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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50화 (50/74)

50화

정은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태준을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제 딸을 꼭 끌어안고 있던 순간 맞닥뜨려 첫 만남이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일단 사람 됨됨이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얼굴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묻는 말에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우리 다연이랑 교제하고 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알고 지낸 지는 오래 됐고, 정식으로 교제한 지는 몇 달 됐습니다.”

“그렇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 하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옷이며 시계며 구두며,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이 딱 봐도 고급스러워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작은 사업체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업? 아…….”

사업이라는 말에 정은은 입을 다물었다.

정은은 다연의 짝이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들 녀석이 사업한답시고 누나 등골을 여러 번 빼먹는 걸 봐서 그런지 이제 사업이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없는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귀여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하는 엄마 대신 동생 돌보느라, 집안 살림하느라 힘들게 살았던 다연이었다.

제힘으로 장학금 받아가며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회사에 취직해 이제 살만한 것을, 툭하면 동생 놈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모아놓은 돈도 없을 거였다. 그런데 사업하는 남자를 만나고 있다니 영 못마땅했다.

“우리 회사 대표님이셔.”

그때 주방에서 과일과 차를 내오던 다연이 태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너희 회사?”

“응.”

“너희 회사면 을 말하는 거야?”

“응.”

“그럼 에서 만든 식당을 운영하는 건가?”

정은은 차마 태준이 이라는 큰 회사의 대표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에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중 하나의 식당을 운영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식당이 아니라 우리 회사 대표님이야.”

“회사 대표님?”

다연이 설명을 해주었지만, 정은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응. 본사 대표님.”

“보, 본사 대표님?”

다연의 부연 설명에 정은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들놈처럼 작은 사업체 정도 운영하다가 망하는 줄 알았더니, 진짜 사업을 하고 있었다니.

모든 정황을 조합해본 정은은 하나의 의문점이 생겼다.

“근데 저런 분이 왜 너랑 사귀는 거야?”

“엄마!”

잘생긴 얼굴이며, 훤칠한 키며, 말하는 품위에, 남부럽지 않은 직장까지. 그런 남자가 왜 우리 딸을 좋아할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었다.

“네 엄마 귀 멀쩡해. 크게 안 불러도 돼.”

다연이 꽥 소리를 지르자, 정은은 귀를 막으며 태준에게 속삭였다.

“얘가 성격이 좀 드세요.”

“말씀 놓으십시오.”

“그래도 되나.”

정은은 은근히 말을 놓으며 태준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잘 먹겠습니다.”

정은은 서글서글하게 사과를 받아먹는 태준을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다연의 나이가 스물여섯인데, 요즘 결혼은 몇 살 정도에 하지? 결혼하면 돈도 필요할 텐데. 우리 다연이 결혼 때 주려고 모아둔 예금 만기가 언제더라? 상대는 괜찮은데, 사돈 되실 분들도 좋은 분들이었으면 좋겠네. 홀 엄마 밑에서 컸다고 무시당하지는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태준을 바라보던 정은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생겼다.

“저기 근데…… 내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우리 만난 적 있나?”

정은의 물음에 다연과 태준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엄마 실은…….”

다연이 입을 열자, 태준이 나섰다.

“내가 말씀드릴게.”

“뭐야? 우리 아는 사이야?”

정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자, 태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양평에서 별장 관리하신 적 있으시죠?”

“그걸 어떻게 알아? 한 10년 전이었나? 1년 정도 살다 나왔는데…… 어머!”

“예. 그 집 아들입니다.”

“어머머머! 어떻게 이런 일이 있어? 이런 우연이!”

정은은 몰랐다. 그녀에겐 두 사람의 만남이 그저 우연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 모든 건 어떻게든 다연을 찾겠다는 태준의 노력 덕에 가능했다는 것을.

“그때도 참 잘생겼다 했는데, 이렇게 잘 컸네.”

정은은 예전 태준의 모습을 떠올리며 제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조금 음습한 느낌이 많았던 그였다. 공부만 해서 그런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잘 몰랐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 학생이 이렇게 변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잘 지내시고?”

“예. 건강하게 잘 지내십니다.”

“사모님은 참 좋은 분이셨는데…….”

태준을 바라보던 정은이 말끝을 흐렸다.

***

“아이구. 밥도 못 먹고 보내서 어떡해?”

정은은 현관 앞에 선 태준을 보며 안쓰럽게 말했다. 갑자기 만나는 바람에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었고, 냉장고까지 텅 비어 있어서 식사 준비할 것이 마땅치가 않았다.

정은은 귀한 손님을 과일 한 조각만 먹이고 보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불쑥 찾아왔습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정겹게 부르는 어머님이라는 말에 정은은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엄마, 나 요 앞까지만 바래다주고 올게.”

“그래. 조심해서 가요.”

“예.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태준은 문이 닫히자 크게 숨을 내쉬었다.

“떨렸어요?”

“응. 엄청.”

“난 집에 들어가면 등짝 스매싱이다.”

“집에 남자 들여서?”

