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태준이 온대요, 여보.”
박 여사의 말에 서 원장은 보고 있던 신문을 접어 신경질적으로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 녀석이 왜?”
박 여사는 아들 온다는 소식에 짜증부터 내는 남편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까지 저렇게 고집을 부릴 건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남편 심기 거스르지 않으려고 고분고분 맞춰주며 살았더니 아주 끝까지 간다. 끝까지!
“할 말 있대요.”
“제까짓 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일을 제대로 못 하면 결혼이라도 제대로 해야지. 뭐? 홀어머니 밑에서 컸어? 회사 직원이야? 나 참.”
서 원장이 언성을 높이며 투덜거리자, 박 여사가 숨을 고르며 우아한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여보.”
“왜?”
“적당히 해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서 원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뭐? 당신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적당히 하라고요.”
“뭐?”
“태준이 당신한테만 아들 아니에요. 내 아들이기도 해요. 왜 자꾸 내 아들을 당신 뜻대로만 키우려고 해요?”
30년 넘게 함께 살았지만, 아내가 이렇게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서 원장은 그녀가 가소로웠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태준이 나이가 서른이 넘었어요. 더는 내 아들 데리고 인형 놀이 하지 말라고요.”
“뭐? 인형 놀이?”
“나도 태준이가 의대 못 간 거 아쉬워요. 하지만 어떡해요? 이미 지난 일을. 그리고 우리 태준이 지금 아주 훌륭하게 제 할 일 하고 있어요.”
“그래. 잘하고 있어. 근데 거기서 조금만 더 잘하면 좀 좋아? YM 푸드 장 회장 사위가 되면 좀 좋겠냐고!”
서 원장이 크게 소리치자, 박 여사가 매서운 눈초리로 남편을 노려봤다. 이 또한 30년 넘도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신 오늘 왜 이래? 나한테 뭐,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난 내 아들이 처가 덕 없이도 승승장구할 거라고 믿어요. 누구와는 달리.”
뼈있는 말에 서 원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누구와는 달리? 설마 나 말하는 거야?”
“말 안 해도 잘 아네요.”
“뭐?”
“그리고 가업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당신네 가업 아니잖아요. 당신은 그저 꽤 유능한 의사였고, 원래 의사 쪽으로 뼈대 있는 가문은 우리 쪽이었어요.”
“다시 말해 봐. 당신 지금 뭐라고 그랬어?”
박 여사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꾸 내 심기 건드리지 말라고요. 아버지께 확 전화하기 전에.”
“자, 장인어른께 전화는 왜……?”
서 원장이 가장 무서워하는 인물은 바로 박 여사의 친정아버지였다. 현재 그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의 실소유주인 장인은 서 원장이 병원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의 원천이자,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따로 면담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 태준이한테 잘해줘요.”
박 여사는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목소리로 서 원장을 협박한 뒤,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홀로 남은 서 원장은 황망한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잠시 후.
태준이 도착하자, 박 여사는 기쁘게 아들을 맞이했다. 아내에게 한 방 먹은 서 원장은 안방에 들어가 구겨진 자존심을 열심히 펴는 중이었다.
“아버지는요?”
“방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
“나한테 말해. 아버지 안 나오실 것 같으니까.”
“두 분 싸우셨어요?”
“내가 어디 싸울 주제나 되니? 앉아.”
박 여사는 여유롭게 웃으며 태준을 소파로 이끌었다.
“할 말이 뭐야?”
“제 여자친구, 정식으로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아들의 말에 박 여사는 뛸 듯이 기뻐했다.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기에 이런저런 쓸데없는 걱정도 참 많이 했다.
주위에서는 문제 있는 거 아니냐, 여자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냐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속도 많이 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자친구를 소개해준다니.
“혹시 결혼도 생각하고 있니?”
“그럼요.”
“네 프러포즈 받아줬어?”
“네.”
“이렇게 기쁠 수가! 엄마 너무 기뻐.”
태준은 기뻐하는 어머니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만이라도 이렇게 진심으로 기뻐해 주시니 마음이 편했다. 물론 아버지도 축하해주시면 좋겠지만, 두 분 모두 반대하면 정말 아찔했을 것 같았다.
“언제? 언제 올 거야? 그 아가씨 뭐 좋아해? 뭘 준비해야 좋아할까?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름이 뭐야? 내가 뭐라고 부르면 돼?”
예비 며느리를 볼 생각에 들뜬 박 여사는 의식의 흐름대로 질문을 던졌고, 태준은 그런 어머니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어머니.”
“아이고. 우리 아들 손도 잡아보고. 엄마 오늘 계 탔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제가 사귀고 있는 여자, 어머니도 아시는 사람이에요.”
“내가?”
박 여사가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머릿속으로 태준이 만날 또래의 여자들을 떠올려보았지만, 짐작 가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 애타게 하지 말고 말해줘. 누군데?”
박 여사가 묻자, 태준은 가감 없이 말했다.
“예전에 양평 별장 관리하셨던 분 기억나세요?”
“양평 별장?”
박 여사는 누굴 말하는 건지 단번에 떠오르지 않아 떼르륵 눈을 굴렸고, 태준은 부연 설명을 붙였다.
“아이 둘 데리고 별장에서 지내셨던 여자분이요.”
“아! 기억나. 여자분 혼자서 그 큰 별장을 잘 관리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굉장히 꼼꼼하게 관리 잘 해주셨지. 근데 그분은 왜?”
