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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49화 (49/74)

49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온 세상은 하얗게 물들었고, 일찍 일어난 다연은 밖으로 나갔다.

별장 주인은 크리스마스를 챙긴다고 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트리도 꾸미고 예쁜 꼬마전구로 집안을 장식해 놓을 거라고 했다.

살면서 크리스마스를 챙긴 적 없었던 다연은 들뜬 마음에 밖으로 나가 크리스마스트리에 올릴 솔방울을 찾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예쁘게 반짝이는 커다란 별을 사서 트리 위에 얹고 싶었지만, 그럴 돈이 없었다.

솔방울을 깨끗하게 씻어서 주면, 사람 좋은 별장 오빠가 트리에 걸어주겠지. 그럼 난 산타 할아버지께 소원도 빌어야겠다.

별장 오빠랑 꼭 결혼하게 해달라고.

찻길 앞에 앉아 꽤 많이 쌓인 눈을 파헤치며 솔방울을 찾고 있을 때,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다연!”

고개를 들어보니 저쪽에서 별장 오빠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있어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썩 좋은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날 만나서 그런가 보다.”

다연은 수줍게 웃으며 별장 오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빠! 별장 오빠!”

눈은 쌓였고 날은 영하로 떨어져 길은 꽁꽁 얼어 있었다. 하지만 다연과 그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참 열심히도 뛰었다.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한참을 뛰어가고 있을 때, 별장 오빠의 얼굴이 새파랗게 식어버렸다. 두 팔을 흔들며 뭐라고 소리를 치는데,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거대한 경적 소리.

빵빵빵!!!!

아주 큰 트럭이 다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요즘 마을에 신축 건물을 짓는다며 트럭들 많이 지나다니니 차 조심하라는 엄마의 말이 왜 하필 그때 서야 떠올랐는지.

찻길 위에 선 다연은 바로 앞까지 달려온 트럭을 보고 두 발이 얼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저 두 눈을 질끈 감고 공포를 맞닥뜨릴 수밖에.

그때였다.

“연다연! 위험해!”

별장 오빠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이 어딘가로 밀려났다. 순간 길가에 있는 돌부리에 찢겨 극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다연은 있는 힘을 다해 별장 오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쿵- 소리와 함께 트럭에 부딪힌 별장 오빠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랐고, 공중에 떠 있는 그 잠깐의 찰나 다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우리 꼬맹이 무사해서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간 웃음을 본 다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그녀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어요. 며칠이 지나 있었고, 별장 오빠도 없는 상태였어요.”

몇 날 며칠을 울었다. 별장 오빠가 보고 싶다고, 불러 달라고. 엄마한테 떼를 썼고 애원도 했고 매달려도 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유학을 떠났다는 냉정한 말뿐이었다.

그 뒤로 다연은 그를 잊었다. 아니, 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고작 식빵 피자 하나 만들어준 것뿐인데, 고작 입맞춤 한 번 한 것뿐인데, 고작 마음 조금 준 것뿐인데, 그까짓 게 뭐!

그까짓 것 사랑 아니야. 난 그 오빠 좋아한 적 없어. 좋아한 적 없다고!

제 마음을 부정했고, 추억을 지워버렸다. 애초에 만난 적 없는 사람처럼, 생각나면 무시했고 떠오르면 지우기를 반복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워진 적이 없었다. 밀려나 본 적도 없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요리를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

“처음부터 알고 나한테 접근한 거였죠?”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는 내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연아’라고 부를 때에, 가족관계를 물을 때 ‘부모님은?’ 이 아닌 ‘어머님은?’하고 질문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성게 죽을 끓여줬을 때, 식빵 피자 위에 바질이 아닌 깻잎을 올려줬을 때, 제 몸에 깊게 파인 상처를 치료라도 해주려는 듯 핥아줄 때. 그때라도 알아봤어야 했다.

억울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왜 말 안 했어요, 왜!”

“…….”

“왜 태준 씨가 별장 오빠라고 말 안 했냐고요!”

다연이 원망 가득한 눈으로 묻자, 태준이 소리쳤다.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니까! 여기만 와도 이렇게 벌벌 떠니까!”

“……!”

“내가 별장 오빠라는 걸 밝히면 우리 이야기는 여기, 이곳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죽어도 싫었다.

끔찍했던 사고가 있었던 곳, 그 사고로 인해 헤어져야 했던 이별의 장소에서 다연과 다시 시작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태준은 다연과의 두 번째 시작은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길 원했고, 다른 추억으로 시작하길 원했다.

“하지만 내가 별장 오빠라는 걸 말하면 넌 단번에 물어왔을 거야. 그때 괜찮았냐고, 왜 날 떠났냐고, 그리고 왜 날 찾지 않았냐고.”

그러면 태준은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끄집어내야 했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어야 했을 거다. 새로운 시작을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우리의 시작이 그때의 그 사고부터 떠오르게 하고 싶지 않았어. 너도, 나도 고통스러웠잖아.”

