 똥을 싸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조금 과격한 감은 있었지만, 어쨌든 이로써 태준과의 연애는 회사 내에서 공식화가 되었다.

앞으로 보는 눈들 때문에 조금은 불편하겠지만, 이제 꽁꽁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다 후련했다.

공개 연애 기념으로 태준과 차 한 잔 마셔야겠다.

***

YM 푸드 본사의 한 사무실.

예원은 한 남자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 안에 있는 내용물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보고, 하세요.”

“예. 서태준 씨는 13년 전 수능을 보고 한 달쯤 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학교를 자퇴했고, 작은 식당을 차리게 됩니다. 그게 지금 의 모체입니다. 식당 규모가 커지자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사촌 형에게 회사를 맡기고 레시피 개발을 위해 외국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동안 한국에 와도 잠시 머무르고 가곤 했는데, 이번엔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원은 잠자코 비서의 말을 듣다가, 의자를 빙글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서가 조사해 온 것들은 예원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남들은 가고 싶어서 아등바등 기를 쓰는 그 대학을 왜 자퇴했을까?”

“그건 아직 조사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긴 개인적인 일이니 가족이나 본인에게 묻지 않는 이상 알아내긴 쉽지 않을 거다.

“근데 그건 뭐예요?”

자료를 살피던 예원의 눈이 김 실장이 들고 있는 봉투에 고정되었다.

“아, 조사하다가 이상한 게 있어서 좀 더 알아봤습니다.”

김 실장은 들고 있던 또 다른 봉투를 예원에게 내밀었다.

“전에 조사하라고 하셨던 연다연 씨말입니다.”

“걔가 왜요?”

다연의 이름이 나오자, 예원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여자였다. 꼴도 보기 싫은 여자. 나한테 치욕을 안겨준 여자!

“그분이 예전에 서태준 씨 가족의 별장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바로 13년 전에.”

“13년 전에?”

흥미로운 이야기에 예원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녀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 13년 전 다연과 태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좀 더 조사해봐요.”

“예. 알겠습니다.”

김 실장이 나가자 예원은 자료를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말이야. 때리고는 발 뻗고 자도, 맞고는 발 못 뻗고 자는 타입이거든.”

당한 것에 백 배는 갚아줘야 속이 풀리는 예원은 다연에게 크게 한 방 날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