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예상치 못한 엄마의 반응에 다연은 조금 놀랐다. 아까는 왜 내 딸이랑 사귀냐며 태준이 아깝다는 듯 말하더니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걸까?
“왜?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데?”
처음 사귀기만 할 땐 내 마음에만 들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엄마에게 남자친구를 보여주고 나니 엄마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서로 가깝게 지냈으면 좋겠고 화목한 관계가 되면 좋을 테니까.
“잘 생기고 직업도 좋고 서글서글하니 성격도 마음에 든다면서.”
“응. 다 좋더라. 그런 남자 흔치 않은데.”
“근데 왜?”
다연이 채근하자, 정은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네가 너무 딸리는 것 같아서.”
너무도 솔직한 엄마의 말에 다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태준에게 ‘왜 내 딸이랑 사귀어?’라고 묻질 않나, 이젠 대놓고 딸한테 너무 달린다고 하질 않나!
“엄마 너무한 거 아니야?”
다연이 툴툴거리며 소리치자, 정은이 한숨을 쉬며 심각하게 말했다.
“엄마 그 집 별장에서 관리인 했어. 어느 집에서 관리인 하던 사람을 사돈으로 맞이하고 싶겠어?”
그제야 엄마의 심정을 이해한 다연은 미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달린다고 표현한 건, 다연이 아닌 집안이었고 또 엄마 자신이었다. 어쨌든 상대는 정은이 일하던 별장의 주인이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병원의 원장이었다.
게다가 다연까지 태준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니, 엄마의 처지에서는 자신의 가족들이 그들에게 빌붙어 사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 집에서 너 만나는 거 알아?”
“여자친구 있다고는 얘기했다는데, 그게 나라는 건 모르실 거야.”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원나잇부터 시작한 그와의 관계. 하지만 그와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운명이라고 여겨졌다.
연애하는 것도 이렇게 정신이 없었는데, 하물며 결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다연은 엄마가 너무 앞서간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엄마의 걱정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는 그와 결혼을 할 테니까.
“사람은 좋은 것 같아. 엄마 마음에도 들고. 근데 엄마는 네가 힘든 거 싫어. 안 그래도 아빠 없이 네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내 딸이 혹여나 남들한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정은은 다연을 꽤 엄격하게 키웠다.
이젠 어느 정도 살만해졌고 다연이도 제 앞가림 다 하는데, 그 집에 시집가면 혹시나 무시를 당하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부모 잘 못 만난 탓에 그 집에 가서 기 한 번 못 펼 거 생각하면 엄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다연은 훌쩍이는 엄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으며 최대한 씩씩하게 말했다.
“엄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엄마 딸로 태어나서 얼마나 행복한데?”
“아빠 없이 고생만 했잖아.”
“난 아빠 없이 고생만 했지만, 엄만 남편 없이 자식 둘 키우느라 고생도 하고 외롭기까지 했잖아.”
이제 와 생각하면 엄마한테 미안한 게 너무 많았다. 돈 좀 번다고 엄마 타박한 것도 미안했고, 다훈이한테 오냐오냐 한다고 잔소리한 것도 미안했다.
엄마는 우리 키우느라 고운 손이 부르틀 때까지 남의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야 했다. 자신은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자식들에게는 아비 없는 것들이라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다연은 그런 엄마의 마음은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엄마 걱정하지 마. 나 엄마 딸이야. 내가 얼마나 강한데.”
말은 그렇게 해도 다연도 은근히 걱정되긴 했다.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겁부터 먹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부딪혀 보자. 원래 용감한 여자가 미남을 차지하는 법이니까.
아, 우리 태준 씨 너무 잘생겨서 탈이다.
***
다연은 일하는 동안에도 엄마가 한 말이 자꾸만 떠올라 몇 번이고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냈다.
머리는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왜 손은 인터넷에 서태준이라는 이름을 검색하고 있는 건지.
그러니까 종합을 해보자면, 자신이 만나고 있는 남자는 대한민국 요식업계를 쥐락펴락하는 젊은 사업가이며,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종합 병원 원장이고, 그의 외할아버지는 그 병원의 재단 이사장이시다.
인터넷을 통해 대략적인 태준의 집안을 확인한 다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준이 너무 티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엄마가 왜 그렇게 걱정을 했는지 이젠 좀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남자와 여자로 만나고 있을 땐 전혀 상관없던 것들이 결혼이라는 것이 개입하니 마구 복잡해졌다.
“아냐, 겁먹지 말자. 내가 뭐가 꿀린다고.”
다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창문 밖으로 태훈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어? 큰 대표님이네?”
다연은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표님! 큰 대표님!”
다연이 부르자 자료를 살피며 빠르게 걷던 태훈의 발길이 멈췄다. 그녀를 향해 돌아보는 태훈의 얼굴에는 아직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비록 태준 때문에 시작된 마음이었지만, 결국엔 진심이었다. 그래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젠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좋아하는 감정을 단숨에 지울 수는 없었다. 미련이라기보다는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에서 연다연이라는 여자는 깨끗하게 지워질 테지. 하지만 그때까지, 언제일지 모르는 그때까지는 조금 불편할 것 같았다.
“저기…… 이거…….”
“이걸 왜……?”
“제가 주는 것보다 큰 대표님께서 주시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태훈은 다연이 내미는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다연과 태준이 찍힌, 태준의 방에서 훔쳐 온 그 사진이었다.