다연의 말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동안 원망만 했다. 저를 두고 유학이나 가버리는 나쁜 놈이라며 욕하고 미워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자신보다 더 아팠고, 자신보다 더 힘들었고, 자신보다 더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직 묻고 싶은 말이 한 가득인데, 하고 싶은 말이 가슴 속에 많이 남아 있는데, 다연은 일단 참기로 했다. 물어볼 기회와 시간은 많이 있을 테니까.

“울지 마. 못 생겨지니까.”

태준이 다가와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고, 그의 농담에 다연은 눈물이 조금 들어갔다.

“언제는 울어도 예쁘다면서.”

“그땐 어렸잖아.”

“치. 오빠도 많이 늙었거든? 그땐 피부가 탱탱했는데.”

“지금도 탱탱해. 만져봐.”

태준이 다연의 손을 잡아 제 얼굴 위에 올렸다. 부드러운 그의 피부가 손끝에 닿자,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륵 녹는 것 같았다.

“억울해하지 마. 나도 내가 나라는 거 밝히지 못해서 답답했어.”

“그때도 나인 줄 알았어요?”“언제?”

“서원이 식당에서 나 처음 만났을 때.”

“당연하지. 난 첫눈에 알아봤어.”

“그럼 알고도 거길 따라온 거예요?”

“어디?”

“……호……텔.”

다연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서태준이라는 남자와 호텔 간 건 부끄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별장 오빠와 호텔에 갔다는 생각을 하자 왠지 모르게 창피해졌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는데.”

“뭐라고요?”

다연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기자, 태준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가 어른이 돼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왜 기뻤는데요?”

“어른이 됐으면 어른의 연애를 할 수 있으니까.”

“어른의 연애?”

다연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태준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놀이라든가.”

“놀이?”

“예를 들어 이런 거?”

태준은 촉 소리가 나도록 다연의 입술을 머금다가 놔주었다. 그러자 다연이 바쁘게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뭐 하는 거예요? 회사 사람들이 사방에 깔려 있는데.”

“뭐 어때. 나 이제 안 숨겨.”

“설마 공개하자고요?”

“그럼 언제까지 숨기게?”

“하지만…….”

“싫어. 이젠 나 너 안 놓칠 거고, 사방팔방 다 말하고 다닐 거야. 연다연은 내 여자라고. 억울하면 너도 말하고 다녀. 서태준은 내 남자라고.”

당당한 태준의 말에 다연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의 말처럼 이젠 더 이상 감추고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 연인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다연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늘처럼 그의 키스를 기다린 적도 없었을 거다.

너무도 힘든 하루였고 또 너무도 그리웠던 그의 품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다가오자, 다연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열어 그를 반겼다. 뜨거운 입김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고,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던 그의 혀가 들어와 여린 제 속살을 건드렸다.

태준은 다연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허리를 굽혔고, 다연은 태준과 더 닿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자신의 입술을 탐하던 태준의 입이 어느새 다연의 목덜미로 향했다. 그녀의 입에서 진득한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와 동시에 다연이 놀란 듯 뒤로 물러섰다.

“미쳤나 봐.”

“왜?”

“여기 밖이에요.”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 내 방 비어 있을 텐데.”

태준이 진심이 잔뜩 담긴 말을 장난스럽게 던지자, 다연이 눈을 흘기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시죠.”

태준은 순순히 다연의 말에 따랐다. 어쨌든 회사 일정으로 온 것이었으니, 애정행각은 여기서 멈추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내일은 본격적인 애정행각을 할 작정이었다. 오랜만에 아주 뜨겁고 길게.

***

다음 날.

별장에서 해장 겸 아침을 해결한 직원들은 곧장 회사로 출발했다. 회사에 조리도구와 짐만 정리하면 바로 퇴근이었다.

다연은 가져갔던 짐을 정리하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태준의 차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로 갈까? 너희 집, 우리 집?”

“우리 집으로 가요. 나 옷이 없어.”

“옷 없어도 되는데.”

태준이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다연은 눈도 흘기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내 남자친구가 왜 이렇게 엉큼해졌지?”

“여자친구가 너무 섹시해서?”

“치. 말은.”

“출발한다. 오늘은 정말 안 봐 줄 거야. 각오해.”

태준은 다연의 손을 레버 위에 올리고 그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잠시의 시간도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겨우 여기까지 왔다.

사라진 다연을 찾기 위해 우리나라 전국은 물론 외국을 전전했던 그였다. 이제 그녀를 찾았고, 별장 오빠라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태준은 다연에게 어떻게 프러포즈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녀 성격에 요란하고 화려한 이벤트는 싫어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너무 소소하게 지나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반지부터 사야겠다. 다연처럼 반짝거리는 예쁜 반지부터.

오피스텔에 도착해 긴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다연이 그의 품을 파고 들어왔다.

“좋다. 태준 씨 냄새.”

태준은 자신의 옆구리에 달라붙은 사랑스러운 여인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정말이지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행복했다.

서로를 꼭 끌어안고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다연아!”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다연을 불렀다.

순간 놀란 다연과 태준이 소리 나는 쪽을 응시했고, 불이 켜지지 않아 컴컴했던 복도 끝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움직임을 감지한 복도 센서등이 켜졌고,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이 훤히 보였다.

“엄마?”

다연의 집 앞에서 그녀를 부른 건 다름 아닌, 다연의 엄마 정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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