“어떤 엄마가 딸 혼자 사는 집에 남자 들락거리는 거 좋아하겠어요.”

다연이 투덜대자 태준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뭐해요?”

“미리 쓰다듬어 주는 거야. 아파도 참아.”

다연은 그런 태준을 보며 피식 웃었다. 요즘 왜 이렇게 장난을 치는지.

“조심히 가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다연이 손을 흔들자, 태준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버렸다.

“왜요?”

“이대로 가라고?”

“그럼요?”

“나 오늘 꽤 기대하고 왔는데.”

“뭘요?”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 있던 태준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순간 그의 품에 안기게 된 다연은 그를 올려다보았고, 태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두 입술이 서로 맞닿자 엘리베이터가 닫혔고, 엘리베이터 안은 금세 뜨겁게 달아올랐다. 끈적한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고, 두 사람의 숨결 덕에 어느새 공기까지 뜨겁게 달궈졌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듯 두 사람은 더욱 서로를 갈구했다.

-지하 3층입니다.

야속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다연이 태준의 품에서 물러나며 그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헤어지긴 싫지만, 그렇다고 엄마를 홀로 두고 그의 집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연은 붉게 달아오른 태준의 입술을 매만지며 아쉽게 말했다.

“이제 가요.”

“싫은데.”

“싫으면. 안 가려고?”

“응. 지금은 안 갈래.”

태준은 건물 꼭대기 층을 누른 후 닫힘 버튼을 눌렀다.

“뭐 하는 거…… 헙!”

다시금 태준의 입에 다연의 입술이 먹혀버렸다. 다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시 몸을 비틀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정신이 다 혼미해질 정도로 아찔한 키스였다. 누가 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과 그런데도 떨어지기 싫은 성욕이 묘하게 두 사람을 흥분시켰다.

-13층입니다.

꼭대기 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음성이 나오자 태준은 다시금 지하 3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자 살짝 몸이 뜨는 기분이 들며 더욱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치아가 서로 부딪힐 정도로 두 사람의 키스는 격정적이었다. 태준은 다연의 여린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꽉 껴안았고, 다연은 그의 팔뚝이 깊게 파일만큼 손톱으로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하 3층입니다.

지하 3층에 도착했다는 안내음에 다연은 태준에게서 떨어졌다.

태준은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제 발 저린 두 사람은 잽싸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문이 닫히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깔깔거렸다.

“사람들이 다 본 거 아니에요?”

“보면 어때.”

“왜 이렇게 대범해졌어요.”

다연은 살면서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그렇게 키스를 나누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이지 이성까지 놓게 만드는 남자였다.

“헤어지기 싫어.”

“나도요. 어머, 립스틱 묻었네. 고개 좀 숙여봐요.”

어찌나 격정적으로 키스를 나눴는지, 태준의 얼굴 곳곳이 립스틱으로 물들어 있었다. 립스틱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셔츠는 꼬깃꼬깃 구겨져 있었다.

하긴 오피스텔 건물을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강렬한 키스를 나눴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됐다. 이제 어서 가요.”

“그래. 어머님 기다리시겠다. 다음에 정식 인사드린다고 말씀드려.”

“네. 그럴게요.”

태준과 아쉬움을 뒤로한 채 차에 올라탔고, 다연은 그의 차가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보다가 집으로 올라갔다.

집에 들어간 다연은 소파에 앉아 있는 정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잘 갔어?”

“응. 근데 엄만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온 거야?”

“그냥. 오랜만에 내 딸 보고 싶어서 왔지.”

“설마 다훈이 그 녀석 또 사고 쳤어?”

회사에서 대출받아 준 지가 고작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 무슨 사고를 쳤는지 걱정돼 언성이 높아졌다.

“아냐. 다훈이 이제 정신 차렸어.”

“정말이야?”

“응. 이제 사업 안 하고, 취직한대. 오늘도 면접 보러 갔어.”

“그럼 다행이고.”

동생이 사고 친 게 아니라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 좋은 대학 나왔으면 얌전히 취직이나 할 것이지. 사업은 무슨 사업.”

어려운 집안 형편 생각해서 국립대학에 진학했던 똑똑한 녀석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사업을 한다고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이젠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엄마. 저녁은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 요 앞에 엄마 좋아하는 간장 게장 잘하는 집 있는데.”

“응? 으응. 그래.”

“왜? 간장 게장 싫어? 반응이 왜 그래?”

간장 게장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정은이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풀 죽은 얼굴인지. 엄마한테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지, 다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은을 바라보았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다연이 묻자, 정은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다연아.”

“응. 말해요.”

“네 남자친구 말이야.”

“태준 씨? 응. 왜요?”

“저기 혹시…… 둘이 결혼할 생각이니?”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만약 결혼한다면 그 상대는 태준일 거다. 다연은 그를 사랑했고, 서태준이라는 남자 외에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됐으니까.

“아마도?”

다연이 대답하자, 정은이 기쁘지만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왜? 엄마는 태준 씨 마음에 안 들어?”

다연이 묻자, 정은이 조심스럽게 속내를 드러냈다.

“응. 마음에 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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