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퇴근 시간.
태준은 퇴근 준비하는 다연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머님은?”
“연말이라 약속이 많으신가 봐요. 서울 온 김에 친구들 다 만나고 가신다고 아침 일찍 나가셨어요. 1박 2일로 놀러 가신대요.”
“그래? 그럼 우리 집에 들렀다 가. 같이 할 일 있어.”
같이 할 일?
다연은 앞서 걷는 태준을 은근히 흘기고는 혼자 큭큭 거렸다.
같이 할 일이라는 게 정확하게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짐작은 됐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우리 남친 건강하다니까.
***
태준의 집에 도착한 다연은 거실에 놓여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층고가 꽤 높은 집이었는데, 트리 끝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컸다.
“근데 왜 장식은 하나도 안 해놓고 덜렁 트리만 뒀어요?”
그녀의 말처럼 트리에는 그 어떤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 12월 초라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는 게 이른 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썰렁해 보였다.
“같이 꾸미려고.”
커다란 박스를 가져온 태준은 다연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할 일이라는 게……?”
“응. 같이 크리스마스트리 꾸미자고.”
“아…… 그랬구나. 난 또…….”
“난 또 뭐? 설마 이상한 생각한 거 아니지?”
“이, 이상한 생각은 무슨!”
괜한 오해로 창피해진 다연이 불끈거리며 소리치자, 태준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경우를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는 건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니까 그렇죠. 내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눈빛이 딱 엉큼한데?”
“아니거든요!”
다연이 딱 잡아떼자, 태준이 그녀 곁으로 와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원하면 자고 가.”
“뭐래.”
그의 놀림에 다연의 얼굴은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온전히 놀림 때문은 아니었다. 자고 가라는 말이 은근히 그녀를 달뜨게 했기 때문이었다.
삐죽삐죽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다연은 웃음을 꾹 참은 채, 태준이 놓고 간 박스를 뒤적거렸다.
“이 많은 걸 오늘 다 장식할 거예요?”
“최대한 해보자. 못 하면 내일 해도 되고.”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옛날 생각?”
“별장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 꾸미고 싶었거든요.”
안다. 태준도 그날 다연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려고 뒷산에 올라갔던 거였으니까.
태준은 언젠가 그녀와 함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싶었다. 예쁜 장식을 나무에 걸고, 반짝이는 꼬마전구를 곳곳에 두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별을 나무 꼭대기에 얹고 싶었다.
꼬마전구에 불을 밝히면 은은한 빛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캐럴을 함께 흥얼거리며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받고 싶었다.
그래서 태준은 13년 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함께하려고 다연을 부른 것이었다.
“나도 그랬는데.”
“우리 둘이 마음이 통했네요. 읏차.”
다연이 까치발을 들어 꽤 높은 곳에 장식을 걸었다.
“벌써 크리스마스가 온 것 같아요. 올해는 눈 왔으면 좋겠다.”
“크리스마스 때 뭐할 거야?”
“음. 글쎄요. 아마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곳에서 캐럴 들으면서 와인 한 잔 하고 있지 않을까요?”
“설마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곳이 우리 집은 아니겠지?”
“왜요? 싫어요?”
“아니. 좋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미리 말해. 다 해줄 테니까.”
남자 친구가 요리를 잘하니 이럴 땐 더 좋았다. 크리스마스처럼 예약하기 힘들 때, 고급 레스토랑 셰프를 우리 집에 모신 것 같은 기분이 들 테니까.
“응?”
트리를 꾸미던 다연이 꽤 높은 곳을 쳐다보며 물었다.
“장식을 꾸미다 말았나 봐요?”
“아니? 전혀 안 했는데?”
“근데 저건 뭐지?”
나무에는 반짝이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다.
다연은 상자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꽤 높이 달려 있어 그녀의 손에 닿지 않았다. 까치발을 들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따뜻한 온기가 그녀 뒤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다연의 뒤로 다가간 태준은 손을 뻗어 가뿐하게 상자를 집었다.
“이게 뭐지?”
“태준 씨도 모르는 거예요?”
“응. 열어볼까?”
“네. 열어봐요.”
다연이 말하자, 태준은 작은 상자를 열며 무릎을 꿇었다.
“뭐해요? 무릎은 왜…… 아!”
태준이 상자를 열자, 순간 다연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연 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있었다. 심플한 모양이었지만, 매우 아름다운 반지였다.
“결혼해줘, 다연아. 평생 너의 남자가 될 수 있게 허락해줘.”
상상도 못 한순간 프러포즈를 받은 다연은 눈앞에 희뿌옇게 변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멋진 프러포즈라니. 이렇게 깜찍한 청혼이라니.
“네. 그럴게요. 평생 내 남자로 살아줘요. 난 평생 태준 씨 여자로 살 테니까.”
다연이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자, 태준은 안심하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행여라도 자신의 프러포즈를 거절하면 어쩌나,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작은 이벤트를 열어줄 생각으로 지난 13년간 단 한 번도 꾸미지 않았던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을 주문했다.
수많은 멘트를 준비했고 또 수많은 자세를 위하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너무 떨려 오기 전에 청심환 먹고 온 건 죽을 때까지 비밀.
태준은 다연의 왼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고백했다.
“사랑해. 다연아.”
“나도 사랑해요, 태준 씨.”
***
태준의 팔을 베고 있던 다연은 폭신한 이불을 끌어당겼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에 부드러운 이불이 닿으니 촉감이 참 좋았다.
다연은 단단한 태준의 팔 위에서 손가락 장난을 하며 말했다.
“결혼은 5월에 하고 싶어요. 5월의 신부 어때요?”
“좋아. 야외 결혼식도 좋고.”