별장에서 다연의 거절을 들은 후, 태훈은 이 사진을 다연에게 주었다. ‘별장 오빠라고 거짓말해서 미안했다.’라는 말과 함께 사진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맞는 것 같다며 그녀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진의 주인은 작은 대표님이잖아요. 그리고 두 분, 아직 해야 할 말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사진의 주인은 태준이었고, 태훈이 사과해야 할 대상도 태준이었다.
다연은 아마도 동생에게 사과할 핑계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을 돌려주며 대화할 기회를 주는 것일지도.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을 받았다.
“고마워요.”
“뭘요. 아니에요.”
“태준이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요. 혼내줄 테니까.”
“네. 그런 일 있으면 꼭 말씀드릴게요.”
태훈은 빙긋 웃는 다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예뻤다. 이제 정말 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다연이 더 예뻐 보이기 전에. 못난 마음이 또 못된 마음을 품기 전에.
하지만 못된 마음을 품기엔 태준이 너무 철저했다.
“저 녀석은 내가 다연 씨만 만나고 있으면 귀신같이 나타나네요?”
“24시간 저만 보고 있나 봐요.”
“눈빛 봐라. 레이저 나오겠네. 정말 저런 남자가 좋아요?”
“집착하는 남자 매력 있잖아요. 나만 보는 남자는 더 매력적이고.”
“와. 나도 한 집착하는데. 그런 거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집착부터 할 걸 그랬어요.”
태훈의 농담에 다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때마침 그들 앞에 도착한 태준은 눈을 치켜뜨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저 부하직원으로 대표님께 인사한 것뿐이에요.”
“그러기엔 일부러 뛰쳐나오는 것 같던데?”
“어머. 그것까지 들었어요? 정말 스토커인가 봐.”
다연이 농담을 던지자, 태준이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쩜 내 남자는 저렇게 질투도 심한지. 귀엽게.
“전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다연이 태훈에게 눈인사하며 슬쩍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태준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다연이 빙긋 웃으며 아이 달래듯 말했다.
“지금은 나 말고 큰 대표님이랑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다연이 태훈을 향해 눈짓하자, 태준이 고개를 돌려 형을 보았다. 태훈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눈으로 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장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태준과 태훈은 서로 딱히 대화라고 할 만한 말은 나누지 않았다.
회사에서 만나면 그저 본체만체 했고, 회의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땐 각자 비서끼리 대화를 나누게 하는 등, 하루하루 어색하게 보내고 있었다.
태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태훈을 보고 있자, 다연이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매듭지을 게 있으면 짓고, 풀건 풀어요. 형제가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건데요?”
다연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태훈을 마냥 용서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제 사진까지 훔쳐 다연에게 거짓말까지 했던 형이었으니까.
“흠…….”
“믿어요.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마음도 넓다는 거.”
다연은 태준에게 찡긋 눈을 깜빡이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두 남자만 남자 복도 위에 아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번 일은 언젠가 터져야 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곪을 대로 곪아 밖으로 분출하고 싶은 고름처럼, 형제 사이는 언제나 아슬아슬했고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이거.”
먼저 입을 연 건 태훈이었다. 그는 태준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네 방에서 가져온 사진, 돌려줄게.”
태준은 사진을 받았다. 오랜만에 본 사진 속 다연은 앳돼 보였고 무척이나 예뻤다.
매일 밤 사고 당시가 떠올라 태준은 일부러 사진을 본가에 그냥 뒀었다. 보고 있으면 또 악몽에 시달릴 것 같아서. 그런데 이젠 사진을 보고 있어도 악몽 따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다연이 곁에 있으니까.
“미안했다. 별장에서도 그전에도 또 그전에도.”
태준은 고개를 들어 태훈을 쳐다보았다. 별장의 일만 사과할 줄 알았는데, 태훈은 과거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을 사과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널 이기고 싶어서 아등바등했어. 그게 아버지 뜻이었다 해도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앞으로 그런 일 없을 거야. 네가 불편하면 회사도 그만둘게.”
이번 일을 통해 태훈은 많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태준은 마음에 담아왔던 말을 꺼냈다.
“형은 단 한 번도 나한테 진 적 없어. 형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게 다른데, 형이 억지로 내가 원하는 걸 가지려고 하니 지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이제 앞으로는 형이 원하는 걸 해. 큰아버지가 원하는 걸 하지 말고.”
“……!”
동생의 말에 태훈의 눈가가 시큰해졌다.
내가 원하는 거라……. 서른이 넘도록 아버지의 꼭두각시처럼 살았던 그였다. 내가 원하는 건 처참하게 짓밟히고 무시당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원하는 걸 하라니. 꽉 막혀 있던 숨통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 자식은 동생이 아니라 꼭 형 같다.
“그리고 회사 일은 이렇게 벌여 놓고 어딜 내빼려고 그래. 절대 못 나가니까 그렇게 알아!”
뒤돌아서 걸어가는 태준의 어깨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저 녀석은 이미 자신이 원하는 걸 하고 있겠지? 어쩜 그게 요리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만든 단단하고 숨 막히는 거대한 알을 깨고 나와 녀석이 처음 했던 게 바로 요리였으니까.
태훈은 이젠 정말 동생과 허심탄회하게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