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며칠 후.
다연은 유미와 함께 카페테리아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승 포상 휴가는 언제 쓸 거야?”
“아직 몰라. 여행 어디 갈지도 안 정했어.”
“여행 어디로, 아니, 누구랑 갈 거야?”
유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다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눈초리는 뭔데?”
“솔직히 말해. 너 연애하지?”
“응.”
덤덤한 대답에 유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여태까지 숨기고 안 가르쳐주더니, 왜 이렇게 고분고분 대답하는 걸까? 혹시, 설마?
“이제 공개 연애하기로 한 거야?”
“응. 그러려고. 어차피 다 알게 될 거고, 언니한테는 미리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유미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신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되면 서운할 것 같았다.
“그동안 말 못 해서 미안. 나 지금 만나는 사람은…….”
다연은 태준과 연애 사실을 고백하려고 하자, 유미가 괜한 오기를 부리며 귀를 막았다.
“아아아아. 말하지 마. 누군지 안 물어볼 거야. 내가 알아맞힐 거야.”
고집부리는 모습이 어찌나 웃긴지. 다연은 가만히 유미를 지켜보다가 문득 물었다.
“근데 언니.”
“말해.”
“언니는 결혼 준비하면서 뭐가 제일 힘들었어?”
“결혼? 너 결혼해?”
유미가 다급하게 묻자, 다연이 대답 대신 반지 낀 손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유미의 두 눈이 연애한다고 고백했을 때보다 곱절로 커졌다.
“이 앙큼한 년! 감히 나 몰래 연애하는 것도 모자라 청혼까지 받았어?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주는 게 아닌데.”
“그렇게 됐어.”
“축하한다, 이것아! 반지 되게 예쁘다!”
유미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다연을 와락 껴안고 축하해주었다.
“고마워.”
하지만 어느새 유미의 얼굴에 기쁨의 표정은 사라졌고 전투사처럼 비장해졌다.
“프러포즈 받았다고 끝이 아니야. 그건 알고 있지?”
“응?”
“얘 봐라? 왜 이렇게 순진한 얼굴이야? 프러포즈는 또 다른 시작이야.”
“또 다른 시작?”
“시월드라는 전쟁터에 넌 아군도 없이 홀로 전진하게 될 거거든.”
“전쟁터?”
“그래. 전쟁터. 연애할 때는 이 사람이랑 같이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매일 깨 볶으며 살겠지, 그런 착각 하면서 결혼을 꿈꾸곤 하지.”
결혼 1년 차인 유미는 모든 걸 초월한 듯,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다 허튼 꿈이야. 결혼 준비할 때 뭐가 제일 힘드냐고? 시월드 그리고 시월드 편만 드는 예비 남의 편.”
어렴풋하게 상상만 했던 것을 결혼 선배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들으니 등골이 다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하긴. 넌 괜찮겠다.”
“왜? 나는 왜 괜찮아?”
겁을 잔뜩 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괜찮다니? 다연은 유미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했다.
“작은 대표님, 너 되게 사랑하시는 것 같거든.”
만나고 있는 남자가 태준이라는 걸 말하지도 않았는데, 유미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언니, 알고 있었어?”
“그럼. 내 눈치가 백 단이다. 결혼하고 이백 단 됐지만.”
다연은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던지는 유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쨌든 결혼은 연애가 아니니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긴 남녀가 만나도 지지고 볶고 싸우는데, 결혼은 오죽할까.
“작은 대표님, 너 볼 때 눈이 어떤 줄 알아?”
“어떤데?”
“별에다 꿀 발라놓은 느낌?”
“별에 꿀을 발라?”
“너만 보면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데, 그때 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더라. 사실 눈빛만 봐도 알겠더라. 작은 대표님이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티 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어쩔 수 없나 보다. 눈빛만으로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정도면.
“결혼하기 전에 엄마한테 잘해드려.”
장난스럽게 말하던 유미가 먹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그게 제일 후회되더라. 엄마한테 잘할 걸. 결혼해보니까 엄마한테 짜증냈던 것만 생각나더라. 근데 결혼하면 더 못 챙겨드리거든. 이제 내 1순위는 엄마가 아니라 내 남편이고 훗날 태어날 내 새끼일 테니까.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내 1순위였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 완전 아기 때 빼고는. 엄마한테 난 언제나 1순위였을 텐데.”
유미의 말에 다연은 엄마를 떠올렸다.
내일 태준이 인사드리러 올 거라고 말했을 때, 엄마의 표정은 참 미묘했다. 무작정 반길 수도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는 얼굴.
유미의 말을 들으니 다연은 더욱더 엄마께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거 간 좀 봐라.”
정은이 잡채를 들고 와 다연의 입속에 넣으며 말했고, 다연은 잡채를 호로록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딱 좋아.”
“잡채는 됐고, 이제 뭘 해야 하나…….”
정은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태준이 인사드리러 오기 때문이었다. 어제부터 장을 보고 갈비를 재우고, 잡채에, 간장 게장에, 각종 전과 나물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을 지경이었다.
“엄마. 다 했어. 이제 좀 앉아서 쉬어.”
“그런가? 나 물 좀 줘.”
다연이 물을 건네자, 정은은 목이 말랐던 모양인지 숨도 쉬지 않고 물 한 컵을 한 번에 들이켰다.
“목말랐어? 물 좀 마시면서 하지.”
“목말랐는지도 몰랐네.”
정은은 잔칫상처럼 차려놓은 음식을 보며 중얼거렸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맛있어. 태준 씨 입맛에 다 맞을 거야.”
“요리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것도 되게 신경 쓰이네.”