갑자기 별장 관리인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궁금해 묻자, 태준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제가 만나고 있는 여자가 그분 딸이에요.”
“어머! 정말? 어쩜. 그분 딸 되게 예뻤는데. 나도 꼭 저런 딸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박 여사의 말은 진심이었다. 무뚝뚝한 서 원장에 공부만 하는 아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외로웠고, 집은 항상 휑하니 썰렁했다.
가끔 별장에서 다연네 가족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비록 가난하고 하는 일은 힘들어도 화목한 가족이었다. 누나는 알뜰하게 동생을 살폈고, 동생은 그런 누나를 잘 따랐으니까.
“혼자 힘들게 애 둘 키우면서도 얼마나 바르고 곧은지. 애들 잘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그분 딸이 우리 며느리가 된다니…….”
“며느리는 무슨 며느리!”
박 여사가 들뜬 목소리로 기뻐하고 있을 때, 쾅 소리와 함께 안방 문이 열리더니 서 원장이 밖으로 나와 소리쳤다.
“홀어머니에 별 볼 일 없는 집안이라는 것도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데, 뭐? 고작 우리 별장 관리인 딸? 누가 그런 애를 며느리로 들인데? 누가?”
서 원장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박 여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서 원장이 주춤했지만, 그러면서도 고집을 굽히지는 않았다.
“그, 그래도. 별장 관리인이랑 사돈을 맺을 수는 없잖아.”
“어머님은 시장통에서 채소 장사하시던 분이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당신 집안이나 배경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 하셨고요.”
박 여사의 말에 서 원장은 입을 다물었다. 배경도 집안도 볼 것 없던 그가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던 건 편견 없이 자신을 대해준 장인 덕분이었다.
병원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사였던 그는 당시 이사장이었던 장인의 눈에 들었고, 장인은 그를 딸에게 소개해주었다. 주변에서는 볼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을 왜 귀한 딸에게 소개해주냐고 난리였지만, 장인은 꿋꿋했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어엿한 사업가였어. 어디 별장 관리인이랑 비교해?”
서 원장이 끝까지 주장을 꺾지 않자, 이번엔 태준이 나섰다.
“아버지께서 반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뭐? 이 자식이!”
“하지만 전 다연이 아니면 결혼 안 할 겁니다.”
태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게 연다연 외에 다른 여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아버지 허락 필요 없습니다. 그저 아들 된 도리로 말씀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너, 너 이 자식이……!”
“저희가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어머니만 보러 오세요.”
아이라는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서 원장이 주춤거리며 얼른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은 어느새 꼬물거리는 핏덩이로 가득 찼다.
그렇게 원하고 바라던 손주를 자신에게는 안 보여준다니! 나도 내 손주 안아 보고 싶은데, 나도 내 손주 기어 다니는 거 보고 싶고, 나도 내 손주 기저귀도 갈아보고 싶은데!
하지만 태준은 이제 아예 대놓고 자신을 따돌리며 말했다.
“어머니는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난 아무 때나 괜찮아. 둘이 시간 정해서 말해줘.”
아내인 박 여사까지도 자신을 따돌리자, 서 원장은 마음이 급해졌다. 정말 저 두 사람이 마음먹고 자신을 따돌린다면 평생토록 손주를 안아 보지도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럼 시간 정해서 연락드릴게요.”
“그래. 조심히 가렴.”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하자, 서 원장이 불쑥 말을 꺼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어떻게 시간 좀 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날은 골프 약속이 있고.”
자존심에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태준은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럼 크리스마스 때 오겠습니다.”
“흐흠.”
아들의 대답에 서 원장은 헛기침하며 방으로 들어갔고, 태준과 박 여사는 그런 서 원장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한 다연은 태준의 전화를 받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아직 출근 시간이 되지 않아 주차장은 한산했지만, 다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태준의 차에 올라탔다.
“공개 연애하자면서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그러는 거예요. 왜 바로 안 올라오고요?”
“모닝커피 한잔하자고.”
태준이 드라이브스루를 통해 사 온 커피를 내밀었다. 차가운 공기와 달리 커피는 따뜻했고, 향기는 깊고 진했다. 마시지 않아도 커피 향에 취할 것만 같았다.
“어제는 잘 다녀왔어요?”
“응. 너무 늦어서 전화할까 하다가 말았어.”
사실은 다연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몇 번이고 전화해볼까 했다. 하지만 좁은 집에서 통화하다 보면 엄마가 다 듣게 될 거고, 혹시라도 나쁜 소식을 전해 들으면 속상해하실까 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잘했어요. 어제 일찍 잤어요.”
다연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대답했다. 엄마한테는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 떵떵 쳤지만, 사실 다연은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만약 태준의 부모님이 자신을 반대하면 마음의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어때?”
어떻게 됐는지 어서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태준은 딴소리만 하고 있어 다연은 조금 답답했다.
“별 약속은 없어요.”
그러자 태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토요일에 아버지 어머니 뵈러 가자.”
태준이 너무 담백한 목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다연은 처음에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생각한 후에야 그가 한 말의 뜻을 알아듣고 소리쳤다.
“정말요? 저 가도 된대요?”
“그렇다니까.”
어찌나 좋은지 다연은 꺅 소리를 치며 태준을 와락 끌어안았고, 태준은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마음 쓰게 해서 미안해.”
“태준 씨처럼 멋진 남자 얻으려면 이 정도 마음고생은 해야죠.”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서로의 숨결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주차장 안으로 차가 들어오는 것도, 차 주인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들을 본 것도 모른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