“예쁜 드레스 입고 싶다. 티아라 대신 예쁜 꽃 화관 쓰고.”
“드레스 좋아?”
“좋죠, 그럼. 평소엔 화려한 드레스 같은 거 입을 일이 없잖아요. 근데 결혼식 땐 다 허용되니까.”
“드레스만 좋아?”
태준이 뾰로통하게 묻자, 다연이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톡톡 치며 대답했다.
“아뇨. 태준 씨랑 같이 살 생각하니까 그게 제일 좋아요.”
사랑스러운 말에 태준은 다연이 예뻐 죽겠다는 듯 꼭 끌어안았다.
“아. 좋다.”
넓은 태준의 품에 안긴 다연은 손가락으로 굴곡진 그의 팔뚝 위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예전에 나 꿈이 있었어요.”
“무슨 꿈?”
“13년 전에 태준 씨 만났을 때 생각했던 건데. 작은 시골 마을에 식당을 하나 차리는 거예요. 수풀을 헤치고 어렵게 어렵게 들어가야 하는 곳이죠.”
“왜 어렵게 찾아가야 하는데?”
“그만큼 맛있는 곳이라는 거죠. 힘들게 찾아와도 와볼 만하다, 그런 느낌?”
다연은 자신이 꿈꿨던 식당을 상상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식당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메뉴를 파는 거예요. 깻잎 올린 식빵 피자랑, 성게 죽이랑, 양평 해장국이랑.”
“메뉴가 너무 일관성 없는 거 아니야?”
태준이 쿡쿡거리며 웃자, 다연도 따라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조합이 안 맞는 메뉴들이었다. 하지만 그럼 어떤가? 그저 상상만 하는 건데.
“오픈 키친에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꾸며놓은 동화 같은 식당을 차리고 싶었어요.”
“동화 같은 식당? 좋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태준 씨는요?”
“나? 나 뭐?”
“태준 씨는 꿈 없었어요? 의대는 왜 그만둔 거예요?”
다연의 질문에 흠칫한 태준은 굳은 얼굴로 잠시 숨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공부하기 싫어서?”
“잉? 한국대 의대 합격했었다면서요? 그 좋은 데를 왜 포기했데?”
“의사는 내 꿈이 아니었거든.”
“그럼 태준 씨 꿈은 뭐였는데요?”
다연이 묻자, 태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동화 같은 식당에서 너랑 같이 사는 거?”
“치. 그게 뭐야. 제대로 말해 봐요. 진짜 태준 씨 꿈.”
다연이 재차 묻자, 태준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말 그게 내 꿈이야. 네가 이뤄놓은 네 꿈속에서 너랑 같이 사는 거.”
진심 어린 그의 말에 다연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의 결론은 항상 나였다. 몹시도 감동스럽게.
“네가 원하면 주방장이 될 수도 있어. 내가 한 요리하거든. 아니면 대주주가 될 수도 있고. 내가 또 한 재력 하거든. 그것도 싫으면 셔터맨이 될 수도 있어. 내가 또 한 파워 하니까. 뭘 원해?”
태준이 장난스럽게 묻자, 다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다요. 주방장도 해주고, 투자도 해주고, 셔터도 내려줘요.”
“네가 원하면 뭐든 다 해줄게. 뭐든.”
말간 태준의 눈동자에 다연의 얼굴이 선명하게 박혔다. 태준은 정말 너무도 행복했다.
그는 밤이 싫었다. 차갑게 식은 침대도 싫었고, 그 침대 위에서 꾸게 될 악몽도 싫었다. 끝도 모를 암흑은 절망이었고, 듣기 싫은 비명 끝엔 핏자국만 낭자했다. 13년간 매일 밤이 그랬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수면제 없이도 잠을 잘 수 있고, 악몽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눈을 뜨면 다연이 곁에 있거나 그녀를 보러 갈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 평생 그럴 것이다. 평생.
“주말에 인사드리러 가자. 너희 집에 먼저 가고, 그다음 우리 집에 가자.”
인사라는 말에 다연은 엄마가 한 말이 떠올랐다.
정말 엄마의 말처럼 태준의 집에서는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실까? 가능하다면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다. 사이좋은 고부 관계였으면 좋겠고,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싶었다. 그런데 걱정이 앞섰다.
“저기 태준 씨.”
“응?”
“솔직하게 말해줘요. 태준 씨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시죠?”
태준은 고민했다. 그녀의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해야 할지, 아니면 거짓말로 안심시켜야 할지. 하지만 곧 아버지를 보면 놀랄 수도 있으니,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겁주긴 싫은데, 아버지께서 좀 까다로우셔.”
“나 반대하세요?”
“아버진 원래 뭐든 반대하고 보는 편이셔서.”
그의 솔직한 말에 다연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엄마가 한 말이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버님만 조심하면 돼요?”
“어머니는 내 편이셔.”
“다행이네요. 한 명이라도 편이 있어서.”
다연의 말 속에 걱정이 한가득 들어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태준은 아버지가 반대한다고 해도 다연과의 결혼을 강행할 작정이었다.
13년을 그녀 없는 악몽 속에서 살았는데, 또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다연아. 약속해줘.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기로.”
“약속할게요.”
최대한 아버지를 막아보긴 하겠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에 무데뽀 스타일이다.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도 끄떡하지 않을 걸 안 아버지는 다연을 공격할 거다. 그러려면 이쪽이 단단해져야지.
“약속해줘. 무슨 일이 있어도 나 버리지 않기로.”
“내가 왜 태준 씨를 버려요.”
다연은 팔을 들어 태준을 꼭 끌어안았다.
“나 절대 태준 씨 안 버려요. 절대.”
그렇게 중얼거리는 다연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