태준이 요리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정은은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엄마. 서운해?”
다연은 정은의 눈치를 살피며 주춤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남들한테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말들이 왜 가족한테는 더 하기 힘든 건지.
“뭐가 서운해?”
“나 시집가면 서운할 것 같냐고.”
“서운할 것도 없다. 당연히 해야지. 그리고 나 아직 너희 결혼 허락 안 했어.”
“잉? 정말 반대할 거야?”
우리 쪽이 기운다며 염려하던 정은은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연은 엄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정말 마지막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다.
“그럼 태준 씨 왜 오라고 했어? 이 음식들은 왜 차렸고?”
서운해진 다연이 우물거리며 불만을 토로하자, 정은이 소리쳤다.
“그럼 인사도 못 오게 하냐? 그리고 손님 오는데, 맨입으로 맞이해?”
“그럼 허락은 해주지…….”
“앞으로 50년이 될지, 60년이 될지, 내 딸 데리고 살 놈이 온다는데, 엄마가 찬찬히 얼굴도 못 봐?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우리 딸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지, 물어는 봐야 할 것 아니야.”
유미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다연은 엄마를 서운하게 한 것 같았다. 남자에 눈이 멀어 무작정 허락해 달라고 떼쓰는 모습이라니.
“미안해, 엄마. 엄마 말처럼 태준 씨 꼼꼼하게 봐. 엄마 딸 보내도 될 놈인지,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놈인지. 따질 거 다 따져봐.”
미안했던 다연이 선심 쓰듯 말하자, 정은이 딸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아야! 왜 때려?”
이번엔 분명 엄마 편을 들었는데, 왜 등짝 스매싱이 날아온 건지.
“놈이 뭐야, 놈이? 신랑 될 사람한테. 게다가 나이 차이도 있는데, 놈이 뭐냐고?”
“우씨. 어쩌라는 거야.”
다연은 정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꿍얼거렸다.
엄마의 마음을 도대체 모르겠다. 결혼 반대를 한다는 건지, 허락을 한다는 건지. 왜 자꾸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건지. 오늘 온종일 엄마 눈치만 보고 있는데,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은을 노려보며 아픈 등을 부여잡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어? 태준 씨 왔나 보다.”
다연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을 향해 팔랑팔랑 달려갔고, 정은은 그런 딸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예쁜 딸이 혹시나 마음 아픈 일이 생길까 미리부터 걱정됐다.
잠시 후, 꽃다발과 과일바구니 그리고 한우 등 먹거리를 들고 태준이 집을 들어왔다.
“어머니.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이거 받으십시오.”
태준은 고개를 숙이며 정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가 준 것은 선홍색 안개꽃 사이에 폭신폭신한 느낌이 물씬 나는 목화솜 꽃다발이었다.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꽃 선물이었다. 젊을 땐 먹고 사느라 급급해서, 나이 들어서는 꽃 줄 남편이 죽어서. 꽃 선물을 받으니 값비싼 한우 선물보다 기분이 더 좋았다.
“앉게나.”
정은은 기분 좋은 감정을 감추고 딱딱하게 말했다.
“절부터 받으세요.”
“아이고, 무슨 절을.”
정은이 피하려고 하자, 다연이 그녀를 상석에 앉혔고 태준이 곧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 다연이 평생 행복하게 둘이 잘 살겠습니다. 결혼, 허락해주십시오.”
정은은 꾹 다문 입을 열지 못했다.
태준이 좋은 남자인 건 그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결혼은 둘만 좋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은은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그러니까 다연의 아빠가 사고로 죽었을 때, 가장 먼저 그녀를 욕한 사람은 바로 시부모였다. 슬픔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내 아들 잡아먹은 년’이라고 손가락질부터 했다.
남편 쪽이 그렇게 잘 사는 집은 아니었다. 그저 정은이 그보다 조금 기울었을 뿐.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저렇게 잘 사는 집 아들과 결혼하면 오죽할까.
긴 침묵 끝에 정은이 입을 열었다.
“난 내 딸 무시 받고, 힘들어하고, 우는 모습 보고 싶지 않네.”
“엄마…….”
태준의 옆에 무릎 꿇고 앉은 다연은 애타게 엄마를 불렀지만, 정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자네 부모님 좋은 분들이라는 건 내가 잘 아네. 내가 이러는 건 내 노파심이고 딸 가진 엄마의 기우일세. 하지만 나도 내 딸이 소중해. 나한테는 우리 다연이가 제일 귀하다고.”
정은이 단호한 투로 말하자, 태준이 나섰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다연이 힘들지 않도록, 우는 일 없도록, 마음에 상처 하나 받지 않게, 제가 잘하겠습니다.”
태준은 그 어느 때보다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결단력 있는 목소리나, 또렷한 눈빛이나, 다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뭐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은은 이대로 딸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럼 한 가지 약속해주게.”
“예. 말씀하십시오, 어머니.”
“우리 다연이도 곧 그 집에 인사드리러 가겠지?”
“예. 어머님께 먼저 허락받고 그 후에 가기로 했습니다.”
“두 분 어른께 우리 다연이가 별장 관리인 딸이라고 말씀드렸나?”
“아뇨, 그건 아직…….”
태준이 말끝을 흐리자, 정은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 말씀드리고 그때도 ‘괜찮다, 인사하러 와라.’ 하시면 그때 데리고 가게.”
정은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연은 난감해 했지만, 태준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여기 오기 전에 부모님께 먼저 허락받지 않은 자신이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아버지 성격에 얼마나 모진 말을 하실지 눈에 선한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연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니.
태준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정은이 뭘 염려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저희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